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228화 (228/325)

[228]

'상대가 만만하지 않지만 그래도 동팔의 공보다 쉽게 타격할 수 있는 녀석이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동팔의 공을 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해버린 행크스. 그리고 혹시 아직도 혜진이 있는지 살펴봤다.

그런데 혜진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로 타격코치 옆에 서 있던 것이었다. 공이 배트에 잘못 맞아 엉뚱한 곳으로 튕기더라도 안전한 곳에서 그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거야?'

데니 행크스는 다시 타격자세를 잡았다.

'이번엔 반드시 친다. 반드시…….'

하지만 의욕만 앞세운 탓일까? 연속으로 날아오는 공을 치지 못하고 결국 헛스윙으로 삼진을 기록하고 말았다.

휭~.

"큭!!"

지난 시즌보다 구위가 더 좋아졌는지 이상하게도 이번에 올라온 투수의 공을 치지 못했다. 결국 다른 선수에게 타석을 넘겨주고 나와야 했다.

그러면서도 슬쩍 혜진이 있던 곳을 보았다. 그곳에서 혜진은 무언가 더 이야기를 하더니 그에게 다가왔다.

'어? 왜 나한테?'

설마 자신의 뒤에 있는 다른 선수에게 가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주변은 물론 뒤에도 다른 선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잘한 것도 없는 상황에 그녀가 오니 왠지 민망했다.

'아, 설마 이번 건 신경쓰지 말고 다음에 잘할 수 있다고 하려는 건가?'

미인을 통해 선수들의 훈련 의욕을 고취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데니 행크스. 하지만 그건 그만의 착각이었다.

"미스터 행크스. 초면에 죄송하지만 한 마디 말해야 할 게 있어요. 방금 전 타격 폼은 대체 어떻게 된 거지요? 평상시 당신의 타격 폼이랑 전혀 다르잖아요."

"네?"

"어깨가 너무 열려 있었어요. 배트 헤드도 너무 높았고, 몸의 밸런스도 어긋나서 너무 뒤로 가 있었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꼬시려던 미인이 자신에게 충고를 했다. 그것도 억대 연봉 계약을 한 자신에게? 그러자 그는 화가 나면서도 그녀의 얼굴을 보자 절로 화가 가라앉는 기묘한 상태를 경험했다.

"아… 저…그게……."

자신을 무시하는 말에 짜증과 분노가 치솟는다. 하지만 이대로 화를 내면 앞으로 혜진에게 다가갈 때 많은 난관이 생기기 마련.

'음… 이럴 땐 그냥 받아들이는 척하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 혜진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아… 네… 뭐…알겠습니다. 그런데…여기서 어떤 역할을 하고 계신 건가요?"

그렇다고 주도권을 쉽게 넘겨주고 싶지 않은 그. 남자의 자존심이 뭐라고 여자에게 뒤쳐지지 않겠다는 옹졸한 발상이었다.

그럼에도 혜진은 그의 말에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양키즈 수석 전력분석관인 혜진입니다. 당신의 타격 폼은 이전부터 분석이 끝났어요. 하지만 방금 전에 한 타격폼은 아마추어도 하지 않을 정도로 허술했습니다. 정말 억대 연봉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의외로 신랄한 혜진의 말에 데니 행크스는 뭐라고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그랬습니까?"

"네, 힘이 너무 들어가 있었어요. 그래서 평소에 칠 수 있는 공도 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뒤에서 보고 있던 타격코치가 와서 말했다.

"내 생각도 그녀의 생각과 같아. 너무 힘이 들어갔어. 왜 그런지 짐작은 가지만 헛물켜지 말고, 지금은 훈련에만 집중해."

한때 전성기 시절에 뛰어난 업적을 쌓은 그의 말에 데니 행크스도 더 이상 뭐라 따질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혜진은 무작정 야단만 치지 않았다.

"잘할 수 있는 선수가 잘하지 못해 순간 화가 났습니다. 말이 과했다면 사과드립니다."

칭찬과 야단이 적당히 섞여 있는 그녀의 말. 그리고 방금 전의 타석에서 분명히 자신이 잘한 것은 없었다.

"아닙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고치면 되겠습니까?"

"먼저 타격 자세를 취해보세요."

그녀의 말에 행크스는 방금 전과 같은 타격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혜진은 일일이 수정을 해 주었다.

"지금 행크스 선수의 달라진 점은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에요."

혜진은 행크스의 어깨와 허리를 잡아 자세를 교정했다. 그리고 배트헤드의 위치도 수정해주었다.

그녀의 작은 손길이 닿자 왠지 기분이 좋았다. 분명히 애정이 담긴 손길이 아니라 단순히 훈련 중에 교정하는 손길임에도 불구하고.

덤으로 혜진의 교정이 끝나자 행크스의 얼굴은 다른 이유로 붉어졌다.

'아… 내가 방금 전에 한 자세가 그렇게 엉망이었다니…….'

그도 프로인 이상, 혜진이 왜 그렇게까지 말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말대로 아마추어조차 하지 않을 실수였다.

혜진에게 잘 보이겠다는 생각에 힘이 과도하게 들어갔고, 심지어 자세도 요상하게 바뀐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자상하다니… 이런 여성이라면 평생 함께라도 좋아!!'

그동안 야구만 보고 살아온 외길 인생에 꽃이 피는가 싶었던 그는 바로 행동에 옮겼다.

"혜진씨라고 하셨나요?"

"네."

"저와 사귀어주시겠습니까?"

"네?"

갑작스러운 고백에 혜진은 물론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타격코치도 황당했다. 이내 타격코치는 크게 웃었고, 혜진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에 낀 결혼반지를 보여주었다.

"죄송합니다만, 이미 남편이 있는 몸이에요. 미안하지만 마음도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녀의 말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데니 행크스. 그리고 그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야~ 데니 행크스가 혜진씨한테 고백했다~!!!!! 크하하하하하하~!!!"

타격코치는 정말로 참을 수 없는지 배를 잡고 웃었다. 그의 외침을 들은 다른 선수도 웃음이 크게 터졌다.

"풉!!"

"뭐? 정말?"

"크하하하!!"

그렇지 않아도 어제 이와 같은 불상사가 생길 뻔했다. 그리고 자신이 혹시라도 할 뻔한 실수를 억대 계약자인 데니 행크스가 하고 말았다.

어제의 일은 어제의 일이고, 새로운 놀림감을 발견한 그들의 악동기질이 행크스를 향해 놀림의 웃음을 날려주었다.

졸지에 놀림감이 된 행크스는 오늘 최악의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최악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 멀리 있던 지완이 후다닥 달려왔다. 그리고 물었다.

"여보 어떻게 된 거야?"

그의 물음에 혜진은 사실대로 말했다.

"아, 허니(honey)?(혜진이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지완이 자신의 남편임을 행크스에게 알리기 위해) 코치님이 말씀하신대로 미스터 행크스가 나한테 사귀자고 고백했어."

다른 사람은 다 웃고 넘어가도 지완만큼은 웃고 넘어갈 수 없다.

비록 초면이라도 그는 남자로서 할 일을 해야 했다.

"야, 너 지금 결혼반지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나랑 싸우자는 거야?"

"아, 아니 그게……."

솔직히 말해 그는 억울했다. 결혼반지도 그녀가 말해주는 바람에 알게 되었다. 거기에 그녀의 남편이 남궁지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설령 아는 사이라도 동팔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애초에 거기까지 생각하지도 않았다.

결국 자신의 실수인 것은 분명하였으니 데니 행크스는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사과를 하고 나서야 훈련에 복귀할 수 있었다.

# 2년차 징크스?

스프링캠프에서의 일정은 단순하다.

정해진 프로그램에 맞추어 훈련을 한다. 단지 그뿐이다. 하지만 그것만 하면 흥미가 떨어질 수 있으니 때론 훈련만 하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게임이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팀워크를 다져나간다.

혜진도 스프링캠프에 합류하게 되면서 예은이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당연히 그 사람은 보모가 아닌 민희가 하게 되었다.

아직 임신 초기라 주의해야 할 상태지만, 하얀 늑대의 벗의 도움으로 아기가 보호받으며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민희와 혜진, 예은이와 하얀 늑대의 벗은 스프링캠프의 한 휴게실에 있었다.

"역시 엄마는 못 이기나봐요. 저랑 있을 때도 좋아하지만, 엄마 옆이 더 좋은가 떨어지지 않네."

"혈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때론 그것 때문에 힘들기도 하지만, 도움이 될 때가 더 많다."

민희와 하얀 늑대의 말대로 예은이는 엄마의 품에 안기더니 팔로 꼬옥 안고 있었다. 아기의 작은 팔이 안는다고 얼마나 안을 수 있을까만, 그래도 그걸 느끼면 혜진은 자신이 한 아이의 엄마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자주 만나서 돌봐줘야 하는데 내가 예은이한테 많이 미안해."

"하지만 언니가 하고 있는 일은 시간을 많이 쓰는 일이니까요. 그나마 다행인 건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고……."

"어쩔 수 있나. 정보의 최신화를 위해선 직접 보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잖아. 특히 양키즈 선수의 경우는 비디오 장면으로 보는 것보다 이렇게 와서 보는 것이 더 정확하고 효율적이니까."

이전의 정보는 최근의 정보에 덧씌워진다. 그렇다면 이전의 정보를 전부 다시 보는 것보다 지금 하는 것을 보는 것이 더 낫다.

그렇다고 이전의 타격폼이나 투구폼, 및 자세와 기록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이미 그에 대한 정보가 혜진의 머릿속에 있으니까.

시즌이 끝나자마자, 민희의 말을 통해서 혜진은 자신이 양키즈로 갈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이후로 혜진은 다른 누구보다 바쁘게 자료를 수집하며 다음 시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성과가 얼마 전에 나타났다.

"그리고 놀라운 건 잠깐 쉬는 사이에 선수들의 폼이 다 떨어졌어. 일부 선수를 제외하면. 그것도 모르고 시즌을 시작하면 초반부터 대패했을지도 몰라. 거기에 여전히 팀워크에 대한 문제도 남아있고."

"그동안 호흡을 맞춰온 선수가 떠나고, 새로운 선수가 오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일이다. 단순히 선수의 스펙만으로 승리를 따낼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야구가 아니다."

하얀 늑대의 벗의 말대로 연봉이 많은 선수가 많은 팀이 항상 승리를 거두지는 않는다. 의외로 박봉의 팀이 강팀을 상대로 유기적인 플레이를 한 끝에 승리하는 경우도 꽤 많다.

물론 승률은 돈을 많이 쓴 팀이 높다. 다만 돈을 효율적으로 사용했다는 전제가 붙는다. 거액을 투자하여 뛰어난 기록을 새운 선수를 데려왔는데, 그 선수가 활약도 못하고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되면 돈은 허공에 사리진 것과 같다.

그리고 선수를 데려온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번 시즌에 빨리 팀에 녹아들어야 한다.

찰나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스포츠가 야구인 이상, 팀워크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실책이나 실수로 이어져 실점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메이저리그에서 화려한 타격과 뛰어난 구위, 그리고 믿기지 않을 수비가 일어난다. 하지만 동시에 믿기지 않을 실책도 종종 일어나는 것도 현실이다.

팀워크를 강화하기 위해선 선수들 사이에 친해지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제일 거들먹거릴 거라 예상한 데니 행크스를 잡은 것이 주효했죠. 그 선수가 잡히니 다른 선수도 같이 잡혔거든요. 다 미리 짜 놓은 함정인걸 그가 알까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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