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지금은 그렇습니다. 결국 이번 경기는 두 선수 중 누가 더 오래 버티는지. 그리고 그 이후에 올라온 불펜투수들이 타자를 상대로 얼마나 버티거나, 반대로 타자가 투수를 얼마나 잘 공략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메이저리그는 무승부가 거의 없으니 승부가 날 때까지 맞붙을 겁니다."
그러면서 중계진은 시청자들이 좋아할만한 화두를 계속 던지며 채널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
한편, 이번에 선발로 등판하는 동팔은 얼마 전에 민희와 통화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지완이 몸이 생각보다 안 좋다고? 무리하지 말아야 하는데 무리하고 있는 상황이라…….'
이런 상황이라면 사실을 알려주어 더 이상 무리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동팔은 알고 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실대로 말한다고 한들, 지완이 받아들일지 알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무시한다 생각하고 열이 올라 더 무리할 수 있었다.
말하지 않으면 현상유지나 사건이 터지는 것을 미룬다. 하지만 말을 하게 되면 오히려 파국을 앞당기게 만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 그리고 동팔도 본인이 겪었으니 지금 지완이 어떤 마음인지 짐작이 갔다.
'나도 부상으로 나가떨어지기 전까지 괜찮은 줄 착각했었지. 몸에 이상신호가 이미 오고 있는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혹사로 인해 부상을 당하기 전, 종종 무기력한 기분이 들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팔과 어깨, 등이 가끔 이유 없이 아프거나 경련이 일어날 때가 있다.
당시에는 특별히 관리를 받을 때도 아니었고, 그럴 형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르고 무리한 훈련을 하다가 결국 파국에 치달았다.
더군다나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 전력을 다 하고 있는 지완이다. 그의 강한 승부욕을 알고 있으니 오히려 사실을 말하는 것은 도발과 다름없는 행위였다.
그러니 동팔은 지완에게 다가올 파국을 예상했다.
'결국 혹사로 인한 부상은 필연이라는 거겠지. 언제 그 일이 일어날지는 시간문제일 뿐이고.'
이것은 단순한 예상이 아닌, 예언에 가까운 확신이었다.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미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동팔은 핸드폰으로 민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희야, 나야."
-네, 오빠. 지금 곧 도착할 것 같아요.
"그렇구나. 그런데 한 가지 말해줄게 있어. 지완이를 생각해서."
이미 지완에 대해 심각한 상황을 알고 있으니 동팔의 말에 민희의 마음도 같이 심각해졌다.
-말씀하세요. 어떻게 하실 건데요?
"간단해. 나중에 혹시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꼭 나를 찾아오라고 말해줘."
-네?
많은 것이 생략된 동팔의 말이지만, 그가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민희는 알고 있었다.
나중에 지완이 파국으로 치달아 부상당하게 되면 회복을 자신이 시켜주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문제는 지완이 당하게 될 부상이 보통 부상이 아니다.
이전에 동팔이 당했었던, 그로 하여금 절망으로 밀어 넣은 부상보다 더 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회복은 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것도 동팔은 무보수로 시간을 써야 하고,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마크를 회복시킬 때와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을 희생해야 하는 것이다. 동팔의 말에 민희는 정말로 놀라 자신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네? 정말로요?
"응. 일단 혜진이를 통해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알려달라고 해줘. 그리고 덤으로 혜진이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지완이라면 알 수 있는 말을 미리 전해야 할 거야."
-어떻게요? 그리고 어떤 말을?
"일단 지완이와 다시 만나긴 어렵고, 괜히 잘못 건드릴 수 있으니까 조심해야지. 그러니 혜진이를 통해서 말을 전해줘. 정확히 말하면 전할 말을 미리 맡겨두는 거겠지만."
민희의 어떻게란 의문은 그것으로 해결. 이제 남은 것은 어떤 말을 전하느냐였다.
"전할 말은 이거야. 내 주변에 있으면 부상이 빨리 회복되고 있다는 말."
-네? 하지만 그건 이미 언니한테 말했는데요.
"그래?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면 보통은 그냥 웃어넘기지 진담이라고 생각하지 않잖아."
-그때도 그랬긴 했지만…….
"그러니 이번에는 확실하게 전달을 해줘. 혜진이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 말이 지완이의 귀에 들어가면 확실히 이해할 테니까."
혜진과 달리 지완은 악마와 만나서 계약을 했다. 거기에 지완은 동팔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동팔이 한 말이 지완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떤 길이 열리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민희야, 너도 혜진이가 안 되는 건 바라지 않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오빠가 너무 힘들어지잖아요. 마크를 치료했을 때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그때랑 비교하면 지완 오빠의 경우는 훨씬 더 많은 시간과 고통이 따를 거라고요.
알고 있다.
오죽하면 자신이 부상당했던 부위가 다시 회복하는데 스크레이치가 일부러 의식을 잃게 만들었을까.
의식을 잃은 사이에 회복되지 않았다면 쇼크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팔은 그때와 다른 점을 파악했다.
"단번에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해. 그러면 나도 죽고, 지완이도 죽어. 하지만 천천히 시간을 들여 회복시켜 나가면 점진적으로 목표를 이룰 수 있어."
고통은 회복되는 양에 비례한다. 단시간에 많이 회복하려면 역시나 그에 상응하는 고통이 짧은 시간에 몰아친다.
하지만 회복을 천천히 하면 고통도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자신에 한정된 능력이라면 속도 조절을 최대한 늦추려 해도 사흘이 한계. 하지만 타인을 치료하는 건 느려지는데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마크를 통하여 확인했다.
-그럼 지완 오빠가 버틸 수 있을까요? 중간에 뛰쳐나가는 건 아닌가 걱정되기도 하고.
중간에 나가떨어지면 하지 않느니만 못하게 된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얻는 것은 없게 된다.
하지만 동팔은 확신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그 녀석의 승부욕은 진짜야. 힘들어 하겠지만 포기할 녀석은 아냐."
이것으로 혹시라도 모를 탈락의 걱정은 최소화되었다. 그리고 동팔의 부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민희가 할 수 있는, 그 다음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해. 할 수 있겠어?"
-네? 그런 것이 있었어요? 그게 뭔데요.
자신의 물음에 동팔의 대답을 듣자, 그녀의 두 눈동자는 크게 떠졌다.
"지완이를 영입해. 네가 운영하고 있는 에이전트 회사로."
***
동팔과 지완의 라이벌 매치로 많은 기대와 관심을 얻는 것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투수와 투수의 대결이었고, 둘 다 바늘 하나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상대 타선을 봉쇄했다.
이 상황에서 양팀이 바라는 것은 혹시라도 던질 실투. 아니면 갑작스러운 컨디션 난조로 상대 선수가 먼저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하지만 9회말이 끝날 때까지 동팔과 지완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야구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팽팽한 투수전에 재미를 느끼겠지만, 화끈한 타격을 주로 선호하는 팬이거나 입문자라면 지루해질 경기였다.
결국 9회말까지 승부가 나지 않자, 양팀은 자신의 에이스 투수를 보호하기 위해 마운드에서 내리고 불펜을 가동시켰다.
그래서 동팔과 지완의 대결은 결과적으로 무승부가 되었다. 하지만 무승부가 없는 메이저리그의 특성으로 인해 양팀은 혈전을 거듭하며 승리하기 위해 전력을 다 했다.
최종적으로 승리한 쪽은 타선의 집중력을 발휘한 뉴욕 양키즈.
동팔과 지완이 정규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지만, 둘 다 승리와 패전을 기록하지 못했다.
경기를 마치고 그 다음에도 역시 캔자스시티 구장에서 경기가 진행된다.
이미 뉴욕에서 원정을 온 이상, 두 번 연속 캔자스시티의 홈경기를 한다. 이어서 캔자스시티 로열스가 뉴욕으로 원정 경기를 치르는 일정이었다.
팽팽한 승부를 펼친 동팔은 동료들과 같이 예약한 호텔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홈경기를 치른 지완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 왔어."
평상시라면 혜진이 와서 반겨준다. 하지만 오늘은 혜진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같이 있었다.
"수고했어."
"수고하셨어요."
"수고했다."
아내인 혜진을 포함하여 전부터 와 있던 민희, 동팔과 덩달아 와 있는 인디언이 있었다.
"응? 지예 누나는?"
"언니는 기사 작성하고 데이트 하러 갔어."
"데이트? 야밤에?"
이미 그녀의 애인이 캔자스시티의 한 호텔에 묵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느 도시라도 밤에 위험한 것은 사실. 특히 총기를 휴대할 수 있는 미국에선 강도의 위험이 더 커진다.
그래도 데이트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밖이 위험하다면, 안에서 하면 그만.
"야밤에 할 수 있는 게 또 있으니까."
"아…, 그렇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일을 마친 이후엔 남들보다 뜨거운 밤을 보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동팔과 지완의 인터뷰를 미리 했으니 시간도 남아돌 테니까.
지완이 집에 들어오자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 있었다.
"예은이는?"
"자고 있어."
"그래……."
그 다음은 뻔했다. 항상 하듯이 조심스럽게 딸아이의 자는 얼굴을 보는 것. 그리고 그의 말과 행동에 하얀 늑대의 벗의 눈빛이 빛났다.
"……."
지완은 예은이 곤히 자는 것을 보며 아빠미소를 지은 후에 다시 방을 나왔다. 그러자 하얀 늑대의 벗이 말했다.
"좋은 눈빛, 좋은 표정이었다."
"네?"
"그러니 기분이다. 누워라. 많이 피곤할 테니 피로를 풀어주겠다."
만약 처음이라면 그의 말에 두려워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경험이 있으니 지완은 두려워하지 않고 답할 수 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경기가 끝난 이후에 관리를 받았지만, 그래도 쌓인 피로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다. 이전의 경험으로 하얀 늑대의 벗의 마사지에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을 느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는 전과 달리 긴장하지 않고, 긴 소파 위에 누운 지완. 그리고 옆에서 인디언이 그의 몸에 손을 가져가며 몸을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회복만 시키진 않았다.
"이기지 못해서 분한가?"
"처음에는 답답했고, 화도 났습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승부를 내지 못해서 찜찜하긴 하지만, 지금은 지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럼 됐다. 경기에 승패는 있어도 인생에 승패는 없다."
"그거 인디언의 격언인가요?"
"아니다. 내 경험이다."
이야기를 하면서 인디언은 다른 것을 물어봤다.
"방금 전에 행복했나?"
"방금 전이요? 아, 예은이를 볼 때요?"
"그렇다."
"네, 행복합니다. 더 행복하고 싶네요."
"그건 그대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지는 겁니까?"
"사랑해라. 그것이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방만하지 않으면서 즐길 수 있는 것은 즐겨라. 그동안 노력한 보상을 받고, 즐기는 것 또한 복이다."
"그것도 당신의 인생 경험인가요?"
"아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윤리적이고, 종교에서 볼 수 있는 경전의 내용이다."
"지루하고 진부한 이야기 아닌가요?"
흔히 진리라는 것을 들었을 때, 일반 사람들이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러자 인디언이 답했다.
"진리는 변하지 않으니까 진리다. 진리는 새로울 것이 없다. 항상 듣는 소리와 같다. 그러니 지루하고 진부하게 느껴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그럴 만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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