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232화 (232/325)

[232]

여전히 보스턴 레드삭스의 타자 중 절반 이상은 번트를 준비하고 나온다.

그렇다고 한들, 동팔이 유연하게 대처하기 때문에 점수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동팔도 계속 같은 패턴을 유지할 수 없었다.

"후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가볍게 심호흡을 하는 동팔.

'어차피 만루라 도루는 신경 쓸 필요 없어. 있다면 치고 달리거나, 달림과 동시에 치는 거겠지. 어차피 아웃카운트 하나는 남으니 어떻게든 점수를 더 내려고 할 거야.'

달아날 수 있을 때 달아나는 것이 좋다. 양키즈의 수비가 무너진 지금이라면 절호의 기회가 된다. 다만 여전히 부담스러운 것은 동팔이 건재하다는 것.

그의 날카로운 공은 번트가 아니면 배트에 닿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운이 좋아 맞히는 것이 전부였다.

심호흡을 한 동팔은 눈빛을 빛내며 공을 전력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휙~ 퍽!!

초구부터 빠르게 날아간 공은 번트 자세를 취한 타자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뺄 정도였다.

그리고 공에 의해 갈라진 대기의 여파가 뺨을 통해서 강하게 느껴졌다.

'젠장, 까딱 잘못하면 얼굴이 날아가겠어…….'

번트는 생각보다 위험한 기술이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능숙해지기 전까지 공을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배트에 가까지 가져가야 한다.

그러다 혹시라도 실수하게 되면 공이 잘못 튀어 얼굴에 맞는다. 운이 나빠 이빨에 맞으면 단단한 야구공에 의해 부러지기 마련이고, 눈에 맞으면 실명까지 각오해야 한다.

아마추어리그도 그런데 100마일이 넘는 강속구가 날아온다면?

동팔의 강속구에 타자는 고민해야 했다.

'번트를 계속 해도 될까?'

까딱 잘못하면 선수생활이 끝나는 것은 물론 장애인이 될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런 두려움이야 말로 동팔이 바라던 목적이었다.

타자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자 동팔은 더욱 적극적으로 강속구를 던졌다.

휙~ 퍽.

"스트~ 라이크!!"

휙~ 퍽.

"스트~ 롸잌, 아웃!!"

타자는 100마일이 넘는 강속구에 배트를 가져갈 생각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물러나고 말았다.

1사 만루의 위기 상황에서 동팔은 삼구삼진으로 큰 위기를 하나 넘겼다. 이것으로 상대가 희생플라이를 노리는 것을 막았다.

아웃을 당해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타자에게 기다리고 있던 선수들은 타박하지 않았다. 그들도 강속구를 상대로 번트를 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동팔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피칭에 타자들은 고민했다.

'우리도 계속 번트를 댈 수 있을까?'

'번트가 아니면 수비를 뚫을 마땅한 방법이 없는데…….'

그나마 번트를 통해 공을 보내면 수비의 실책을 유도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좋은 기회가 만들어진 것.

그런데 번트를 하지 못하게 되면 수비가 실책을 할 구멍을 만들 수 없게 된다.

타격 자체를 봉쇄하며 분위기를 바꾸려는 동팔의 의도임을 알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

몰아치는 거센 물살을 가르고 있는 거대한 바위처럼 동팔은 지금의 흐름에 홀로 저항하고 있었다.

아무리 선수 한 명이 미치는 영향이 적은 야구라지만, 동팔의 기세에 영향을 받아 보스턴의 타자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타석에 선 타자는 다른 타자들이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번트를 해도 될까? 일단 감독님이 지시하셨지만…….'

겁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번트를 잘 못 댔다 강제로 은퇴하게 되는 것은 사양이다.

구단이 보상을 해주면 또 모른다. 하지만 그 보상이 부상에 비해 너무 작을 것이란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거기에 지금은 개막전이다.

포스트시즌도 아니고, 월드시리즈에서 마지막 타석에 자신이 선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번트 자세를 취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배트를 대기가 쉽지 않았다.

휙~ 퍽!

"스트~ 라이크!"

이번에도 역시 제구가 잘되는 강속구로 밀어붙이는 동팔. 거기에 공의 회전도 빨라 댄다고 한들 원하는 위치로 보낼 가능성이 낮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 타격 코치가 타자에게 사인을 보냈다.

'휴~ 살았다. 이제 번트는 하지 말라는 거지?'

그들도 번트를 잘못 대다가 선수가 부상을 당하면 좋을 것이 없었다. 지금은 시즌 초반.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은 이상 위험한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선취점을 냈으니 지키는 방향으로 가. 이번 기회가 아깝지만, 번트로 가면 될 것도 안 될 거야."

상대의 강속구에 겁을 먹어 적극적으로 번트를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정공법이 더 낫다고 판단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감독. 그나마 남아있는 기회마저 사라지기 전에 사인을 보내어 희망을 살려놔야 했다.

번트를 그만두고 제대로 타격자세를 잡은 타자.

그리고 변화된 상대의 작전에 동팔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더 이상 번트는 하지 않겠다는 건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상대가 번트를 포기한 이상, 오히려 상대하는 것은 더 쉬웠다.

쉭~ 툭!!

동팔은 상대의 헛스윙을 유도하기 위해 포크볼을 던졌다. 그리고 생각보다 빠르게 날아온 공에 타자는 배트를 휘둘렀지만, 이미 공은 바닥으로 떨어진 다음이었다.

혹시라도 공이 밑으로 빠지면 3루 주자가 홈으로 달려올 수 있었지만, 이미 사인으로 의견교환을 했기에 그런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만루에 2아웃 2스트라이크.

투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카운트지만, 한 방을 허용하면 적어도 2점 이상의 자책점을 허용하니 방심은 금물이었다.

동팔이 원래대로 투구하자 타자는 다시 번트 자세를 취하려 했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접었다.

'안 돼. 이미 2스트라이크인 이상, 볼이 아니면 난 아웃이야.'

그래서 이번에도 타격자세를 잡고 준비했다. 여전히 위험은 존재했고, 와일드피칭이 되는 순간 지금까지 들인 공은 전부 와해된다.

그래서 동팔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집중에 집중을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주변의 모든 것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

방금 전만해도 평범하게 박수를 치거나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슬로우모션처럼 보인다. 그리고 타자의 모습도 평상시와 달리 더 선명하게, 확대되어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 내가 미쳤나?'

하지만 자신의 모든 행동도 역시 느리게 보였다. 빨리 움직이려 했지만, 생각과 달리 자신의 몸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느리게 움직였다.

'아,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공을…….'

포수와 사인을 교환하여 마친 구종대로 그립을 쥐었다. 그러자 평상시와 달리, 잡은 그립과 야구공의 심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눈으로 타자를 보고 있었지만, 자신이 공을 어떻게 쥐었는지 저절로 머리에 그려졌다.

느리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평상시와 같이 공을 던지는 동팔.

다리를 올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올린 다리를 앞으로 뻗고, 온몸의 근육을 통제하며 투구동작을 섬세하게 가다듬었다.

'여기서 발을 힘차게, 흔들리면 안 돼. 허리부터 시작해서… 팔은 이렇게…….'

최적의 투구 동작을 생각하며 세심하게 조종해 나가는 동팔. 그리고 이내 손에서 공이 떠나지 직전에 악력으로 공의 회전을 원하는 만큼 정확히 주었다.

'이번에 던지는 것은 빠른 커브. 그러기 위해선 바로 앞에서 떨어지게 해야 하니 회전은 가능한 많이…….'

이전에는 감각만으로 볼의 회전을 조절했지만, 적어도 지금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가락을 통하여 완벽하게 힘을 싣는데 성공했다.

동팔의 눈에 여전히 세상은 느리게 보였으며, 날아가는 공도 선명히 보였다. 다만 주변에 들리던 시끄러운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들리더라도 잠수한 것처럼 먹먹하게 울리기만 했다.

'설마 내 착각은 아니겠지. 공이 느리니까 타자가 기다리고 있으면 안 되는데…….'

하지만 동팔의 걱정과 달리 타자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동팔이 느끼기에 몇 초의 시간이 지나자 타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자가 향하는 배트의 방향은 이대로 공이 날아왔을 때 안타가 가능한 코스였다. 하지만 애초에 커브로 생각하고 던진 것이라 동팔은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이 홈플레이트에 가까이 가도 궤도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되었다.

'잠깐, 이거 공을 너무 쌔게 던졌나? 변하기 전에 먼저 도달하는 건 아니겠지?'

동팔의 걱정과 달리, 홈플레이트에 두 걸음 떨어지자 공은 이전의 궤도가 아닌,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타자의 배트가 공을 아주 미세한 차이로 스쳐지나가는 것이 동팔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퍽!

공이 포수 미트에 들어가는 순간, 느리게 보이던 세상이 원래대로 보였다.

"스트롸잌~ 아웃!!"

남은 두 개의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으며 1사 만루의 위기를 극복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동팔은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갑작스러운 경험이라 당황스럽지만, 다행히 자신에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멍하니 있는 동팔에게 포수가 다가와서 말했다.

"잘했어. 그런데 뭐해? 돌아가야지."

"아, 응……."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마운드에 계속 있다고 해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료와 함께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선수들은 영웅적인 활약으로 위기를 넘기게 해준 동팔을 격하게 반겨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격한 환영에도 동팔은 크게 기뻐하지 않고, 방금 전에 일어난 현상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날 때까지 방금 전에 겪었던 현상은 다시 겪지는 못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동팔 덕분에 위기를 넘기자, 흐름이 뉴욕 양키즈로 넘어왔다는 것.

그리고 타선의 폭발로 인해 8대 1의 점수 차이로 개막전을 승리했다는 점이었다.

***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 양키즈의 선수들은 항상 하는 대로 이후에는 자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이미 정오에 와서 훈련을 했으니 퇴근을 한 이상, 자유 시간을 만끽하는 것은 어느 직장인과 다를 바 없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각자의 집이나 단골집에 즐길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캉, 시간 돼? 오늘 이겼으니 가볍게 한 잔 해야지?"

"미안, 난 조금 더 있다가 집에 가려고. 내일 봐."

데니 행크스의 제안에 동팔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가 향하는 곳은 구장 내에 있는, 양키즈 선수 전용 헬스장이었다.

"경기 끝났는데 웨이트?"

"응. 그냥 가볍게 몸을 푸는 정도만 하고 가려고."

동팔의 말에 다른 선수가 데니 행크스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동양인의 근면함이야. 경기 끝나도 따로 운동한 다음에 간다고. 동팔의 일상이니까 익숙해질 거야."

그리곤 다른 선수들은 각자 오늘의 승리를 즐기기 위해 삼삼오오 모인 후, 각자 흩어졌다.

그렇게 선수들은 오늘의 승리를 기뻐하며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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