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동팔은 두 사람을 마이클에게 소개했다.
"지완은 알고 있지? 경기장에서 몇 번 봤을 거야."
"그럼 잘 알고말고. 캔자스시티의 에이스였잖아."
지금 중요한 것은 지완이 아니었다. 옆에 바짝 붙어 앉은 혜진이 누구냐인 것이 중요했다. 동팔은 혜진을 가르키며 그녀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리고 여기는 혜진이라고 지완의 와이프. 이번에 양키즈 수석분석관으로 와 있어."
동팔의 뒷말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동팔이 앞에 한 말이었다.
"뭐?!!"
"와이프~!!!"
그리고 동팔의 소개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선수들은 전부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아니길 바랐던 것이 확실시 된 것이었다.
그러는 선수들을 보며 감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 몰랐어? 내가 말 안 해줬나?"
솔직히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 그였다. 그리고 코치들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 동팔의 말에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다.
감독과 같이 선수들을 놀리며 말했다.
"이거 조금만 늦었으면 고백할 녀석이 나왔을지도 몰라."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빨리 밥이나 먹고 쉬기나 해. 이것들아."
***
그렇게 하루가 지나서 다음날 아침.
"하이~ 저 왔습니다."
오늘 오기로 한 데니 행크스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그가 도착하자 감독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억대 연봉을 가진 선수이니 관리하는 차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뛰어난 실력을 가졌으면 그에 맞게 행동해. 너보다 더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도 솔선수범하는 곳이 양키즈야."
감독은 그 말을 하면서 동팔을 텃짓으로 가리켰다. 즉, 너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을 선수인 동팔도 이미 와서 같이 훈련을 받고 있는데 너는 왜 이제 왔냐는 핀잔이었다.
물론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의 미국이라지만, 최소한 팀으로 움직일 때엔 스스로 자중하는 것도 중요한 덕목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뭐 부터 하면 됩니까?"
바로 타격 능력을 보여줘서 감독은 물론 코치와 다른 선수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러자 감독이 지시한 것은 의외의 것이었다.
"트랙 돌아. 걷는 건 안 되고 무조건 뛰어."
"네? 제가 체력 훈련을요? 저 데니 행크스입니다."
억대 연봉인 자신에게 그런 귀찮은 훈련을 시키냐는 투덜거림이었다. 솔직히 유산소 운동만큼 사람을 힘들게 하고 피곤하게 하며 하기 싫은 건 많지 않다.
차라리 투수가 던지는 공을 제대로 때리는 편이 더 낫고, 효율적이고,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감독의 말이 바뀌지 않았다.
슥.
감독은 이번에도 동팔을 텃짓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그곳에선 동팔을 비롯한 다른 선수들이 트렉에 서서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출발신호와 함께 세 명의 선수가 트랙을 돌기 시작했다.
출발신호를 보낸 코치가 초시계로 기록을 재는 모습이 데니 행크스의 눈에 들어왔다.
'응? 이건 동팔도 뛰는데 나보고 왜 안 뛰냐는 압박이야?'
정답.
동팔과 재계약을 못해서 안달인 쪽은 양키즈다. 정확히 말하면 재계약이 아니라 계약 갱신이 맞을 거다.
더 높은 연봉과 계약금으로 자유계약신분을 얻을 때까지 묶어 놓고 싶은 것이 양키즈 구단의 심정.
하지만 동팔은 자신이 2년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현재 하고 있는 계약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감독의 압박에 데니 행크스도 마냥 밀어붙일 수 없었다.
그러다 그의 눈에 한 선수가 들어왔다. 트랙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는 지완이었다.
"저 친구는 왜 안 뜁니까?"
타자인 그가 지완을 몰라볼 리 없었다. 캔자스시티의 1선발급인 투수를 모른다면 그 자체로 타자 실격이다.
동시에 1선발인 그가 왜 갑자기 헐값에 양키즈로 가게 되었는지도 알고 있다.
자신보다 몸값이 낮은 지완이 안 뛰는데 왜 자기가 뛰냐는 생각이 든 데니 행크스. 그의 생각을 안 감독이 말했다.
"재활중이야. 무리하면 안 돼. 하지만 넌 건강하지."
특별관리 대상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감독. 이제 더 이상 핑계댈 것이 없어진 데니 행크스는 어쩔 수 없이 트랙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감독이 그에게 소리쳤다.
"뛰어!!"
"네!"
아무리 억대 연봉을 받더라도 감독의 눈 밖에 나면 끝이다. 처음이야 타석에 올려 보내도 성적이 신통치 않으면 안 올려 보낸다.
선발 라인업과 로스터 명단을 구성함에 있어 절대 권력을 쥔 사람이 감독이다. 물론 자신의 사적인 감정으로 권력을 함부로 사용하면 그 자체로 감독실격이지만.
트랙으로 달려가는 도중, 그의 눈에 띈 한 사람이 있었다.
"와우……."
바로 지완의 옆에 다가온 혜진이었다. 인종을 넘어 아름다운 여성은 남자들의 시선을 본능적으로 잡아끈다.
데니 행크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저놈한테 붙어 있는 거지? 그냥 같은 나라 사람이라서 그런가?'
만약 그가 혜진과 가까이 있었다면 결혼반지를 보고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지가 보일 정도로 가깝지 않아 단순하게 생각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도 프로인 이상, 바로 가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좀 있다 보자…….'
다만 지금은 처음 와서 얼굴을 보이는 자리. 코치와 선수들에게 얼굴도장을 찍고, 감독이 지시한 트랙을 달리는 것을 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달리는 것은 단순한 달리기가 아니었다. 단거리 승부가 아닌, 체력을 기르고 체크하기 위한 오래 달리기였다.
트랙 7바퀴 반을 정해진 시간 안으로 돌기 위해 간만에 땀을 흘린 데니 행크스. 정해진 코스를 다 돌고 코치의 허락 하에 그늘이 있는 곳에서 겨우 쉴 수 있었다.
"후우… 생각보다 빡세네……."
이온 음료를 먹으며 체력을 다시 회복하고 있을 때, 그의 눈을 끄는 것은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나온 혜진이었다.
그 모습을 처음 봤다면 단순히 호기심만 생기고 말았겠지만, 이미 봤었기에 데니 행크스는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좋겠다. 애인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혜진의 경우, 애인이 있으면 큰일나는 유부녀란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누구인지 열심히 추측하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없으니 기자는 아닌 것 같고, 양키즈와 연관된 사람인가? 놀러온 사람으로 보기엔 본인이나 다른 사람들도 익숙한 것 같고…….'
다른 선수의 경우 어제 봤으니 익숙한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혜진과 익숙한 사람은 남편인 지완과 친구인 동팔. 그리고 자기 팀의 선수와 다른 구단의 선수를 분석하면서 익숙해진 코치와 감독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데니 행크스로선 거기까지 생각하는 것이 한계였다.
'적어도 구단 직원이라면 생각보다 자주 마주치겠지. 다른 녀석이 먼저 다가가기 전에 내가 먼저…….'
그 생각을 하고 일어나 혜진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타격코치가 와서 말했다.
"다 쉬었지? 그럼 이제 타격 훈련한다. 가볍게 몸을 푸는 거니까 어깨에 힘 너무 들어가게 하자 마."
아쉽게도 코치가 막았다. 아쉬움을 뒤로하면서 데니 행크스는 혜진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배트를 꽉 움켜쥐며 생각했다.
'됐어. 오히려 큰 소리를 내면서 제대로 때리면 나에게 조금 시선이 가겠지. 그리고 양키즈 직원이면 내 연봉에 대해 모를 수 없어.'
미국 달러 기준으로 억대 연봉은 한국 돈으로 따지면 천억이 넘는 돈이다. 정확히 말하면 자유계약 신분이 되면서 대박이 터진 경우로 총 계약금이 억대에 해당한다는 의미다.
그가 양키즈와 맺은 기간은 3년이었고, 그 사이에 계약금으로 억 단위의 돈을 받는 것도 확실히 대단한 일 중 하나.
남들이 쉽게 만질 수 없는 돈을 이번 시즌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돈으로 여자를 꼬시는 건 하책이라 생각하는 데니 행크스였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걸 어필하고 싶었다. 더불어 자신의 능력도 같이.
하지만 타석에 들어선 그는 절로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어? 강동팔?"
하필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투수가 강동팔이었다. 그 또한 지난 시즌에 다른 구단에 있었으니 동팔을 상대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타자와 마찬가지로 무안타에 삼진도 섞여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선 통타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상대가 나빴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있었다.
'설마 전력으로 던지지는 않겠지? 이건 단순히 스프링캠프고, 훈련을 이제 시작하는 때잖아?'
그냥 투수들이 마운드에 올라와 타자들이 칠 공을 던져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전력으로 던지지 않고 타격 감각을 끌어올리는 수준으로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날아오는 공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휭~!!
"어?"
그동안 상대하면서 상대 투수의 구속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지금 동팔이 던진 공의 구속은 그의 감각으로 따지면 160에 조금 못 미쳤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공에 데니는 황당해서 배트를 바닥에 딪고 말했다.
"잠깐, 이거 단순히 피칭훈련 겸 타격훈련 아니었어? 왜 이렇게 빨라?"
그의 항변에 공을 받는 포수가 답했다.
"로마에 오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지. 여기선 이렇게 훈련해. 훈련은 실전같이. 실전은 훈련같이. 몰라?"
"어?"
포수의 말에 데니가 벙찐 사이, 포수는 받은 공을 동팔에게 던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억대 연봉 받는다고 너무 좋아하지 마. 여기선 그런 것 전혀 소용없으니까. 신고식이라 생각하라고.'
실력에 따른 대우를 받는 건 그도 인정한다. 하지만 훈련을 받을 때만큼은 모두가 동등한 조건에서 시작하고 마무리된다.
차이가 있다면 재활을 준비하는 지완의 경우와 같이 특별히 관리해야 할 대상에 한해서다.
훈련이든 실전이든 전력을 다 하는 동팔의 공을 치기란 쉽지 않다. 그나마 상대할 수 있는 타자라면 한동욱 급의 특급타자 정도.
비록 데니 행크스가 메이저리그에서 특급에 준하는 타자인 것은 맞지만, 그의 공을 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휭~.
'젠장.'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오히려 동팔의 공을 치면 그만큼 자신의 진가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 생각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배트를 휘둘렀지만, 동팔의 볼 끝은 지저분해도 너무 지저분했다.
바꿔 말해 치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결국 행크스는 타격 코치에게 요청했다.
"잠깐만요, 코치님. 이거 처음부터 난이도가 너무 높은 것 아닙니까?"
환타지 RPG 게임에서 스타트버튼을 눌렀더니 바로 최종보스인 마왕을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뺑뺑이까지 돌아 체력도 떨어졌는데…….'
서른을 향해 나아가는 나이라도 아직은 젊다. 고작 그 정도로 체력이 떨어진다면 야구선수를 할 수 없는 법.
그건 어디까지나 데니 행크스가 스스로에게 한 핑계에 불과했다.
"그래? 알았어."
결국 난이도 문제로 마운드에 내려온 동팔을 대신해 다른 투수가 올라왔다. 그는 양키즈 마운드에서 5선발 자리 경쟁을 벌이고 있는 투수였다.
그와 몇 번 상대해 봤고, 안타와 홈런도 기록했던 행크스는 절로 입맛이 다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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