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175화 (175/325)

[175]

의사의 진료실을 나온 마크는 멍한 눈으로 주변을 보았다. 휠체어에 타고 있어서 그렇지 아니었으면 주저앉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 어……."

가능성의 말살. 그로 인해 마크는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그때 그런 그의 앞에 모데스가 나타났다.

"이런~ 안타깝게도 유. 일. 한 희망이 사라졌어."

그의 등장에 마크는 자신도 모르게 쳐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마크가 지그시 응시하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으레 피해 갔다.

마크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 계약을 하는 게 어때? 너는 무릎이 낫고, 어쩌면 계약에서 풀려날 수 있는데… 안 그래?"

희망이 있을 땐 거의 소용없던 계약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 희망이 사라진 지금 마크의 눈동자는 크게 떨리고 있었다.

***

한편, 경기가 끝나고 스크레이치는 동팔의 팀이 지구 1위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을 보았다. 그래도 지금이 지극히 초반이라 그런지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그는 자신만의 목걸이 시계를 꺼내서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거… 조금 곤란한데. 동팔을 견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계약이 깨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의 형체를 둘로 나눌 수도 없는 법이니……."

약간의 고민을 한 스크레이치. 그러다 그는 주변에 있는 악마 하나를 불렀다.

"거기 너."

악마계에서 자그마치 장관의 직급에 있는 최고위 악마의 호출이었다. 일개 하급 악마라 이름조차 없는 그는 스크레이치의 명령에 무릎을 꿇었다.

"네. 하명하십시오."

"지금부터 동팔이 마크라는 놈과 만날 수 없게 해라. 절대로. 반드시. 안 그러면 웜우드 녀석을 부러워하게 만들어주지. 아, 혼자서는 어려울 수 있으니 이걸 주지. 나와 모데스의 협약이 적힌 명령서다. 범위를 넘지 않는 수준에서 절대로 둘이 만나게 해서는 안 돼."

스크레이치의 엄명에 하급 악마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명령서를 받아들자 스크레이치는 지구의 반대편을 향해 날아갔다.

스크레이치의 모습이 사라지자 하급 악마는 명령서를 확인했다.

전부 확인한 악마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장관과 장로가 동시에 인정한 명령서… 나에게 이렇게 좋은 기회가 오다니!! 이걸로 주변에 있는 다른 악마들을 마음대로 명령할 수 있어!!!"

한 사람을 알기 위해선 그에게 권력을 쥐어주면 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약한 사람이 착한 것이 아니라 죄를 저지를 기회가 없어 착해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전부 신뢰할 수 없지만,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인간의 보편적 관점에서 악한 악마라면 강한 권력이 주어졌을 때 행동의 방향은 예상이 가능했다.

"하고 있는 일들 전부 멈춰!! 장관과 장로의 명령이다. 동팔과 마크라는 사람과 절대 만나게 해서는 안 돼!!"

그 악마도 이 명령을 완수하지 못했을 경우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분명히 이것은 큰 기회이지만, 동시에 큰 위기였다.

자신의 능력을 최고위 악마에게 보여줄 수 있는 출세의 기회. 하급악마는 이 스크레이치의 명령을 절대로 사수하려 했다.

당연히 마크가 누구인지 모르는 악마들은 제일 먼저 그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통해 뉴욕의 병원에 있는 마크를 알게 되었고, 어느 병실에 있다는 것까지 알았다.

하지만 악마들은 몰랐다.

이 모든 것은 깃대 위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됐다…….'

곧 그는 힘차게 날갯짓을 하여 재빨리 어디론가 날아갔다.

악마들은 지금 자신들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누군가의 공작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

한편, 동팔은 승리투수가 되어 평상시처럼 인터뷰를 하고 일정을 마쳤다. 오늘 찾아온 민희와 교회 사람들과 만나 같이 돌아갈 예정이라 그 전에 전화를 하려고 했다.

일요일에 교회에 갈 수 없는 동팔이니 오늘이 유일한 직접 만날 기회였다.

교회 사람들도 민희와 같이 동팔을 기다렸다.

가능한 빨리 전화를 하여 끝났다는 소식을 알려줘야 했다.

동팔은 전화를 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그가 통화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그의 뒤에서 건장한 인디언이 나타나 핸드폰을 낚아챘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당장 가야 할 곳이 있다."

단순한 어투에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인디언을 보자 아무리 야구 선수인 동팔이라도 기가 죽었다.

"아, 저기 지금……."

"갑자기 나타나 미안하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다. 이것이 우선이다. 당장 차에 타라."

동팔은 그의 말이 명령형이라 솔직히 거부감 들었다. 그렇다고 대들 엄두도 나지 않아 일단 그의 보챔에 최대한 저항하려 했다.

"아니, 그 전에 무슨 일인지 말씀을……."

"마크를 만나야 한다. 지금 당장."

그는 그 말을 하고선 차문을 열어 동팔을 강제로 운전석에 앉게 했다.

그러자 동팔은 바로 문을 닫고 시동을 켰다.

'됐어. 누구인지 몰라도 납치는 서투른 것 같아. 이대로 가 버리면…….'

그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그 인디언이 보조석에 올라탔지만 말이다.

"내비게이션을 켜라. 주소를 찍어 주겠다."

"네……."

이젠 거대한 체구를 밀어낼 자신이 더 없으니, 일단 내비게이션을 켰다.

동팔은 생각했다.

'방금 전에 누구를 만나야 한다고 했지? 마크? 마크라고? 그를 만나라고 하긴 했지만…….'

민희와 이야기하면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도 들었다. 다만 만나야 할 때가 올 때에 거부하지 말고 만나러 가라는 말도 있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지금 상황이 되자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긴 이런 상황에 누군지 모를 마크라는 사람과 만나러 가는 건… 좀…….'

무섭다. 만약 민희를 통해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자신을 좋아하는 열성 팬이 사람을 써서 납치하려 하는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내비를 일단……."

켜려고 했다. 하지만 시동을 켜고, 전원 버튼을 눌러도 내비게이션은 켜지지 않았다. 평상시와 다른 상황에 당황한 동팔. 정작 켜라고 한 인디언은 당황하지 않았다.

"여기서 수작이라니."

"네? 저는 수작을…."

동팔은 분명 켰는데 방금 고장이 났는지 켜지지 않았을 뿐이다.

인디언이 오해했다고 생각한 동팔은 더욱 당황스러웠고 억울했다. 하지만 인디언이 말을 한 대상은 동팔이 아닌 내비게이션에 서린 그 무엇이었다.

인디언은 품안에서 밝은 빛을 내는 단검을 꺼내 내비게이션을 푹 찔렀다.

"윽!"

마치 자신이 찔린 것과 같은 느낌. 얼마 전에 사서 비닐이 뜯어지지도 않은 새 내비가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단검에 찔린 내비게이션에서는 부서지는 소리가 나지 않고, 무언가 단발마의 비명만 흘러나왔다.

끼이이이~!!

인디언이 다시 단검을 뽑자 망가졌을 거라 생각한 내비게이션은 의외로 멀쩡했다.

그리고 바로 전원이 켜졌다.

내비게이션이 켜지면서 부팅이 되는 사이, 인디언이 말했다.

"뉴욕의 XXX 방면으로 가도록. 시간이 없다."

내비게이션이 준비가 되자 바로 주소를 찍는 인디언. 토속적으로 생긴 그였지만, 의외로 현대문물에 밝은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저보고 켜라고 했습니까?"

"그게 더 낫기 때문이다. 타락한 악의 세력을 줄이는데… 저들이 간섭하지 않으면 나 또한 간섭할 수 없다."

"네?"

이해할 수 없는 인디언의 말. 그러자 인디언이 말했다.

"소개를 못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먼저 가는 것에 집중해라. 한 영혼이 악마와 계약을 하기 직전이다."

솔직히 말해 너무 급작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처럼 악마와 계약할지 모르는 마크라는 사람을 위해 동팔은 더 이상 미적미적 행동하지 않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사정은 나중에 천천히 듣기로 하죠. 그런데 연락을 해야 할 사람들이 있는데 핸드폰 좀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인디언이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움직이는 성스러운 땅에게 말을 전했다."

"네?"

"너와 만나 같이 동행하려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남자다."

모든 것을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동팔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짐작뿐.

'설마 민희가 다니게 되었다는 교회의 목사님 말하는 건가? 그런데 왜 움직이는 성스러운 땅이라 부르는 거지?'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마크를 만나, 그가 악마와 계약하지 않게 막는 것이다.

이어서 인디언이 말했다.

"갑자기 나타나 당황스러울 것이다. 이해한다. 하지만 너는 알아야 한다. 너는 이미 거대한 전투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다는 걸. 그리고 너는… 이 전쟁의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

한편, 민희와 목사님 그리고 같이 있던 교회 사람들은 동팔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는 사이 기다리기 위해 그들은 다른 관중들보다 더 오래 경기장에 머물렀다.

"전화 올 때가 됐는데……."

민희는 핸드폰에 떠 있는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사이, 목사에게 무언가가 다가왔다.

항상 경기장 주변을 배회하며 관중들이 던져주는 먹이로 삶을 연명하는 고양이었다. 고양이는 무언가를 물고 다가왔다.

"꺄!"

"고양이!!"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양이가 다가오자 무리 중 일부가 뒷걸음질했다.

고양이의 목표인 목사는 피하지 않고 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어 주었다.

"오~ 사람을 잘 따르는 고양이구나."

고양이는 목사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입에 물고 있던 종이를 주었다.

"응? 혹시 친구가 보낸 거니?"

냐~

목사의 질문을 알아들었는지 고양이는 한 번 울었다. 고양이는 목사가 종이를 받아든 것을 확인하고 고고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목사가 종이에 적힌 것을 읽는 사이, 그와 민희만 볼 수 있는 웜우드가 말했다.

"아, 설마 하얀 늑대의 벗인가? 이런 건 그 친구 특기지."

웜우드의 말이 끝나자 목사는 종이를 품에 넣으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마크라는 친구를 만나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지금 가 봐야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목사가 한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전후 사정을 아는 민희는 그 말을 듣자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죄송하지만 오빠가 지금 많이 늦을 것 같아요. 나중에 오빠랑 이야기해서 집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할까 해요. 그때 만나 뵐게요."

민희도 같이 온 교회 사람들에게 적당히 둘러댔다.

일행은 아쉬움의 작별인사와 함께 각자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그들이 가자 목사가 민희에게 말했다.

"XXX병원으로 가죠. 지금 그곳으로 가고 있다고 합니다."

"네."

방금 일어난 일이지만 이런 건 처음 봤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수시로 일어나니 궁금한 것도 많았지만, 지금 중요한 일은 마크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동팔이 악마의 손아귀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 단추였다.

당시의 민희는 몰랐다.

지금 동팔이 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생존 싸움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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