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당연히 상대해야 할 타자에 대한 약점 분석. 또는 구단 내에 있는 담당관이 분석한 자료를 봐야 했다.
구위를 높이는데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 투수인 이상, 시간 사용의 배분은 필수.
그러니 분석하는데 시간을 쓰기보다, 분석한 것을 받아 보고 외우는 것이 훨씬 효율적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자료는 대외비도 아니라 지완이 종종 집으로 가져올 때가 있었다. 덤으로 혜진은 예은이가 자고 있거나, 안아서 다독일 때에 볼 것이 없어 심심풀이로 봤었다.
처음에는 아주 단순한 일상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혜진의 말은 단순한 말로 끝날 수 없었다.
"다음에 상대해야 할 4번 타자 보니까 약점이 통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잖아."
"그렇지."
상대하는 타자에 대한 약점의 인식과 암기는 필수. 혜진의 말에 예은이에게 젖병을 물게 하고 있는 지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스가 일정한 것도 아니고, 불규칙적이라서 짐작하기 어려웠지?"
"응."
"그런데 내가 보니까 일정한 패턴이 있던데."
"뭐?"
지금까지 혜진이 말한대로, 주의해야 할 상대 타자의 약점은 약점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분명히 몸쪽 아래에 약한 모습을 많이 보이지만, 그쪽으로 날아오는 투구를 받아서 올려 쳐 홈런을 만든 경우도 꽤 있었다.
그러니 약점을 공략하다가, 오히려 투수가 공략당하는 케이스였다. 그런데 혜진은 그동안 누구도 알지 못했던 그 선수의 약점 패턴을 파악했다고 말했다.
"정말? 어떤 패턴인데?"
"그냥 컨디션 문제야. 야구는 심리적인 스포츠잖아. 기분이 안 좋거나, 예민하면 누구나 페이스가 떨어져. 그때 약점이 드러나지만, 다시 회복하면 그 약점은 오히려 사라지는 경우 같아. 하지만 그걸 알아내는 것이 관건인데, 의외로 간단하던데."
"진짜로? 어떻게 알아낼 수 있어?"
"간단해. 초구 반응을 보면 돼. 생각보다 반응이 정직한지 초구 빠른 직구에 배트가 나와. 그때는 몸 상태가 좋아서 페이스가 올라간 상태. 반면 심리적으로 위축되면 초구 빠른 공에 배트가 안 나와. 그러면 항상, 몸 쪽 아래로 오는 공에 당했었고."
"……."
지완은 혜진의 분석력에 말을 잃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가 괜히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에 입사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그녀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아, 예은이 젖!!"
"아, 미안."
너무 큰 충격에 넋을 잃었는지 예은이의 입에서 젖병이 떨어졌다. 그리고 방금 타서 따듯한 분유는 일부 흘러내려 예은이의 볼과 목, 옷 위로 떨어졌다.
"아, 휴지, 휴지!!"
"잠깐만."
다른 것보다 예은이가 울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서두르는 두 사람. 그리고 정돈하여 다시 아침을 먹었다.
"그냥 내가 봐서 떠오르는 대로 말한 거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
분석을 했지만, 맞다는 보장은 없다. 결국 모든 책임은 마운드에 올라와 공을 던지는 투수가 져야 했다.
지금 지완의 평균 연봉은 1년에 500만 달러.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60억이다. 정규시즌 기준으로 한 시즌에 약 30여 경기에 올라가는 것을 감안하면 한 경기에 받는 돈은 2억.
거기에 한 경기 당 투구 숫자를 120으로 잡으면, 지완은 공을 한 번 던지는 대가로 약 167만원을 받는다.
이것은 한국 기준으로 최저 시급을 받는 노동자의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이다.
다만 세금 문제가 걸리면 이것보다 절반 이하로 받겠지만, 그래도 일반인으로선 상상도 못할 일.
하지만 그만큼 져야 할 책임이 무겁다는 반증이었다. 그러니 혜진은 분석에 대한 결과를 말할 뿐, 확실하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혜진이 한 분석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지완이 지고 있는 투수로서의 책임만큼 무겁게 다가왔다.
"내가 구단 사람에게 한 번 말해볼게. 그게 맞으면 그 사람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이것으로 혜진의 분석에 대한 이야기는 마무리. 하지만 지금은 알지 못했다.
혜진의 분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
마크를 만난 이후, 동팔은 일상을 바뀔 수밖에 없다.
이전이라면 경기가 끝난 이후. 또는 선발경기가 없어도 훈련이 끝난 이후에 바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집에 있는 지하 훈련장에서 공을 던지며 본인의 구위를 향상시켰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일정도 홈경기를 치를 때의 이야기. 원정을 나가면 집에 올 수 없으니 초과훈련을 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마크를 만난 이후에는 새로운 일정이 생겼다. 그렇다고 동팔에게 다른 사람보다 시간이 더 허용되는 것도 아니니 기존에 하던 것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
당연히 마크와 연관된 일정이 추가되었다기보다, 교체되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그것은 바로 마크의 회복이었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받은 뒤, 마크는 동팔의 초청으로 민희의 차를 통해 동팔의 집에 올 수 있었다.
마크가 집에 온 시간은 저녁을 넘어 밤.
아직 학생인 마크는 학교에 다녀야 하니 오전에 올 수 없었다. 그러니 늦은 밤에 오는 건 당연한 선택인지도 모른다.
마크는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고, 친구 덕분에 동팔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기쁨에 젓은 동생 로키를 뒤로하고 왔다.
그리고 마크가 와서 간 곳은 지하훈련장.
지하에 마운드를 만들어 훈련할 수 있는 것에 놀라면서도 사실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하긴 메이저리그에서 특급 투수인데 이 정도 만드는 거야 어렵진 않겠지. 그런데 왜 지하에 만든 거지? 더 넓은 집을 구한 다음 야외에서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럴 경우, 잔디와 조명 관리의 복병이 존재한다. 그리고 문명국이라고 하지만 간혹 사슴이나 때론 곰이 어슬렁거릴 수 있었다.
이전이라면 위험하다는 이유로 사양했겠지만, 지금은 동물보호에 대한 인식이 깊고 넓게 퍼졌다. 당연히 신고나 명령서 없이 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불가능.
그런 세세한 것은 둘째 치고, 마크는 지하 훈련장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동팔이 왜 지하에 훈련장을 만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마크, 이거 입에 물어."
"네?"
동팔이 마크에게 준 것은 마우스피스였다. 동팔 본인의 것은 가지고 있던 것을 계속 쓰면 되지만, 마크에겐 새로운 것이 필요해서 직접 사 놓았다.
마크는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면서 급격히 불안해졌다.
'왜지? 왜 이걸 나에게…….'
설마 자신을 쓰러트린 다음, 장기를 밀매하려는 걸까? 물론 그럴 이유가 전혀 없고, 간단히 쓰러지지도 않을 자신이라서 일단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동팔도 마우스피스를 준비했으니 더 이상의 의심은 곤란했다.
동팔은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기 전, 마크에게 경고했다.
"마크."
"에?"
"많이 아플 거야. 각오 단단히 해."
동팔의 말에 마크는 회복하는데 많은 고통이 따른다고 한 그의 말을 떠올렸다.
"아, 네……."
이미 지하실에는 두 남자가 누울 수 있는 간이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마크에게 걱정과 두려움을 불러 일이키는 순간이 금방 다가왔다.
'그런데 이 줄은 뭐야? 아주 튼튼해 보이잖아? 설마 묶으려는 건가?'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민희가 와서 누워있는 마크를 묶기 시작했다. 그리고 혼자서 힘들 거라 생각했는지 건장한 인디언도 와서 같이 묶었다.
"너무 아파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가 될 거야. 이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 둬."
"네?"
마크는 순간 저항을 할까 했다. 설마 묶여서 무력해진 자신을 어떻게 하려는 걸까? 그런데 왜 동팔은 묶지 않고 있는 걸까?
미국에서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실제 일어난 사건을 보도한 뉴스를 통해 별별 정신병자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들은 마크.
당연히 앞으로 있을 별별 불길한 생각이 밀려 들어왔다.
'이거 정말 괜찮을까?'
하지만 악마와의 계약을 방해한 것. 또한 여기까지 오는데 있었던 많은 일들을 생각하자 그 생각을 버렸다.
'아냐, 기도해서 이루어진 거잖아? 일단 믿자. 동팔이 형을. 그리고 이렇게 인도한 그분을…….'
무엇보다 묶기 시작하는 인디언의 힘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거기에 자신의 걱정을 알고 있는지, 유일한 도주로를 인디언이 막고 있었다.
이젠 꼼짝도 못하고 묶여버린 마크. 그러자 동팔도 그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동팔은 마크에게 말했다.
"마크, 이제 낫고 싶다는 바람을 더 강하게 해. 그러면 나을 거야. 나를 통해서."
그러면서 동팔은 마크의 손을 잡았다. 그의 말에 마크는 반신반의하며 일단 낫고 싶다는 열망을 더욱 강하게 했다.
'낫고 싶어요. 낫고 싶어요. 이 상태에서 머물지 않고, 완벽하게…….'
어떻게 보면 기도와 비슷한 갈망이었다. 다행히 바로 연결되었는지 마크는 수술을 한 부분이 다시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이게…바로 낫게 될 때 느껴진다는 고통인가? 별거 아닌…….'
처음에는 약한 고통이었다. 수술을 마치고 난 다음 느껴졌던 따가움이 조금 심하다는 정도. 하지만 아주 얇은 바늘이 콕콕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은 곧 무딘 칼로 무릎 관절을 쪼개는 것 같은 고통으로 바뀌었다.
"으윽!!!!!!"
마크는 설마 정말로 이 사람들이 자신의 무릎을 칼로 헤집어 놓나 생각했다. 그래서 고개를 겨우 들어 오른쪽 무릎을 봤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리고 옆을 보자 마크는 놀랐다.
"으읍……."
자신만이 아니라 동팔도 역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통을 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벌써부터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동팔의 옆에선 민희가 부드러운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 또한 마크의 옆에선 건장한 인디언, 하얀늑대의 벗이 그의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미인이 아니라 미안하다. 하지만 감수해라."
이전이라면 피식 웃을 썰렁한 농담. 하지만 너무 아파 기절할 지경인 마크는 그럴 만한 여력이 없었다.
지금 마크가 할 수 있는 것은 입에 물고 있는 마우스피스를 더욱 강하게 물며 어떻게든 이 고통에서 버티고 또 버티는 것이다.
"으, 으… 으……."
처음에는 비명이 나왔지만, 시간이 갈수록 비명이 나올 여력도 사라진다. 땀만 아니라, 이젠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마크.
몸도 의도하지 않게 경련을 일으키며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지금은 오줌을 지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다 마침 시계에 눈이 가자 더 놀랐다.
'뭐? 겨우 1분?'
적어도 한 시간은 지나간 것 같았다. 그런데 디지털시계가 알려주는 시간은 고작 1분이 지나갔다는 것이 전부.
'살려 줘. 제발…이런 거 싫…….'
마크가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방금 전만 해도 너무 아팠던 무릎에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서, 설마…끝난 건가?'
이젠 다 나아서 괜찮아진 걸까? 하지만 아쉽게도 아니었다.
"마크, 아직 안 끝났어. 낫고 싶다는 마음을, 의지를 계속해서 유지해야 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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