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설마 나랑 같은 계약자였나?'
그렇다면 대체 무슨 능력으로 던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존재가 있지만, 이 자리에 없었다.
'웜우드가 없으니 확인할 수도 없고…….'
미심쩍은 악마지만, 적어도 상대의 능력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만큼 확실한 존재는 없다. 하얀늑대의 벗에게 물어봤지만, 그도 동팔의 심장에 싸여 있는 계약의 서를 보지 못한다고 했다.
혹시 천사를 볼 수 있는 목사에게 물어봤지만, 그 전에 웜우드가 답했다.
'천사들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계약의 서라는 것과 어떤 악마와 계약을 했는지가 전부야. 어떤 내용으로 계약했는지는 악마들만 볼 수 있게 암호처리가 되어 있거든.'
그러니 상대의 능력을 파악하는 것은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제일 중요한 일은 타석에서 안타나 홈런을 치는 것이 아니다.
"오늘도 부탁해."
"타석은 우리가 책임질 테니까."
지금 동팔이 해야 하는 것은 상대의 타선을 묶는 것. 그것도 단 한점의 허용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에서보다 더 뛰어난 선수들을 상대하는 바람에 그때 보다 버거운 것은 맞다. 이전에 무실점은 기본에 타격을 허용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 와서는 매 경기마다 피안타를 평균적으로 4개를 맞고 있었다. 그것도 9이닝에, 장타가 거의 없어서 실점으로 연결되지 않았을 뿐.
그래도 이 정도의 기록이 대단함은 바뀌지 않는다. 이미 동팔은 사실상 동료들에게도 1선발 급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동료들의 말에 동팔이 답했다.
"믿고 맡겨. 나도 너희들을 믿고 맡길 테니까."
그러면서 선수들은 주먹을 쥐고 결의를 다지듯 가볍게 부딪혔다. 영어로 말문이 트이니 양키즈에 오는 순간 다른 선수들과 친해지기 시작해 지금은 두루두루 다 친해진 상태였다.
지금은 메츠가 홈경기라 제리스 리드가 먼저 마운드에 올라왔다.
동팔은 그가 마운드에 올라오자 집중해서 관찰했다.
'확신할 수 없어. 하지만… 무언가 있어.'
알아야 했다. 악마와 계약을 했는지, 안 했는지. 그리고 했다면 어떤 능력을 받았는지.
***
동팔이 제리스를 보며 경계하듯이 제리스와 저스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도 동팔이 공을 던지는 장면을 돌려보며 어떤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떤 능력인지 아직도 감을 잡지 못했다.
그래도 동팔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이미 그가 계약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능력이 있는데, 뭐지? 악력? 힘? 아니야, 그 정도로 이런 위력을 낼 수 없어. 갑자기 회복하는 것도 그렇고…….'
그들은 몸의 회복을 우선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부상을 당한 경우, 이미 계약을 하는 그 순간부터 몸이 완전히 회복하는 경우가 꽤 많았으니까.
'스펙 자체로 보면 나보다 뛰어나. 강속구의 속도도 속도지만, 다양한 구종을 던지고, 그 모든 구종의 제어도 완벽해.'
제리스 자신도 내셔널리그에 속해서 타자로 나서지만, 솔직히 말해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아무리 스펙이 뛰어나도 언젠가 크게 얻어맞는 날이 종종 오기 마련.
'이미 이전부터 분석을 당하고 있겠지만, 더 날이 선 분석을 당하고 있을 타이밍이야. 구단에서도 나름 분석을 열심히 하고 있겠지. 그런데도 아직까지 특별한 약점은 없어. 그럼 남은 것은 체력의 부담으로 페이스가 떨어지는 것이 있는데…… 문제는 한국 리그에서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거였지?'
사람이 항상 상태가 좋은 건 아니다. 그리고 선수들도 마찬가지. 당연히 페이스가 떨어지는 슬럼프를 거치기 마련이다.
이것은 능력을 받은 계약자라도 마찬가지. 능력이 있어도,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능력을 발현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계약자들은 기본적으로 항상 체력훈련과 자신의 상태를 수시로 체크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일단 제리스가 생각하는 동팔의 능력에 대한 추측은 이것이었다.
"근육강화인가? 하긴 그거라면 체력도 강해지니까."
팔과 등의 근육이 회복되면서 모든 근육이 강해진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 근육에는 손가락 근육도 예외는 아니었다.
"타자도 아니면서 근육의 강화라… 특이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쓰기 나름인가? 이 정도까지 올라올 정도면……."
확실히 동팔의 스펙은 뛰어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리스가 주눅이 들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번 시즌을 끝으로 같은 동료가 된 저스틴은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리 동팔의 스펙이 높아도 제리스의 능력에 비하면 약해. 제리스는… 자신의 공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어. 설령 너클볼이라도.'
빠른 강속구도, 뛰어난 제구력을 바탕으로 하는 변화구도 타자에게 있어 상대하기 어려운 공이다. 하지만 상대하지 못할 공도 아니다.
빠른 강속구라도 읽혀버리면 홈런이 되고, 변화구 또한 마찬가지.
그러니 타자의 입장에서 제일 골치 아픈 것은 예상할 수 없는 변화구다. 그것도 빠른 변화구.
비록 빠른 구종은 아니지만, 예상할 수 없는 구종이 있다. 바로 너클볼이다.
대기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던지는 투수마저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다는 너클볼. 그런데 이 너클볼을 투수가 컨트롤할 수 있다면?
그럼 그 공을 통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바로 운(運)이었다.
눈감고 휘두르듯 우연히 공에 맞아서 넘어가지 않는 이상 장타가 나올 수 없다. 그러니 오히려 뛰어난 감각을 지닌 강타자들일수록 제리스를 상대하기 버겁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기록으로 증명이 되었다.
"스트롸잌~ 아웃!!"
증명에 따라 1이닝은 제리스가 양키즈의 1,2,3번 타자를 가볍게 잡아서 끝냈다.
한편, 한 이닝을 마치고 공수 교대하는 상황에서 관중석에 있던 마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이상한데요."
"뭐가?"
"그게… 원래 투수가 아니라 잘 모르지만, 보통 투수가 공을 던지면 타자랑 포수가 있는 곳을 보잖아요."
"그렇지."
확실히 보통은 그렇다. 그런데 마크는 제리스의 특별한 행동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제리스는 그렇지 않았어요. 이상하게도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주변을 살펴보던데요. 특히 너클볼을 던질 때."
주변을 많이 살핀다고 공을 더 잘 던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제리스는 중요한 순간에 주변을 돌아봤다.
"정말?"
"네. 저도 처음에 잘못 봤나 생각했는데, 계속 그러니까 좀 그러네요."
"그냥 습관이 아닐까? 아니, 습관이라면 항상 그렇게 해야 하는데… 긴장이 되면 그렇게 하는 건 아닐까?"
이미 민희와 약속을 하고 같이 온 민철과 지예. 지예는 일로서 왔지만 동시에 노는 것도 겸하고 있었다.
지예의 말에 민철이 답했다.
"그럴 수도 있는데, 웬만하면 그런 건 안 하는게 좋아. 읽혀버리거든. 전에 동팔이처럼."
민철의 말에 민희와 지예는 이전의 사건을 떠올랐다.
빠른 강속구를 던질 때마다 심호흡 하는 습관으로 인해 한동안 피안타를 많이 허용했었던 그 때를.
"아무리 너클볼이라도 저런 습관을 가지고 던지면 훤히 보이지. 그래도 못 치는 걸 보면 대단하긴 대단하다."
메이저리그의 투수라고 하지만, 동시에 상대하는 타자들도 메이저리거다. 자신들이 간파한 것을 그들이 간파하지 못할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다른 구단은 물론 메츠에서도 제리스의 습관은 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아도 치지 못하게 되면 사소한 습관은 중요도에서 밀려나기 마련이다.
이것이 생각보다 아주 중요한 단서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
저스틴과 같이 동팔도 1이닝은 생각보다 가볍게 넘어갔다. 상대의 중심타선이 시작되지만, 단 한 명의 출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투구.
공수 교대를 한 다음, 동팔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제리스의 투구 모습을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그리고 그는 마크가 발견한 것과 같은 모습을 발견했다.
'너클볼이나 중요한 순간에는 항상 주변을 보고 던져. 왜 그렇게 하는 거지?'
사소한 습관이라도 자신의 생각이 들켜버리면 고쳐야 한다. 이미 동팔도 직접 당했으니 모를 수 없는 일이다.
거기에 이러한 습관은 다른 사람들도 다 아는 것이다.
이미 분석되어 자신에게 온 자료에 나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습관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지 않은 건 단순했다.
알아도 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제리스의 사소한 습관을 잠시 주목하다가 말았다. 하지만 동팔은 그렇지 않았다.
'분명히 뭔가 있어. 그것도 능력과 관련된 건데…….'
무언가 잡힐 것 같으면서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아쉽게 양키즈의 이번 공격도 제리스의 교묘한 너클볼과 급격히 떨어지는 변화구로 인해 범타로만 끝났다.
삼진은 많지 않지만 지극히 효율적으로 이닝을 소화하는 제리스의 투구로 인해, 동팔은 평소보다 빨리 마운드에 올라가야 했다.
당연히 생각할 시간은 부족했다. 그리고 부족한 시간만큼 경계해야 할 사람이 또 하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메츠의 4번 타자 저스틴. 지난 시즌에 좋지 않아서 생각보다 헐값에 메츠로 온 선수였지? 그럼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을지도…….'
이미 그의 모든 기록을 본 동팔이었지만, 그래도 제일 신경써야 할 기록이라면 최근의 기록이다.
작년 저스틴의 기록은 한 때 리그 탑 클래스 타자의 이름에 맞지 않게 저조한 타율과 타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전에 있던 팀에서 새로운 강타자를 영입했고, 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저스틴을 메츠에 넘겼다.
하지만 다시 이번 시즌에 전성기를 향해가는 모습을 보여주자 메츠의 프런트는 팬들에게 인정과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러니 동팔도 저스틴을 조심하지만, 그렇다고 동욱과 같은 계약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계약자라면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월드시리즈 우승을 빨리 하길 원한다.
그걸 생각하면 한 시즌을 버리고 다른 팀에 가리란 건 생각하기 어려웠다.
동팔은 저스틴을 계약자라 생각하지 않고 평범한 강타자로 생각했다. 당연히 제리스를 볼 때처럼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알아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특별히 약점이 있는 부분이 있는 건 아니야. 모든 방향에 3할의 타율을 보여주고 있어.'
물론 한 가운데로 날아오는 공은 3할 이상의 타율을 가지고 있다. 바깥쪽 아래가 상대적으로 타율이 떨어지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었다.
특별한 약점이 없는, 그리고 처음 상대하는 타자인 이상 동팔이 하는 선택은 하나.
'강속구로 승부. 그 이전에 다른 구종으로 혼란을 주면 그만.'
순수하게 강속구로만 승부하면 자신이 반드시 진다. 메이저리그에서 강속구를 받아 쳐서 넘길 타자는 널리고 널렸다.
그러니 결정구를 던질 때, 최대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준비 작업은 필수.
처음에는 아래로 향하는 빠른 공, 그리고 이어서 던진 공은 타이밍을 뺏는 체인지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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