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하지만… 그렇게 되면 민희에게 더 힘든 건 아닐까."
자신이 세상을 떠나게 된 것도 힘든데, 아기까지 키워야 한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자 지완이 말했다.
"부모님을 호강시킬 수 없다면, 차라리 일을 드리라는 말이 있어. 왜 그런지 알지?"
"그야… 멍하니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 일을 해서 성취감을 느끼고 자신이 있어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이 더 나으니까 그런 것 아냐?"
"그렇지. 그래서 나중에 잘 안 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민희한테 아기가 있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야."
지완은 얼마 전에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말했다.
"나만 해도 예은이가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지. 그때, 예은이가 울면서 날 찾지 않았다면 어떤 선택을 해도 이상할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이상하게 제일 무력한 존재가 지완을 살렸다. 어떤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다고 현실적인 어려움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물론 귀찮고, 힘들고, 짜증나고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이 있긴 해. 그래서 감사하고, 혜진이에게 미안할 때도 있지. 하지만…이상하게도 그게 날 살게 했다. 민희라고 예외라 생각하지는 않아."
"……."
다른 사람이 아닌, 경험자의 말이니 그냥 흘려들을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이 월드시리즈에 우승하지 못해 죽게 되었을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민희가 재혼하거나 새로운 출발을 할 때 족쇄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희가 살아갈 이유를 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네……."
그래서 그동안 임신하는 것에 주의하고 피임에 신경을 많이 썼다.
동팔이 그동안 고수했던 생각을 바꾸려하자 지완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리고 아기가 자라는 걸 보기 위해서라도 살기 위해 더 노력하겠지. 나도 그 녀석에게 속아서 죽기 직전까지 갔을 때, 제일 많은 미련이 그거였으니까."
지완의 말이 동팔의 선택을 바뀌게 했다.
# 미래를 위한 준비
메이저리그에서 대성공을 하였어도, 그 성과를 만끽할 시간은 없었다.
동팔과 동욱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2년.
그 안에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해야 하지만, 이들의 앞길을 막는 존재들이 있었다. 실력만으로 승부해도 쉽지 않은 목적.
그렇다고 포기하는 순간 자신들의 남은 수명은 2년으로 확정된다.
아직 희망이 있는 이상, 포기할 수 없었다.
동욱은 어머니의 건강을 살피고, 누나와 여동생과 언제 말씀드릴지 상의를 한 다음 미국으로 돌아왔다.
동욱이 오자마자 한 것은 지금보다 더 정확한 타격을 위한 훈련이었다.
그 역시 상당한 연봉을 받았기에 넓은 집과 개인 연습장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미 구단의 사람을 통해 집을 어떻게 리모델링할지 말했고, 돌아올 즈음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동욱은 지하에 있는 연습장에서 특별히 주문한 피칭머신을 만졌다.
"흠…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제어는 컴퓨터를 통해서 가능했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통해 원하는 구종을 원하는 횟수만큼 자동으로 쏘게 만들었다.
"어디보자… 경기에서 나오는 모든 구종이 가능하네. 그리고… 자이로볼까지 구현할 수 있다라……."
지금까지 자이로볼을 공식 경기에서 던진 선수는 강동팔 이외에 없다. 그리고 한국 프로리그 이후로, 메이저리그에서 자이로볼을 던진 경우는 없었다.
엄밀히 말해 동팔이 자이로볼을 던질 정도의 타자를 상대하지 않았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는 동욱을 상대로 자이로볼을 던진다 하더라도 반드시 스트라이크가 가능하다는 보장이 없다.
동팔이 처음 자이로볼을 던졌을 땐, 동욱이 새로운 구종에 적응하지 못하여 삼진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 동욱도 그걸 감안하고 상대할 것이 뻔하니 이전과 같은 성과를 또 얻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욱은 특별히 주문한 피칭머신에서 자이로볼을 최대한 잘 구현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구속은 최대 170키로까지… 뱅가너가 던진, 메이저리그 최고 구속이었지? 그리고 동팔이는 1년 사이 또 4키로인가? 그 정도를 더 올리고……."
투수인 동팔의 입장에서 시간을 느리게 느낄 수 있는 동욱을 상대하는 것이 난감하다. 하지만 반대로 동욱의 입장에서도 동팔을 상대하는 것이 난감했다.
'구속이 올라왔으니 다음 시즌에 또 올리고 마운드에 오를 가능성이 있겠지. 거기에 언제 또 새로운 구종을 익혔거나, 실전에 던질 정도로 숙련이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아.'
같은 폼에 어떤 공을 던질지 모르고, 거기에 강속구가 포함되어 있다.
아마 타자라면 이런 투수를 상대하는 것이 제일 싫다. 적어도 어느 정도 예측이라도 할 수 있다면 모를까, 예측할 수 있는 범위가 너무 넓으니 이젠 생각하는 것을 관두고 휘두르는 것이 낫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동욱이 미리 포기하는 건 아니다. 동팔을 상대하는 것을 포기하면, 다른 타자들은 말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지금은 협력하고 있지만, 다음 시즌엔 어떻게 될지 몰라. 동팔이처럼 훈련을 무한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돼.'
비록 이번 시즌은 협력하고 있지만, 그 다음 시즌에선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잘 하면 같은 팀에 있을 수 있고, 이대로 가거나 무언가 꼬이면 둘은 목숨을 건 라이벌이 된다.
그에 대한 준비는 필수. 하지만 지금 시작하는 훈련은 동팔에 대한 대비보다 다른 것에 대한 대비였다.
휭~ 따악!!
날아오는 공이 아무리 빨라도 남들보다 느리게 보이니 원하는 대로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욱은 남들이 하는, 잘 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휙~ 따악.
보통은 날아오는 공의 아래를 향해 쳐 역회전이 걸리게 만든다. 그러면 공은 높이 떠올라 장타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동욱은 공의 아랫부분만 노리지 않았다. 그 반대로 윗부분을 때려 단타를 노리고 있었다.
휙~ 따악.
이전에 항상 공의 아래를 치던 것이 습관되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훈련을 하면 할수록 윗부분을 치는 것에 능숙해졌다.
그러나 동욱은 자신이 친 결과에 만족할 수 없었다.
"안 돼. 이 정도로는 어립도 없어. 더 빠르게, 그리고 강해야해. 거기에 방향도 형편없어."
특히 방향에 있어 동욱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동욱이 친 안타의 방향은 아주 깔끔했다.
1,2루 사이나, 2,3루 사이를 완벽하게 빠져나가는 코스였다. 단타는 단순히 치는 것을 넘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타구를 보내야 살아남는다.
그러니 동욱이 방향을 신경쓰는 것도 당연한 문제. 하지만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그가 바라는 진짜 목적이 있다는 의미.
그러나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계속 훈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
피칭머신이 더 이상 공을 쏘지 않자, 동욱은 배트를 손에서 내려놨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짧게 훈련한 것 같았는데 세팅해 놓은 횟수 전부 소모했다. 사람인 이상, 훈련에 휴식은 필수.
마음은 급하지만, 그래도 동욱은 조급해하지 않으려 했다.
"그럼 15분 정도 쉬자. 처음이라 어색한 것도 있고, 동팔이처럼 무제한으로 훈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떻게 보면 이럴 땐 동팔의 능력이 부러웠다. 훈련을 함에 있어서 쉴 필요 없이, 수시로 회복하면서 실력을 쌓아 올릴 수 있는 것.
물론 회복력이 아무리 좋아도 본인이 노력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지만, 동팔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최고의 투수가 되기까지 다른 능력이 아닌 오직 자신의 노력만으로 올라왔다.
적어도 그 집념과 실행하는 노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재능도 함께.
동욱은 쉬면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동팔이가 어제 뉴욕에 도착했다고 했지? 지완이도 같이… 그럼 열심히 훈련하고 있겠지?'
그러나 동욱의 예상은 절반만 맞았다.
지금 동팔은 분명히 노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노력은 야구 훈련과 전혀 상관없는 노력이었다.
***
한국에서 뉴욕으로 돌아온 후, 오랜 시간으로 인해 지친 두 사람은 제일 먼저 샤워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자마자 지하 훈련장으로 내려가 훈련을 하지 않았다.
이른 시간, 민희는 동팔이 같이 씻자는 말에 부끄러우면서도 응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오, 오빠?"
서로의 몸이 깨끗해진 상태에서 동팔과 민희는 강하게 안았다. 서로의 뜨거운 체온이 느껴지는 상황.
결혼한지 1년이라면 충분히 신혼부부에 속한다.
이미 샤워를 마친 상황에 동팔이 이런 행동을 한다면, 그 다음은 뻔했다.
싫은 것은 아니지만, 평상시와 다른 동팔의 행동에 민희는 당혹스러웠다. 그렇다고 거부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오빠… 콘돔은?"
자신의 몸 상태는 항상 체크한다. 아기가 생기는 것에 대해 동팔이 거부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항상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민희는 가임기였다. 가임기때 성교를 한다고 전부 임신이 되는 건 아니다.
다만 두 사람이 건강한 몸이니 아기가 생길 가능성이 조금 더 높다는 것도 사실.
그러니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가임기거나 조금 위험하다 싶으면 항상 피임약을 먹거나 콘돔을 사용했다.
하지만 오늘은 평상시의 동팔과 달랐다.
"괜찮아, 필요 없어."
동팔을 그 말을 하고 자신의 입술로 민희의 입을 막았다. 그 이후로 말은 필요 없었다.
민희도 동팔이 한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으니까.
동팔의 말에 민희는 오히려 자신의 몸을 활짝 열었다. 동팔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듯이.
그 이후로도 동팔과 민희는 위험한 날이라도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아기가 생길 수 있는 위험한 날이었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아기가 생겼는지 안 생겼는지 지금 당장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적어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고통이 민희에게 오지 않았다.
"설마… 정말로?"
"일단 병원에 가 보자."
하지만 그 전에 하얀 늑대의 벗이 다가왔다.
"내가 먼저 살펴보겠다.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 병원보다 내가 더 정확할 것이다."
그의 말에 민희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아랫배를 그에게 맡겼다. 하얀 늑대의 벗은 자신의 손가락 끝에 기운을 담아 민희의 아랫배와 접촉했다.
"……."
집중을 하던 그는 손을 떼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축하한다. 또 다른 생명이 느껴진다. 열심히 노력한 성과가 있었다."
비록 뒤뜰에 친 텐트에 살고 있었지만 그의 밝은 귀가 두 사람의 행위를 포착했다.
물론 그동안 두 사람이 할 때마다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넘어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걸 몰랐던 동팔과 민희는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가, 감사합니다."
그들의 반응에 하얀 늑대의 벗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부부사이에 할 것을 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해도, 안 부끄러울 수 없었다. 그래도 일단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에 민망함은 잠시 밀어내고 기쁨이 자리 잡으려 했다.
"그럼 이제부터 조심해야겠어요."
"응, 조심해야 할 시간이니까."
정확히 몇 주가 됐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일주일도 되지 않았을 수 있다. 지금은 자각증상이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니고, 생리가 오지 않았다는 것이 전부.
그러자 하얀 늑대의 벗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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