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계약자들은 서로 경쟁을 하고 있지만, 같은 팀이 되면 목표가 같으니 훌륭한 동지가 된다. 그것도 생사를 거는 싸움에서 함께 하는 전우는 더욱 각별한 관계가 되는 법.
그리고 협력함으로써 경쟁자를 물리쳐 나가면 생존율은 더욱 올라간다. 바로 지금처럼.
제리스는 타석에 선 동팔을 신경쓰지 않는다. 그가 신경쓰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운드에 올라 선 동팔이었다.
'대체 무슨 능력이지? 정말로 이전에 생각했던 대로 근육 강화인가?'
자신의 예상에 저스틴도 같이 생각했다는 것을 알았다.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와 비슷한 능력이라 감안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를 보면 이들이 추측은 아주 틀린 건 아니다.
다만 지금의 힘을 얻기 위해서 동팔이 해온 노력은 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누가 힘줄과 근육이 끊어지고 파열될 정도로 훈련을 하리라 생각할 수 있을까. 그리고 동팔이 얻은 것은 단순히 근력의 강화가 아니었다.
훈련을 하면서 쌓인 경험은 그의 시야를 더 넓게 만들어 준다.
'내가 예상하는 제리스의 능력은 바람을 읽는 것. 정확하게 말하면 바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겠지. 아마도 안개처럼.'
너클볼의 특성은 대기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 바꿔 말해 대기의 흐름을 알 수 있다면 너클볼의 컨트롤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보통 투수가 바람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 보는 것은 주변에 펄럭이는 깃발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 부분의 바람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지 마운드와 타석 사이에 부는 바람은 알 수 없다.
그런데 그 바람을, 대기의 흐름을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래서 동팔은 바람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인 얼굴에 일부러 침을 조금 발랐다.
그의 행동에 중계진은 물론 직접 보고 있는 관중들과 선수들도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전에 홈런을 맞은 충격인가요? 잘 빠져 나왔다 생각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설마 한국에선 잘 치기 위해 저런 행동을 하나요? 징크스의 일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한국 선수 중에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어요. 아마 동팔 선수만의 징크스가 아닐까요?"
그들이 예상하는 범주는 거기가 한계. 그리고 마운드에 서 있는 제리스도 그리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동팔의 준비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얼굴에 물을 묻히면 좋지만, 그럴 수 없어서 침으로 대신했다.
이것으로 바로 앞에서 부는 바람의 감지가 수월해졌다. 이 다음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라운드에서 일어나는 흙먼지.
다행히 건조한 나머지 바람이 조금만 강하게 불면 먼지가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거기에 조명도 밝아 파악에 이상은 없었다.
'공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봐야 하는 건 힘들어. 일단 마운드에 집중하고, 제리스가 주변을 돌아보면 나도 같이 보는 수밖에 없어.'
이것도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동팔로선 자신이 할 수 있는 준비는 이것이 전부.
그나마 다행이라면 동팔도 너클볼을 던질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람의 방향만 알면, 너클볼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공이 오는 사이,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동팔의 역량에 달렸다.
그래도 사실상 감에 의존해 배트를 휘둘러야 한다는 점은 바뀌지 않겠지만, 그 감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 좋다는 건 사실.
그런 생각으로 타석에 선 동팔은 일단 평범하게 제리스의 얼굴과 손을 살폈다. 언제 공이 올지 알아야 타격을 할 수 있으니 당연한 행동.
투수인 동팔이 타격에 얼마나 훈련을 할 수 있을지 뻔했으니, 제리스는 솔직히 따분했다.
'치면 넘어간다고 하지만, 그것도 쳤을 때의 이야기지.'
규정 타석을 채우는 것이 불가능한 동팔이 타격 훈련을 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메이저리그에서 타격을 하기보다 볼넷을 고르는 쪽이 더 유리.
하지만 투수에게 볼넷을 허용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상대의 선구안이 자신의 투구보다 뛰어났다는 증거가 되므로.
그리고 그 전에 어느 타자를 상대하던지 볼넷을 주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제리스가 노리는 것은 최소 범타. 이왕이면 배트가 헛돌아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것이다.
"후……."
그래서 제리스는 처음부터 너클볼을 던질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휭~퍽!
한 가운데로 가는 것 같아 타자의 배트를 유도하는 공. 하지만 홈 플레이트 바로 앞에서 떨어지는 포크볼이었다.
속도도 느려 치기 좋은 공이 오면 어설픈 타자는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배트가 나간다. 하지만 동팔의 배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포수의 블로킹으로 공이 빠져나가는 것은 막았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공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주심의 공을 교체했다.
첫 공은 볼. 생각보다 참을성이 있다는 사실에 제리스는 조금 귀찮았다.
'이번에는… 빠르게 가 볼까?'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 구속은 잘 해야 시속 140 킬로 대 중반이다. 하지만 이것도 메이저리그에서 느릴 뿐이지 충분히 빠른 공이었다.
전문적인 타자가 아니라면 확실히 통하는 공. 그리고 코스가 스트라이크 존을 걸치니 동팔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휭~ 따악.
동팔이 배트를 휘둘렀지만, 공의 아래쪽에 맞고 뒤로 넘어갔다. 볼 카운트는 1스트라이크 1볼.
'생각보다 꽤 하잖아. 못 맞출 줄 알았는데.'
그리고 또 한 가지 알았다.
'아래쪽을 노리는 건가? 장타는 포기하고 단타로 나갈 생각?'
보통 타자들은 높게 오는 공을 좋아한다. 그것이 장타로 이어질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수들은 웬만하면 아래쪽으로 공을 던진다.
하지만 그러기만 하면 타자의 배트가 나오지 않아 유인구를 던질 때, 일부로 높은 공을 던질 때가 있다.
동팔이 노리는 공을 알게 된 이상, 그에 맞추어 공을 던지면 된다.
'아래쪽으로 가다가 위로 가는 건 불가능. 그럼 그렇게 보이던가, 아니면 위로 가는 공을 던져서 스트라이크를 노릴까?'
그래서 이번에 던지는 공은 조금 위험할 수 있는 위쪽으로 갔다.
휭~ 퍽.
"스트~ 라이크!!"
그러자 동팔이 배트는 움직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볼카운트는 동팔에게 극도로 불리하게 흘러갔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동팔이 쉽게 공략되는 것 같자 양키즈 팬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걸로 이번 이닝은 끝?"
"다음 이닝에 중심 타선 시작하니까 희망은 있겠지."
"그래도 제리스의 공을 얼마나 칠 수 있겠어?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불가능하잖아."
하지만 이후의 상황은 그들의 예상대로 동팔의 아웃이 아니었다.
따악~. 따악~.
마치 약을 올리듯이 동팔은 제리스의 느린 공을 쳐서 파울로 만들어 나갔다. 이미 스트라이크는 가득 차 있으니 더 이상 올라갈 일은 없었다.
그리고 스트라이크 존을 지나가는 공을 어떻게든 맞추는 동팔로 인해 제니스는 다른 방향으로 공을 던졌다. 그러면 동팔은 공을 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조금 아슬아슬한 공도 있었지만, 다행히 전부 볼.
덕분에 지금은 풀카운트까지 왔다.
"오오!!"
"의외인데!!"
동팔의 선전으로 제리스의 투구 숫자가 늘어나자 양키즈 팬들은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은 동팔이 안타나 볼넷으로 출루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제리스는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지금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전부 보였다. 안개가 몰려다니는 것처럼 무색의 대기가 그의 눈에 선명히 보였다.
이전부터 노력하고 또 노력하였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공을 던졌다. 그리고 결국 바람의 방향만 알면 너클볼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 확실히 감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감은 그동안 자신을 배신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끝내자. 지긋지긋한 놈…….'
출루는 절대 허용할 수 없다. 야구는 심리적인 스포츠이면서 동시에 흐름을 탄다. 투수인 그가 출루하면 갑자기 기가 살은 타선에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이번에 던지는 것은 자신의 주무기인 너클볼. 자신만 아는 궤적으로 날아가는 자신의 특제 너클볼이었다.
스윽~ 휙!
바람이 오는 타이밍을 보고, 공을 던졌다.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방향이 꺾이면 아무리 뛰어난 타자라도 배트가 헛돌거나, 멍하니 있다가 당한다.
하지만 제리스가 주변을 돌아볼 때, 동팔도 역시 주변을 돌아봤다.
제리스처럼 눈으로 바람을 보는 능력은 없다. 하지만 바람이 불면 생기는 다른 것을 보았다.
흙먼지는 바로 생기지 않았고, 미미하다. 그러나 잔디는 아니다. 바람이 불면 바로 반응한다. 이미 바람의 세기에 따라 잔디가 얼마나 움직이는지 파악은 끝났다.
얼굴에 침을 살짝 바르며 파악한 것 중에 하나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제리스가 보는 방향 아래에 잔디를 빠르게 살펴 본 동팔.
급격한 잔디의 움직임은 아직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제리스가 공을 던질 타이밍을 생각하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기회!!'
정확하지 않아도 바람의 방향을 아는 이상, 제리스가 던지는 너클볼이 어느 방향으로 휠지 대략 파악이 가능했다.
그리고 동팔은 예상되는 궤적을 향해 배트를 휘둘렀다. 부디 자신이 예상한 그 방향으로 공이 오길 바라면서.
***
결론적으로 말하면 운이 좋았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동팔도 애초에 실력으로 제리스의 공을 칠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없었다.
풀카운트까지 가는 접전도 마찬가지. 비록 투수라 공의 궤적을 예상하는 것이 더 빠를 수 있어도 원하는 포인트에 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예상이 틀리거나, 배트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그대로 삼진 아웃 확정. 하지만 그런 불리함을 뚫고 어떻게든 풀카운트 승부까지 끌고 갔다.
그러면서 동팔은 또 하나를 준비했다.
'높은 공을 유도한다. 낮은 공을 노리는 것처럼 보여야 해.'
그래서 일부러 낮은 공이 오면 더 적극적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치는 경우도 운이 좋았지만, 볼이 높은 공으로 가는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그리고 승부의 종착지가 되는, 제리스가 제대로 너클볼을 던지려는 때. 동팔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바람의 흐름을 파악하고 흘러가는 방향을 예측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두 가지. 동팔의 예상한 대로 공이 갈 것인지. 그리고 예상한 그 지점으로 동팔의 배트가 제대로 갈 것인지.
이 두 가지가 갖추어지면 장타를 노릴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공은 동팔이 배트를 잘 휘두르지 않는 높은 쪽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려는 너클볼. 휘두르지 않으면 그대로 삼진 아웃. 못 맞추고 배트가 지나가도 마찬가지.
그런데 동팔이 장타를 치는데 필요한 두 가지 요건은 아쉽게도 충족되지 않았다. 하지만 앞서 말했지만 그동안 작용한 행운의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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