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이왕이면 메이저리그로 올라가고 싶지만, 그곳은 정말 꿈에서나 갈 수 있는 리그였다.
목표로 삼을 수는 있지만, 마크도 현실을 알고 있으니 정말로 갈 것이란 기대는 거의 없었다.
일단 트리플A에 올라 간 다음, 40인 로스터 명단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공이었다. 물론 기대하지는 않아도 상상은 할 수 있었다.
'메이저리그에 가게 된다면… 이렇게 받은 은혜를 반드시 갚자. 그리고 나처럼 힘든 사람들도 도와주고…….'
나 혼자만 잘 살 생각은 없었다. 자신과 가족들이 잘 살게 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주변의 사람들 특히 어려운 형편에도 무릎 수술비용을 모아준 분들께 반드시 은혜를 갚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꼭 이번 수술이 잘 되어서 회복한 다음, 땀이 피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마크의 앞에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간호사와 함께 왔다.
"안녕하세요. 의사 선생님."
"보니까 괜찮은 것 같구나. 마크. 무릎 느낌은 어떠니?"
"나쁘지 않아요. 조금 따갑기도 하고, 안쪽이 좀 아파요."
"그건 전에 말했다시피 마취가 풀려서 그래. 끊어진 걸 강제로 이어놨고, 이젠 빨리 붙기를 기다려야지. 내가 오는 것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생각에 빠진 것 같은데 무슨 생각했니?"
"아~ 그건 말이죠."
마크는 그 말을 시작으로 자신이 빨리 나은 다음, 어떻게 살고 노력할 것인지 말했다. 그리고 목표까지도.
"마음 같아선 메이저리그에 가서 에이스로 인정받아 붙박이 주전이 되고 싶지만… 그래도 지금은 트리플A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려고 해요."
"그렇구나. 잘 회복되어야 나도 친구들한테 자랑할 텐데."
"잘 될 거예요. 강동팔이라는 선수도 의학적으로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결국 뉴욕 양키즈의 에이스가 되었잖아요."
그 말을 하면서 마크는 밝게 웃었다. 그의 미소와 달리 의사 선생님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이거 경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하지 않을 수도 없고…….'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지만 지금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치료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후에 마크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절망을 생각하면 언젠가 말은 해야 했다.
의사가 걱정하는 것은 또 있었다.
'학회에서 듣기는 했지만, 강동팔의 경우는 기적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그 기적이 마크에게도 일어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그리고 동팔은 재기에만 거의 5년의 시간이 걸렸는데…….'
사실은 잔혹하다. 의사는 지금은 정신적인 모르핀(Morphine)으로 그를 고통스럽지 않게 해주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했다.
혹시라도 모른다. 어쩌면 마크의 회복력의 의외로 뛰어나서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좋은 차도를 보일 수 있었다.
일말의 희망을 잡고 싶은 건 마크만이 아니라 의사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의사는 주의사항을 당부했다.
"희망이 있으니 다행이지? 그래도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 마크는 젊으니까 회복력이 뛰어나. 지금 이어붙인 것도 빨리 나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안 아프다고 함부로 움직이면 겨우 붙었던 것이 떨어질 수 있으니까 끝까지 조심하고. 알겠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마크의 밝은 인사에 의사도 역시 애써 밝게 웃었다.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을 숨기면서.
***
동팔은 마운드에 섰다. 처음과 달리 익숙해졌는지 주변을 돌아볼 여유까지 있었다.
'있다…….'
민희는 평상시처럼 투수 정면에 있는 자리가 아니라 더그아웃 쪽에 있었다. 이런 이유는 나오기 전 민희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형편도 생각해야겠지.'
연봉이 높고 돈을 많이 벌으면 좋은 좌석에 앉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미국에 왔다고 해서 모든 한국인이 잘 사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민희와 같이 경기장에 오는 것도 시간과 돈의 손실이 크게 발생했다. 그러니 민희가 주로 앉는 자리의 옆에서 같이 보자고 제안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전과 달리 바로 앞에 민희가 보이지 않는 바람에,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옆으로 돌려야 했다.
별것 아니지만 나름 불편함을 감수하던 동팔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많지 않다면 내가 티켓을 구입해주는 것도 괜찮겠지.'
설마 매번 사달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다 한두 번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 생각을 하면서 동팔은 가볍게 연습 삼아 공을 던졌다.
민희와 같이 온 사람들은 교회 사람들과 목사였다.
"여기에 너무 오랜만에 온다."
"오고 싶어도 가족끼리 오는 것도 힘들었는데 이렇게 한 번 와 보네."
아직 민희가 많은 사람과 친해지지 않아서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그 가운데 유일한 남성이 있었는데 바로 교회 목사였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 아니 남자의 모습을 한 악마도 그 무리에 같이 있었다.
―나 보고 있지 마. 지금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거 알고 있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덕분에 웜우드와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미친 여자처럼 보였지만 이미 한참 지나간 일이었다.
그 흑역사를 지금 구현시킬 이유가 없었다.
민희가 못 보는 척, 안 들리는 척하고 있지만 그사이에도 웜우드의 나름 친절한 해설을 하고 있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교회 건물 자체가 성지인 건 아니야. 건물은 건물에 불과해. 진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뭐, 그건 둘째 치고 내가 나와 있을 수 있는 건 바로 옆에 있는 목사 때문이야.
신성력의 근원이 바로 이 사람이니 옆에서 떨어질 수 없는 거야. 앞으로 예배할 때 자주 보게 될 테니 미리 알고 모르는 척하고 있어. 참고로 장난은 안 칠 거니까 안심하고.
민희는 웜우드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같이 온 집사님들과 대화에 집중하느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웜우드의 설명은 길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설명을 마친 웜우드는 주변을 느긋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으아~ 주변에 악마들이 득실득실 장난 아니네. 조금만 벗어나면 죽는 건 시간문제야.
그렇게 말을 해도 민희의 눈에는 다른 악마들이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자신의 옆에 있다는 두 수호천사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니 말이다.
천사든, 악마든 자신의 모습이 인간에게 보이는 것을 자제한다고 했다. 이유는 있었다.
천사의 경우는 자신에게 집중하여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악마의 경우는 인간이 자신들을 경계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모습을 보이면 경계하여 피하려 하니,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인간을 유혹하고 타락시키는 것이 그들의 전략 중 하나였다.
참고로 그 전략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많은 인간을 타락시킨 장본인 중 하나가 스크레이치다. 그의 경험을 악마들이 적극적으로 벤치마킹을 한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목사는 웜우드가 설명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애초에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있고, 거기다 교인들과 같이 있으니 말을 하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웜우드도 꼭 필요한 말만 하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으니 말릴 필요도 없었다. 평범하게 집사님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 목사는 양키 스타디움에 있는 높은 깃대를 보았다.
'어? 설마 그가……?'
목사가 보는 곳에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있다면 정확한 품종은 알 수 없지만 맹금류로 보이는 새가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 새는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지는 동팔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옆에 있는 스크레이치 또한 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인지 몰라도 그 새의 눈동자와 목사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맹금류인 그 새가 분명히 웃었다.
그러자 목사는 확신했다.
'설마 했는데 하얀 늑대의 친구…인가? 곧 보겠군.'
***
마크는 병실에 있는 TV를 보고 있었다. 다인실인 이곳에서는 지금 하고 있는 야구 경기 중계를 틀어 놓았다.
다행히 병실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뉴욕 양키즈의 팬이었는지 채널을 두고 다투는 일은 없었다.
특히 마크는 타오르는 눈으로 동경과 존경, 기대를 담아 마운드에 올라온 동팔을 보고 있었다.
'첫 선발을 봤을 때 정말 대단했지? 이번에는 어떨까?'
혈혈단신으로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것도 놀랍지만, 팀의 주축 요원이자 에이스로 마운드에 서는 것도 대단했다.
야구를 하는 모든 이가 꿈꾸는 것.
시련을 넘어 꿈을 이룬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영웅이 되기 충분했다. 그가 겪은 것과 비슷한 아픔을 지금 겪고 있는 마크에게는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마크와 같은 병실을 쓰는 다른 환자들과 그들의 가족들도 사정을 알고 있기에 응원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동팔이 동양인이든 무엇이든 간에 석연치 않은 판정을 당하면 절로 언성들이 높아졌다.
"아니, 저게 왜 볼이야?"
"완전 한가운데로 들어갔는데!!"
엄밀히 말하면 한가운데는 아니었지만 스트라이크라 볼 수 있는 공의 궤적이었다. 그러나 볼이라는 판정에 양키즈 팬들은 인종을 떠나 한 마음이 되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흑백차별이나 인종차별이 없었다.
경기 결과는 양키즈의 승리.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 환호했다.
"와우~ 이번에도 완봉이야!!"
"양키즈가 이번에 돈 제대로 썼잖아?"
한국에서 데려온 선수에게 3년 동안 5천만 달러라는 거금을 썼다는 소식을 듣고 화를 내던 팬들도 있었다.
하지만 동팔은 고작 두 번의 선발 등판으로 양키즈 팬들에게는 환호를, 상대하는 팀의 팬들에겐 절망을 안겨주었다.
경기가 승리로 끝나자 기분이 좋은 마크.
'나도 언젠가 강동팔 선수랑 같이… 뛰었으면…….'
단순히 재기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니 안 좋을 수 있을까. 마크의 그 동경은 새로운 꿈과 목표를 가지게 했다.
승리에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던 모데스도 기뻐했다.
"됐어. 희망이 밝게 빛날수록 절망은 더욱 어둡기 마련이니까……."
이미 모데스는 모든 작업을 끝냈다. 모데스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의사가 문을 열고 마크에게 다가왔다.
"마크. 미안하지만 지금 시간 되니?"
"네? 네."
"잠시 상담을 했으면 하는구나. 같이 갈까?"
"네."
마크는 휠체어를 타고 의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는 병원에 있는 자신의 진료실에서 마크에게 사실을 말했다.
"마크. 사실 이전부터 말하려다 말았는데… 더 이상 속일 수 없구나."
처음에는 의사가 부르자 아무 생각 없이 좋은 기분으로 나온 마크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의사의 말에 마크는 점차 나락에 떨어진다는 느낌을 이해가 되었다.
"혹시… 수술이 잘못되었나요?"
"아니, 수술 자체는 잘 됐어. 하지만… 절반만 붙일 수 있었다. 수술 전과 달리 힘이 더 붙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처럼 완전히 돌아가는 건… 거의 불가능해. 루키리그나 싱글A라면 몰라도… 그 이상은… 어려울 거란다."
의사의 말에 마크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가 의심이 되었다.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 몇 번이고 의사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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