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혹시라도 재기가 가능하면 엄청난 실력을 지닌 투수를 영입할 수 있다는 유혹. 그리고 투수 사정이 여유롭지 않거나, 시간과 재정을 투자할 여유가 있는 구단이라면 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많은 돈이 오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민희는 상관없었다. 지금 민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지완이 뉴욕 양키즈로 들어오는 것.
돈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래도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당연할 거예요. 캔자스시티는 물론 지완 선수도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공개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선수의 몸 상태를 공개해야 하는 것은 메디컬 테스트를 할 때. 그리고 계약을 할 때 자신들이 파악한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이외에 선수의 몸 상태를 항상 공개해야 할 의무가 없으니 궁금해도 법적으로 따질 수 없었다.
그러니 다른 구단에선 지완의 상태를 제일 먼저 파악하려고 했다. 어느 구단에 있어도 1선발 급의 인재를 잘 투자하면 다시 써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리고 설령 부상이 심하지 않더라도 다음 시즌을 대비해야 하니 분석은 필수였다.
하지만 민희는 모든 구단들에 비해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제가 그 선수와 잘 아는 사이거든요. 구단에서 말하지 않는 그의 몸 상태 또한 잘 알고 있죠."
"정말입니까?"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사라질 정보. 하지만 적어도 이적기간 동안에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정보였다.
유통기한이 있으니 그 정보를 가능한 빠르고 정확하게 얻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민희는 쉽게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네, 사실이에요. 하지만…지완 선수와 계약하지 않으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로서도 계약할 수 없습니다."
"그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의 몸 상태에 맞는, 최적의 조건을 맞춰나갈 수는 있겠죠. 안 그런가요?"
지완 정도의 특급 투수는 한두 푼으로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는 불안전하다.
일단 부상은 확정이고, 어떤 부상이냐에 따라 금액이 달라지거나 이적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이니 구단에서도 쉽게 움직일 수 없다. 그러니 정보에 목을 매는 것이지만, 민희는 오히려 이것을 이용하려 한다.
그리고 민희가 이용할 수 있는 조건 중, 강력한 것이 또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뉴욕 양키즈, 강동팔의 아내입니다. 설마 남편이 있는 팀에게 안 좋은 조건을 요구하겠어요?"
바로 신뢰의 문제다.
모든 계약은 서로의 조건이 맞아야 한다. 하지만 서로 제시한 조건이 맞더라도 이행할 능력과 의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건 지금 당장이 아닌, 미래의 이야기.
즉, 신뢰가 깔려 있어야 서로에게 불필요한 소모가 일어나는 것을 막아주게 된다.
어차피 동팔은 앞으로 2시즌을 뉴욕 양키즈에서 보내야 한다. 특급 이상의 투수인 그를 더 비싼 값에 팔지 않는 이상 그가 떠날 일은 없다.
거기에 부상도 없이 아주 건강하니 뉴욕 양키즈 입장에선 굳이 다른 곳에 팔 이유가 없었다.
또한 그를 보내고 그보다 뛰어난 투수를 구할 길도 없었다.
그리고 동팔의 목적, 민희의 목적, 구단의 다음 시즌 목적은 같았다.
"저도 제 남편이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는 것을 바라는 아내입니다. 그런 제가 가망이 없는 선수를 추천하는 것이 말이 될까요?"
"으음……."
이렇게 나오니 무조건 정보를 먼저 알려달라고 할 수 없었다. 확실히 계약을 하지 않는 이상, 알려주지 않겠다는 완곡한 거절의 표현.
"하지만 이건 마크 선수와 같이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여기에서 먼저 준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것도 구단만이 아니라 저와 같이… 그러면 더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전투는 치열한 격전. 그리고 단번에 끝나지 않는 장기전이 시작되었다.
***
한편, 동욱은 처음과 달리 짜증이 치솟고 있었다.
'대체 뭐야? 어떻게 알아차리는 거지?'
이번이 벌써 세 번째 타석이다. 헤럴드가 안타와 볼넷을 허용하고 있지 않음을 생각하면 사실 마지막 타석이었다.
'생각 자체를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어. 그럼 남은 것은 내가 몸의 어떤 부분에 힘을 주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 아니면 내 자세에서 어떤 방향으로 배트를 휘두르는 것이 제일 좋은지. 바꿔 말해 내가 제일 못 휘두를 방향으로 공을 던지는 것인데…….'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동욱이 다시 수정한 스트라이크 존을 생각해도 그가 못 치는 구역은 없었다. 그러니 더 이상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 안 돼. 그럼 정말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아내서? 아니면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버릇이라도 있나?'
동시에 헤럴드는 타석에 오른 동욱을 보며 기분이 나빴다.
'저 자식…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어? 오히려 분석하기 위해 집중하다니…….'
자신이 바라는 것은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 절망하는 모습이었다. 의외의 투구에 당황하고, 타격을 못하는 바람에 당황하고, 당혹스러워하며, 언젠가 닥칠 죽음의 미래에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동팔이 그랬지만, 동욱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지금 6대 0으로 뒤쳐진 상황에 상대 선발의 투구 숫자도 100을 넘지 않고 있어. 그리고 지금은 8회말. 사실상 내 기회는 이것으로 끝…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지. 지금은 몰라도, 다음 시즌에 더 쉽게 상대하기 위한 정보를 얻어야 해… 그렇다면…….'
처음에는 이기기 위해 달려들었다면, 지금은 그것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얻기 위해 생각을 바꿨다.
실험에서 중요한 것은 일정한 환경을 만들어 결과의 분석을 쉽게 하는 것.
그래서 동욱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노리는 구종은 직구. 그리고 그에 맞추어 몸의 자세도… 바꾼다.'
이제는 상대를 흔들기보다, 대놓고 직구를 노릴 생각이다. 그것도 이번 타석에 상대하는 투구 전부.
그러면 타자가 직구를 대비할 때 헤럴드의 패턴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터.
그리고 방금 전과 달리, 동욱이 두리뭉실한 준비가 아닌, 확고히 하나의 패턴을 노리고 준비하자 헤럴드는 잠시 고민되었다.
'대놓고 직구를 노린다고? 날 상대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했나?'
하지만 동욱의 눈빛은 포기한 힘없는 눈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빛나고 있었다. 이전과 다른 반응에 헤럴드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상대가 원하고 노리는 공을 알고 있는 이상, 직구는 안 던질 생각이었다.
'무조건 변화구. 어떻게 되던지 변화구!!'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상대하기 껄끄러운 타자를 단번에 잡을 기회.
당연히 대충 던질 생각은 없다. 상대는 데뷔하자마자 시즌 MVP를 이미 따 놓은, 5할 타율에 육박하는 강타자다.
그래서 헤럴드는 공을 던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배워 온 익숙한 구종인 커브로 던졌다. 모든 변화구가 그렇듯이 속도를 포기하고 타자를 속이는 것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것이 헤럴드의 패착이었다.
"……!!"
헤럴드의 손에서 공이 떠나자마자, 동욱의 기세가 바뀌었다. 단순히 탐구자의 분석적인 시야에서, 좋은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가 되었다.
그리고 헤럴드의 눈에선 직구를 노리던 동욱의 모습이 사라지고, 커브를 노리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헤럴드는 알았다.
'설마 이걸 노리고?'
상대가 어떤 공을 던질지 타자는 모른다. 그렇다면 동욱은 생각했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공을 던지게 만들면 그만이다.
이건 이전부터 동욱이 상대하기 어려운 투수를 만날 때 쓰는 방법이었다. 원하는 공이 오지 않으면 계속 배트로 커트하여 투구 숫자를 늘린다.
그리고 결국 인내심 싸움에서 지는 쪽은 타자보다 투수다. 투수는 던질 때마다 힘이 들지만, 타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수로 하여금 많은 공을 던지게 하는 압박으로 원하는 공을 던지게 만든다.
이번에는 형태가 조금 달라서 그렇지, 패턴 자체는 같았다. 어떻게 보면 더 쉬웠다.
처음은 직구를 노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상대하는 투수가 타자의 의도를 알게 되면 일단 직구를 던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동적으로 변화구 중 하나를 던지기 마련.
그리고 모든 변화구는 직구보다 느리다. 그나마 빠른 변화구 종류라면 슬라이더 정도가 있다. 아니면 직구로 분류되지만 변화의 끝이 좋은 투심 패스트볼도 있다.
슬라이더 보다 더 빠른 자이로볼도 있다. 하지만 자이로볼을 던질 수 있는 투수는 동팔이 전부.
그러니 신경써야 할 공은 슬라이더나 투심 패스트볼이 전부다. 그리고 그 이외의 공은 동욱이 상대할 때 느리다. 포크볼은 애초에 볼이니 칠 필요가 없고, 커브라면 적당히 떨어지고, 또한 적당히 느린 공.
그래서 동욱은 처음에 직구를 노리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여 직구를 봉쇄했다. 남은 것은 헤럴드가 어떤 공을 던지는지가 관건.
그리고 마침, 제일 만만한 커브를 던지자 그것을 알아차리고 빠르게 의도를 바꾸었다.
따악~!!
좀처럼 닿지 않던. 닿더라도 범타나 외야 플라이로 물러나게 했던 헤럴드의 투구가 쭉쭉 뻗어 나갔다.
이미 지금은 8회말. 거기에 이번 솔로 홈런으로 6대 1로 추격했다. 하지만 동욱은 안다.
'이번 경기는 졌어. 하지만 다음엔… 이긴다…….'
첫 경기는 패했지만, 수확이 있었다.
엄밀히 말해 헤럴드가 어떻게 타자의 의도를 알아차리는지 원리를 파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만큼 정확하다면, 그것을 이용해 상대하는 방법 중 하나를 알았다.
그리고 동욱은 아메리칸 챔피언십의 향방을 짐작했다.
'엄청난 난타전이 되겠어. 나뿐만 아니라 데미안이라는 타자도 꽤 하니까.'
동욱의 예상대로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은 치열한 난타전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헤럴드가 선발로 등판하는 두 경기를 넘겨주고 말았다.
결국 경기 전적 4대 3으로 시애틀 매리너스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 마무리
이번 시즌의 월드시리즈는 아메리칸 리그의 시애틀 매리너스. 내셔널리그의 뉴욕 메츠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한국 선수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하여 한국팬들은 아쉬워했지만, 그래도 월드시리즈라 자체적인 무게만으로 즐기는 건 충분했다.
하지만 월드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에 남의 집 잔치마냥 다른 선수들은 지켜보기 밖에 할 일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물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협상에, 전쟁터에서 자신이 속한 에이전트가 승전보를 울리길 바라며 다음 시즌을 준비한다.
물밑 전쟁에서 민희는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특히 그녀가 상대해야 하는 구단은 뉴욕 양키즈와 캔자스시티 로열스.
그마나 상대가 편한 쪽은 강동팔이라는 보증인이 있는 뉴욕 양키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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