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다만 고교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부상으로 인해 방출당하고 나서, 이거라도 배우는 것이 어떠냐는 이유로 배웠던 것.
당시에는 절망 속에 있는 자신을 왜 부려먹나 싶었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어머니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럼 다녀올게."
"네, 경기장에서 봐요.
신혼부부답게 다시 한 번 입맞춤을 하고, 민희는 동팔을 배웅했다.
한편, 그들의 걱정대로 이미 스크레이치는 동팔의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놓치지 않고 다 듣고 있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그곳에 있었군. 유명한 성지는 아니지만, 지금 상태에서 제일 껄끄러운 곳 중에 하나인데…….'
사람들에게 있어, 보통 성지(聖地)라고 하면 유명한 사건이 일어났던 곳. 또는 신성한 기적이 있었던 곳이나 종교적인 도시로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예루살렘이 있다. 그곳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악마들은 사람들이 성지라고 생각하는 곳을 성지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생각하는 성지의 정의는 단순했다.
'그곳은 원수의 힘이 고정적으로 강하게 어린 곳. 그렇다고 해서 못 뚫을 것은 없다. 하지만… 뚫는 만큼 나는 힘을 잃는다. 다시 회복할 수도 없어. 고작 웜우드 하나 잡자고 내 힘을 소모할 필요가 없지.'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그래서 스크레이치는 웜우드가 어디 있는지 뻔히 알아도 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웜우드도 그것을 알기에 걱정하지 않고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역시나 마크였던가. 원수의 정보력이 우리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은 이래서 불편해. 하지만… 왜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았지? 그럴 수 있는데도 왜?"
신은 생각보다 불친절해서일까? 하지만 스크레이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지금 당장 만나도 쉽지 않을 텐데……."
지금 당장이라도 마크가 모데스와 계약을 하게 되면, 신이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니 스크레이치는 오히려 자신이 화가 났다.
"또 나를 무시하는 건가? 아니 악마 전부를?"
지금은 자신만 아니라 모데스와 함께 연합전선을 펼치고 있다. 비록 이 일이 최고위 악마들의 유흥에 가까운 일이라지만, 신이 제일 소중히 생각하는 영혼의 강탈이 일어나는 현장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개입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마치 없다고 느낄 정도로.
스크레이치에게 지금 중요한 일은 동팔이 마크와 못 만나게 하는 것. 그것만 생각해야 할 때였다.
스크레이치는 느긋하게 동팔을 따라가면서 중얼거렸다.
"이거 유흥삼아 한 일이었는데… 생각보다 진지하게 임해야 할지도…모르겠군……."
하지만 그는 자신의 패배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이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으니까.
***
한편, 모데스는 마크가 아닌, 다른 사람과 만나고 있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미국 서부의 북서쪽 끝에 있는 워싱턴 주, 시애틀이었다.
그리고 모데스는 저택보다 더 넓은 집에서, 자신만의 마운드를 가진 사람의 앞에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은 워싱턴 주에 워싱턴 D.C(Washington District of Columbia)가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정작 미국 백악관이 있는 워싱턴 D.C는 동부에 있는 매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 사이의 특별구이다.
좌우지간 미국 동쪽에 있다 서쪽 끝에 온 모데스는 자신의 이전 계약자와 만나고 있었다.
"어때? 강동팔의 실력은."
모데스의 물음에 시애틀 매리너스 1선발인 헤럴드 프럼프가 말했다.
"설마 레드삭스 4번 타자인 지미 테일러를 돌려세울 줄은 몰랐어. 나름 잘 던지는 것 같아."
이전에 WBC를 봤을 때와 달리 동팔에 대한 평가는 조금 높아졌다. 그래도 바뀌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럼 그가 이번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할 확률은 얼마나 될 것 같나?"
"힘들어. 올해 뉴욕 양키즈가 큰 맘 먹고 영입을 해서 확률이 조금은 올랐지. 동팔이 없다면 2%미만. 하지만 그 녀석이 끝까지 제대로 된 역할을 한다면 최대 4% 정도가 전부. 차라리 다른 팀에 베팅을 하는 것이 더 나아. 예를 들면…한동욱이라고 했나? 그 녀석이 있는 클리블랜드가 조금 더 높겠지."
그의 말에 데모스가 물었다.
"그럼 클리블랜드가 우승할 확률은?"
"잘 해야 5%. 그 이상은 힘들어. 확실히 타선은 강해졌지만, 마운드가 약해. 그나마 다행인 건 수비가 좋아져서 실점이 좀 줄었다는 정도? 잘 하면 지구(地區) 우승. 아니면 2등. 이후 디비전과 챔피언십은 운에 따라 승패가 갈릴 확률이 더 높으니 알 수 없겠지만."
그 말을 하며 헤럴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몸을 가볍게 풀면서 말한다.
"전에 너를 통해서 들어보니 능력이 전부 보잘 것 없더군. 빠른 몸, 극한의 잠재력? 그리고 강한 회복력까지?
그나마 머리가 좀 돌아가는 쪽은 동욱이라는 친구야. 적어도 자신의 시간을 느리게 할 생각을 했어. 신경속도가 빨라지면 그만큼 상대적으로 외부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겠지. 하지만…내가 너에게 받은 능력에 비하면 하찮지. 하찮고 또 하잖아. 그것들 전부 달려들어도 이길 자신이 있어.
"
그 말을 하고 그는 공을 쥐더니 공을 던졌다.
휙~퍽!!
공은 앞에 있는 표적판의 한 가운데에 정확히 맞았다. 확실히 뛰어난 제구력. 하지만 속도는 고작해야 150키로를 겨우 넘는 수준.
강속구와 강타자가 넘쳐나는 메이저리그의 속도를 생각하면 결코 빠른 속도가 아니었다.
단순히 스펙으로만 보면 그의 공은 동팔과 비교할 때 격이 한 단계 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공을 칠 수 있는 타자는 거의 없었다.
공의 위력은 그냥 보면 언제라도 공략이 가능할 것만 같다. 하지만 그 방심이 공을 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단순히 방심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해답을 알고 보는 시험은 더 이상 시험이 아니지."
그에게 능력을 준 모데스는 그가 어떤 능력으로 메이저리그의 타자들을 정복했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구위만이 아니라 스스로 일구어 놓은 기록으로 인해 그는 시애틀에서 부동의 제 1선발 투수였다.
"이번에 네가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알지?"
모데스의 말에 헤럴드는 그를 노려봤다.
"뭐?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왜 네 일을 해야 하지? 이미 우리의 계약은 끝났어."
헤럴드의 반응에 모데스는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내가 말실수를 했군. 질문을 잘못했어. 그럼 다시 물어볼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뭐지?"
모데스의 질문에 헤럴드는 그가 제일 바라는 답을 했다.
"당연히 나머지 놈들의 월드시리즈 우승 저지. 올해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는 건, 계약자가 없는 구단뿐이야."
그에게 있어 월드시리즈 우승은 중요하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월드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그런 실력과 기록이 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깊은 구덩이 앞에 세우고 발로 찰 때의 기분은 정말 짜릿하지. 좌절 속에 무너지는 얼굴을 볼 때마다 늘 새로워."
바로 절대적인 우위에 있는, 자신의 힘의 증명이었다. 그리고 그 증명법은 모든 악마 계약자들이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
그럼으로 인해 자신처럼 악마에게 영혼을 강탈당하지 않는 사람이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렇지. 그래야……."
"재미있으니까."
***
한편, 동팔은 차가 밀리는 것에 짜증을 내면서도 착실하게 교통법규를 준수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이거 좀 늦었나… 장난 아니네. 출발이 조금 늦은 것 가지고… 아니면 사고라도 났나?"
다음에는 조금 아쉽지만 더 빨리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직 늦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만 가득 찬 동팔. 그리고 그가 보이지 않게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스크레이치.
하지만 두 사람도 모르는, 아주 먼 곳에서 이 둘을 지켜보는 존재가 있었다.
삐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높이 날아오른 흰머리 독수리. 미국의 국조(國鳥)이지만, 쉽게 볼 수 없는 독수리였다.
거대한 몸을 바람에 의지하며 커다란 날개로 하늘을 나는 독수리는 뛰어난 시력으로 동팔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독수리의 눈에는 동팔만 아니라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악마 스크레이치 또한 보고 있었다.
보고 있는 것은 독수리의 눈. 그러나 독수리의 눈은 또 다른 누군가와 이어져 있었다.
"고맙다, 흰눈머리. 덕분에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짙은 갈색의 피부를 가진, 키가 크고 건장한 인디언 남자였다. 흔히 생각하는 인디언 복장은 아니다.
하지만, 공원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며 어느 누구나 그가 인디언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증거는 긴 머리카락과 주렁주렁 달린 인디언 양식의 장신구. 그리고 목에 걸린 깃털 목걸이가 그의 정체성을 증명하고 있었다.
한 쪽 눈을 감았지만, 감은 눈으로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있는 남자.
그는 독수리의 눈을 통해 동팔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대정령의 사랑을 받는 자……."
그리고 이어서 스크레이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검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존재."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독수리의 시선과 스크레이치의 시선이 마주쳤다.
"큭!"
스크레이치의 잔혹한 웃음을 보는 순간, 독수리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그러자 그는 감은 눈을 떴다. 그런데 방금 전만 해도 멀쩡하던 눈이었는데, 붉은 핏발이 서며 충혈되었다.
"역시…대악마인가… 최대한 멀리서 지켜봤는데도 발각되다니……."
그는 충혈된 눈을 감고, 손으로 비볐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충혈된 눈이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위대한 대정령의 인도로 그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를 도와 이 전투의 국면을 전환하는 것……."
그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걸음을 옮기자, 그의 신형이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마치 그 자리에 원래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
마크는 병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수술을 마친 그의 오른쪽 무릎은 붕대와 거즈로 감겨 있었다.
마취가 풀려 아주 약간의 따가움과 고통이 느껴졌지만, 마크는 인상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이 아픔이 고마웠다.
'이제 빠르게 재활하고 운동하고, 훈련받으면 다시 이전처럼 뛸 수 있을 거야. 그러면…….'
그 이후에는 먼저 루키 리그에 입성할 것이다. 마크는 같이 졸업한 동기와 지역 내 같은 포지션에서 뛰는 선수 중에서도 제일 뛰어났다.
루키 리그에는 당연히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치열한 경쟁 속에 다음 리그로 올라가야 했다.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해야겠지만, 적어도 지금만은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싶었다.
마크의 계획은 루키 리그에서 열심히 훈련하고, 빠르게 적응하여 싱글 A로, 그 다음에도 인정을 받아 더블A에 올라간 다음, 내년 말이나 내후년에 트리플A로 올라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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