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하지만 지완은 동욱을 상대로 고의 볼넷을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남은 것은 승부를 보는 것뿐이다. 이것은 지완의 자존심이었고, 동시에 동욱도 잘 알고 있는 바였다.
휭~ 휭~.
타석에 선 동욱은 배트를 가볍게 휘둘러서 감각을 다시 끌어올린다. 이젠 이 모습만으로 마음이 약한 투수(그래도 메이저리그에 있는 투수들이라 남들보다 강심장이다.)는 정신이 아찔해지다가 마음을 가다듬는다.
동욱은 전혀 그럴 의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에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지완이 동요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번에는 전과 달리 새롭게 시도할 방법이 있었다.
'통할지, 안 통할지는 몰라. 기록으로 봐도 완벽하지 않아. 하지만…방법은 있어.'
그 생각을 하고 지완은 동욱이 볼 수 없게 글러브 안에 들어간 공을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되었을 때, 빠르게 팔을 휘둘러 공을 던졌다.
휙!
지완이 공을 던지자 동욱은 순간 의아했다.
'평소와 폼이 달라!!'
전에는 공을 쥔 손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던지는 지완의 팔은 뒤로 상당히 꺾여 있었다. 타자의 입장에서 사각을 만들었고, 공을 던지는 타이밍도 평소보다 더 빨랐다.
이전이라면 공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최대한 앞에 공을 던진다.
그래야 날아가는 공의 거리가 조금이라도 더 짧아지기 때문이다. 야구에서 신장이 큰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찰나의 순간이라도 우위를 점하기 위해선 키가 크고, 팔의 길이가 더 길어야 했다.
키가 클수록 공이 떨어지는 각도가 조금이라도 높아지면 타격 포인트는 선이 아닌 점으로 바뀐다.
그리고 거리가 조금이라도 짧으면 대기의 저항으로 속도가 덜 줄어들고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줄어든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지완이 던진 투구 방식은 이와 반대였다. 하지만 이런 투구폼은 동욱의 장점 하나를 봉쇄하게 만들었다.
'투심인가? 아니면 포심?'
야구공이 회전할 때 어느 부분이 회전하는 것은 중요하다. 같은 손모양으로 던져도 네 개의 심을 잡는지, 아니면 두 개의 심을 잡느냐에 따라 공의 궤적이 바뀐다.
공에서 적게 튀어나온 실밥이지만, 그 실밥이 대기에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자주 노출되며 회전하는지가 관건이다.
동욱의 능력이라면 찰나에 던지는 투수의 손동작과 공을 보면서 어느 구종인지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다양한 투수들과 많은 상대를 하며 쌓인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이제는 공을 쥔 손 모양을 보는 순간, 어떤 구종인지 바로 파악이 가능했고, 궤적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던지는 모습 중에 손에 쥔 모양을 보여주지 않거나, 이렇게 최소화시키면 아무리 동욱이라도 파악이 어려웠다.
그리고 또 다른 차이점이 있었다.
'평소보다 회전이 빠르다?'
한국의 투수를 상대할 때, 공의 회전을 볼 수 있었다. 간혹 그게 불가능한 투수도 있었지만 몇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공의 회전 방향 파악이 바로 되었다.
물론 일반사람의 경우, 너클볼처럼 무회전이 아닌 이상, 프로 투수가 던지는 공의 회전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기에 프로 타자라도 이는 마찬가지다. 이렇게 회전의 방향을 보는 동욱이 특별하고 이상한 일인 것.
던질 때, 쥔 손의 모양. 그리고 평소보다 더 빠른 공이 회전수. 다만 속도가 평소와 달리 느린 것이 단점이었다.
분명히 날아오는 것이 보이는 공이었지만, 동욱의 배트는 나오지 못했다.
휙~ 퍽!!
"스트~ 라이크!!"
지완의 공은 한 가운데에 박혔다. 공이 날아가는 것을 본 캔자스시티의 선수들과 코치, 감독은 물론 팬들도 분명히 맞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동욱이 배트가 나가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휴~ 초구는 그냥 봐 준건가?"
"같은 한국인이라서?"
"그럼 다음에 이렇게 오면 위험해. 분명히 얻어맞을 거라고."
겉으로 보기에 한 가운데로 향하는 느린 변화구였다. 느리다고 해도 140키로 후반대의 속도니 아주 느린 건 아니지만, 160의 공도 보고 칠 수 있는 동욱이게 느린 건 맞다.
하지만 분명히 느린공임에도 불구하고 동욱은 그 공을 치지 못했다. 조금 당황스러워 하는 동욱의 눈빛.
그래서 캔자스시티의 포수는 지완이 실투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동욱의 눈빛을 바로 앞에서 보자 그 생각을 버렸다.
'의외로 당황한다? 왜지?'
지금 지완의 공은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공이었다. 방금 전만해도 동욱이 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앞에서 본 동욱의 표정을 보자 생각을 바꿨다.
지금 동욱은 공을 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친 것이다.
그리고 동욱의 당혹스러워하는 눈빛을 본 지완은 확신했다.
'됐어. 혜진이의 분석은 완벽해.'
동시에 동욱은 당혹스러워하는 눈빛을 애써 지우며 생각했다.
'설마 간파당했나? 내 유일한 약점인 그것을?'
***
혜진은 그때 말했다.
"전에 네가 말한 거랑, 나중에 동팔이한테 물어봐서 확인해 봤어. 분명히 신경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서 160의 강속구도 눈으로 보고 칠 수 있다며? 그리고 손에 쥔 그립도 보며 궤도까지 파악이 가능하다고 했고."
혜진은 말을 하며 딸이 먹을 분유를 능숙하게 타고 있었다. 그리고 혜진의 말은 이어졌다.
"겉으로 보면 완벽한 타자야. 오히려 5할 타율이 낮게 느껴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할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건 이유가 있겠지. 그래서 파악한 결과, 범타가 잘 나오는 유형의 공이 있었어. 바로 공의 회전수가 높은 경우야."
공의 회전이 빠르면 공의 궤적도 더 많이 변화된다. 그러니 정교한 타격이 쉽지 않게 된다.
"정타가 나올 확률이 낮으니 맞으면 안타, 아니면 범타일 거야. 강속구로 공략이 어렵다면 속도를 포기하고 회전을 더 올리는데 집중. 하지만 그걸로 모자라. 상대하는 투수의 손 모양을 보고 바로 구종을 파악할 정도면 그 순간을 최소한으로 해야 할 거야."
그것이 혜진이 파악한 동욱의 약점이었다. 하지만 겨우 발견한 약점이라도 공략할 수 있는 수준이 달랐다.
한국 프로리그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고, 메이저리그에서도 손에 꼽히는 회전수가 되어야 비빌 구석이 있다.
거기에 상대할 때마다 구종의 정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선 투구폼도 바꾸어야 한다.
그 결과 지완은 다른 타자를 상대할 때와 달리, 동욱을 상대할 때 팔을 최대한 뒤로 비틀었다.
동시에 최대한 빨리 공을 던지기 위해 더 멀리 있을 때 던지며 생기는 속도 저하의 리스크를 감수했다.
이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속도를 포기하는 대신,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공을 던지는 것. 그리고 도박의 결과는 지완과 혜진의 승리였다.
자신만의 전법을 완성하고 나타난 지완을 보며 동욱은 생각했다.
'이거… 생각보다 대처하는 것이 늦을지도 모르겠는데…….'
동시에 동욱은 갈등했다.
'이번에 그 능력을 써야 할까? 하지만 반작용이 꽤 쌘대…….'
동욱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루상을 살펴본다. 지완의 압도적인 피칭에 의해 나와있는 주자는 없었다. 그리고 양팀의 스코어는 0대 0.
'아니, 쓰지 말자. 중요한 포인트도 아니고 그걸 썼다간 한 동안 내 능력이 보통으로 돌아오게 되니까.'
주자가 쌓여있고, 역전의 발판을 다질 때가 아니었다.
동욱은 양 갈래 선택지의 결과를 떠올리고, 각각의 손실을 비교했다. 그리고 그 중에 손실을 최소화 하는 길을 선택했다.
따악~.
이번에도 지완이 던지는 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도 동욱은 배트를 휘둘렀고, 이번 타격의 결과는 외야수의 글러브로 향하는 외야 플라이 아웃이었다.
예상한대로 동욱을 범타로 잡아 위기를 넘긴 지완은 속으로 크게 환호했다. 하지만 그 기쁨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익숙하지 않는 투구폼. 그리고 팔을 뒤로 꺾고, 그나마 구속을 높이기 위해서 몸에 과도한 힘을 줘야 했다.
그래서 지완이 팔과 등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승부에서 승리한 기쁨의 쾌락이라는 마약으로 인해 그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
스포츠는 선수들이 경기에서 보여주는 투혼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프로라는 것이 생기고, 리그가 생기면서 더 이상 선수들만으로 리그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선수들의 지원을 위해 코치와 감독이 존재한다. 그들은 선수들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부상을 미연에 방지하며, 선수의 역량을 최대한 뽑아내는 전술로 상대팀과 겨룬다.
이것은 모든 스포츠 리그의 기본적인 틀.
하지만 이러한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선 돈의 흐름을 무시할 수 없다. 당연히 선수들은 물론 이들을 지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급여를 관리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야구에서 구단 및 프런트라 불리는 조직이다.
그들은 엄밀히 말해 선수와 팬들의 사이에서 유기적인 움직임을 취한다. 팬들의 성원과 그로인해 얻게 되는 재화를 관리하며, 팬들이 만족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제일 첫 번째 임무이다.
하지만 구단주를 비롯한 소위 실세들 중에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경제를 우선으로 하는 물질주의인 곳에서 돈의 권한을 가졌다는 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 권력의 마약에 취한 사람은 자신들이 해야 할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구단을 자신의 마음대로, 또한 고집대로 운영한다.
당장은 괜찮아 보여도,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결국 그 팀은 사상누각이 되어 무너지기 마련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프로 리그는 팬들의 성원을 바탕으로 하는 산업. 그 기반을 사라지게 만들면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은 무너지기 마련이니까.
그걸 아는 구단주들은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지금 당장 뛰어난 선수를 확충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바로 팬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하고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 중에 팀의 승리와 뛰어난 업적을 만드는 것은 필수. 거기에 추가적으로 소소한 이벤트를 기획한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들만으로 할 수 없다면 다른 구단과 협상을 하기 마련.
지금 만나고 있는 뉴욕 양키즈 구단주와 캔자스시티 로열스 구단주가 그러했다.
"전에 연락을 한 대로 이번에 이벤트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지만 한국시장을 생각하는 소소한 이벤트를 진행하려고 하는데 그쪽 생각은 어떻습니까?"
거대한 사업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만나, 가볍게 헤어지는 자리였다. 그러니 간소하게 점심을 먹으며 이미 이야기한대로 진행을 하고 있었다.
뉴욕 양키즈 구단주의 말에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구단주가 답했다.
"나쁘지 않은 이벤트라 생각합니다. 더비는 많을수록 흥행에 유리하니까요."
이들은 하나의 더비를 즉흥적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더비는 바로 코리안더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