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지금 동욱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출연료나 광고 모델비를 버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머니와 소중한 시간을 늘려가는 것.
그리고 동팔의 경우는 다음 시즌을 준비하고, 지완의 재활을 준비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그들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능력 개발에 시간을 썼다. 하지만 동팔만은 단 하나의 광고 계약을 맺고, 지금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
찰칵.
"네, 좋습니다. 거기에서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더."
찰칵.
"거기서 허리를 더 세워 주세요. 네, 좋습니다."
찰칵.
동팔은 사진사의 지시대로 몸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어색하던 포즈가 점점 사진사가 원하는 형태로 바뀌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팔의 어색한 표정은 바뀌지 않았지만.
1차 촬영이 끝나자 동팔은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민희가 와서 말했다.
"잠시 쉬고 다시 촬영할 거예요. 괜찮겠어요?"
"응. 이 정도야 뭐……."
이들이 찍는 광고는 TV에 나오는 광고가 아니라 신문이나 인터넷 배너에 나올 것이었다. 그러니 동영상 촬영이 아니라 사진촬영만으로 충분했다.
그동안 그들이 본 광고는 몇 장의 자신을 찍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촬영을 하니 그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찍어야 하나?"
"많이 찍은 것 중에 제일 잘 나온 것을 골라야 하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많이 찍을 줄은 몰랐어요."
생각보다 촬영을 하는데 필요한 준비가 꽤 많았다.
일상생활처럼 셀카를 찍는 수준이 아니었다. 조명을 준비하고 배경을 준비하며, 모델이 오면 입을 옷과 화장을 준비해야 했다.
동팔이 도착하자마자 간단한 인사와 함께, 화장을 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사진을 찍으면 피부가 좋게 나와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짙은 화장을 하게 되었다.
땀구멍이 하나하나 막히는 느낌에 절로 갑갑했다. 표정을 바꿀 때마다 얼굴에 바른 화장이 균열을 일으키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다행히 그 순간은 길지 않았다. 다만 동팔이나 민희가 생각한 것보다 오래 걸렸을 뿐이었다.
광고 촬영이 끝나자, 기다렸던 사람들이 동팔과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
"고생하셨어요."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그들은 바로 동팔과 민희가 만났던 그 회사의 동료들이었다.
그들은 동팔에게 광고를 제의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친분을 계기로 부탁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입장이 난처한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민희를 통해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때 동팔이 그들에게 말했다.
"요즘 회사 사정은 어떤가요? 지금 보니까 전반적으로 경제가 힘들던데요."
자신이야 잘 나가고 있으니 금전적으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더불어 동팔이 잘 벌고 있으니 가족들도 마찬가지.
그렇다고 일을 안 하는 건 아니라 종종 통화를 하다보면 힘들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크와 이야기를 하면, 부모님의 이야기를 안 들을 수가 없게 된다.
전반적인 경제 상황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빈민가의 사람들이니 불황은 더욱 매섭게 다가온다.
동팔의 말에 회사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푸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솔직히 월급쟁이 입장에선 당장 큰 걱정은 없죠. 있어봐야 이번에 월급이 동결되는 것? 아니면 갑자기 구조조정 여파로 잘리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겠지만."
"하지만 경영진 입장에선 머리가 아플 거다. 앞날을 알 수 없으니 뭘 할지 확실히 정할 수가 없으니까. 그러면서도 얻는 것은 많지 않지만 리스크는 항상 크니까."
"지금 당장 큰 영향은 없지만… 걱정이 안 될 순 없죠."
"결국 경쟁이 더 치열해진 이상, 사회 전반의 구조적인 변화가 있지 않고선 경쟁밖에 생존 방법이 없는 것이 현실이잖아요."
물건을 팔기 위해선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역으로 물건을 파는 사람은 구매자가 원하는 물건을 팔아야 한다.
거기에 추가되는 조건은 구매자가 지불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가격을 책정하여 팔아야 한다.
뛰어난 기술로 만든 최첨단 제품이라도 구매자가 그 기능을 원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공학도들이 흔히 하는 실수 중 하나가 [이것보다 더 좋은 제품을 만들면 더 잘 팔리겠지?] 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핸드폰에서 안테나가 튀어나오지 않는 기술이 만들어졌어도 상용화까지 가는데 10년이 걸렸다.
이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안테나가 튀어나오지 않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생긴 일이었다.
결국 구매자가 어떤 물건을 원하는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선 그들의 의도와 욕구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 인문학적 관점이 있어야 한다.
동시에 구매자가 원하는 물건을 그들이 수용할 만한 가격으로 어떻게 만들지 알게 해주는 이공계의 기술력도 있어야 한다.
물론 그것을 이룬다면 최소한 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물건이라도 구매자가 알지 못하면 구매할 수 없는 법.
그래서 홍보가 중요한 것이다.
"광고를 하고 싶어도 중견기업에서 할 수 있는 홍보수단은 한계가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경영진에서도 나름 열심히 짜내고 있는 것 같은데 특별한 방법이 없나봐요. 모델로 계약하고 싶은 사람도 경쟁률이 치열해져서 몸값이 더 올라가버렸고."
"그렇다고 인지도가 떨어지는 모델을 쓰면 투자한 만큼 성과가 나온다는 최소한의 보장도 없으니 주저되는 거지."
결국 경쟁이 치열해지면 질수록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극심하게 발생한다.
그 말을 하면서 회사 사람들은 처음부터 동팔이 모델로 나설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눈치를 주게 될까봐 민희한테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동팔에게 의외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래도? 그럼 혹시 제가 광고모델 해도 될까요?"
동팔의 말에 회사 사람들은 자신들이 제대로 들었나 싶어 되묻고 말았다.
"네?"
"뭐?"
대체 뭐가 아쉬워서 많은 돈을 줄 수 없는 자신들 회사의 광고모델이 되겠다고 하는 걸까? 물론 동팔이 광고모델이 되어 준다면 그동안 고민하던 문제 하나가 뻥 뚫리니 좋다. 그런데 과연 그걸 받아들여도 될지 의문이었다.
'특급 중의 특급 투수인 동팔 선수잖아?'
'그냥 예능 프로그램 하나 참여하는 것이 돈을 더 많이 받고, 재미있을 텐데?'
리얼 버라이어티라고 정말로 전부 다 리얼인 것은 아니다. 적어도 장소 섭외를 해야 하고, 최소한의 대본 정도는 존재한다.
그 대본과 갑자기 일어난 사건의 비율 중 후자의 비율이 높으면 리얼이라고 표현할 뿐이다.
정말로 대본 없이 촬영할 경우, 방송에 나갈 수 있는 분량이 확보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리얼이 아닌 예능이라도 게임 결과까지 손보지는 않는다. 다만 작가들은 시청자의 재미를 위해서 일반 출연자들에게 어떤 말을 할지 알려준다.
그러니 동팔이 출연하더라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이미 정해놓고 말을 해준다.
그 이외의 것은 예능에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연예인들과 감독, 스텝들이 할 일이다. 전문가인 그들은 비전문가인 일반인이 중요 인물로 들어오게 되면 그에 대한 보조를 확실하게 준비한다.
이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여 문제가 생기면, 전부 PD와 작가, 스텝 및 고정 출연자들의 책임이 되지 일반인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러니 동팔은 예능 프로그램에 가서 부담없이, 그리고 적당히 즐기다 오면 되는 일이었다. 덤으로 받아오는 출연료는 보너스였다.
물론 예능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부상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좌우지간 동팔이 본인의 입으로 모델이 되어 주겠다고 말하니 당황스러운 쪽은 오히려 회사 사람들이었다.
"잠깐, 지금 정말로 모델이 되어주겠다고? 왜?"
"그야 제가 회사에서 좋은 인연도 만났고,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 그렇죠."
동팔의 말에 그와 같이 일한 적이 있던 사람. 특히 김대리에게 동팔이 야단을 맞던 장면을 많이 본 사람들은 더욱 의아했다.
'민희를 만난 거야 그렇다 치겠지만…….'
'야단맞은게 어째서?'
사람들이 계속 의아할 때 동팔이 이어서 말했다.
"사실 제가 바로 프로에 입단한 것도 아니었고, 당시 김대리님께서 아마 1부 리그에서 우승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셨거든요. 그리고 몸이 회복되고 있을 때, 회사에서 진료비를 지원받기도 했고, 여러 가지로 배려를 해주셔서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었거든요."
동팔의 말에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었다.
"아~ 하긴 그랬었었죠?"
"그때 왜 그렇게 봐주나 싶었는데, 1년도 되지 않아서 프로에 입단한 것 보고 나서야 이해가 되었지."
그때 도와주고 배려해준 것이 지금 돌아오고 있었다. 그것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는 거물이 되었다.
다만 김대리, 정확히 말해 이제 대리가 아닌 그가 한 가지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아 주었다.
"아, 이제 대리가 아니라 과장이야. 얼마 전에 승진했어."
덤으로 그때 과장으로 있었던 사람은 차장으로 승진했다.
이렇게 해서 회사는 의외로 쉽게 동팔을 모델로 계약할 수 있었다.
***
한국에서 가족 및 지인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동팔, 동욱, 지완과 달리 헤럴드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구위가 위력적이지 않아도, 운이 좋아 시애틀의 1선발이 되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의 냉소와 시기, 질투를 받고 있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그의 저택같이 넓은 집이었지만, 간혹 청소를 하러 가정부가 온다. 그게 아니면 얼마 전에 해방된 데미안이 놀러왔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고 포스트시즌 전반적으로 뛰어난 타격을 보여준 이후, 더 좋은 조건으로 재계약을 맺었다.
그때 받은 돈으로 데미안 역시 넓은 집을 구했고, 굳이 헤럴드를 만나러 올 이유가 없었다.
저택의 넓은 거실에서 헤럴드가 하고 있는 것은 얼마 전에 새로 출시한 게임이었다.
데미안과 같이 하지 않고, 혼자 하니 100인치가 넘는 TV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가까이 있으면 한 눈에 들어오지 않기에 멀찍이 떨어져서 게임을 하고 있는 헤럴드.
하지만 게임을 하고 있는 헤럴드의 눈빛과 표정에는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
스테이지를 클리어 한 이후,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재미없어."
하던 게임을 멈추고 자리에 일어났다. 그가 간 곳은 전화기가 있는 곳이었다. 전화기에 저장된, 그 사이 온 전화 목록을 살펴 보았다.
그에게 오는 전화는 거의 없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꾸준히 오는 번호가 있었다. 바로 부모의 번호였다.
그러나 그걸 봤어도 헤럴드의 눈빛은 오히려 싸늘해졌다.
"X같은 새X."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진심이 담긴 욕이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눈앞에 없다고 한들 이렇게 싸늘하게 욕할 수 있을까?
하지만 어린 시절, 부모에게 학대를 받아온 헤럴드에겐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