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동팔의 첫 선발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3연전의 마지막 경기에 뉴욕 양키즈 팬들이 빼곡하게 양키 스타디움을 채웠다.
캐스터와 해설자가 차분하게 중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양키즈의 새로 온 투수가 첫 선발 등판을 합니다. 속단할 수 없지만 오자마자 선발자리에 있다는 것은 확실히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제3선발로 말이죠.]
[4선발이나 5선발로 이름을 올리는 경우는 있지만 이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래도 이번에 양키즈 마운드에 오르는 루키의 기록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해설자의 말이 끝나고 화면에 동팔의 기록이 나왔다.
전부 한국에서의 기록이었다.
[와우~ 이거 정말 프로의 기록이 맞습니까? 아마추어 리그에서도 이런 기록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보이겠지만 사실입니다. 평균자책점은 사실상 제로입니다. 일부 피홈런을 제외하면 실점을 허용한 적이 없어요. 삼진도 삼진이지만, 이것 보이십니까? 볼넷이 없습니다.]
[그럼 그 사이에 한국 리그의 수준이 떨어졌나요? 하지만 WBC를 보면 그렇지 않잖아요?]
캐스터의 말이 끝나자 화면에선 WBC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나왔다.
미국팀이 아닌 한국팀의 기록이었다.
[이번 WBC에서 한국팀은 전승 우승을 했습니다. 결승에서서는 우리나라와 맞붙었는데 우리가 졌습니다. 여기서 집중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 결승전에 나온 선발투수가 이번에 올라온 루키입니다. 그때의 기록을 보시죠.]
그리고 화면은 당시에 던졌던 동팔의 기록을 보여주었다. 80개도 안 되는 공으로 5이닝을 완전히 틀어막은 기록을 보며 두 사람 모두 감탄했다.
[기록을 보면 확실히 양키즈의 선발 자리를 꿰찬 이유가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의 타자를 상대로 완벽하게 막았어요. 피안타가 있었지만 그 정도는 어느 투수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 아닙니까.]
그 말을 할 때, 중계화면은 마운드에서 연습하고 있는 동팔의 얼굴을 잡았다. 그때, 집에서 중계를 보고 있던 지미가 깜짝 놀랐다.
"와! 정말이다."
지미의 반응에 아빠가 물었다.
"응? 뭐가?"
그러자 지미는 크게 흥분하며 말했다.
"우리 옆집에 동양인 부부가 이사 왔잖아요!"
"그렇지."
"그 남편 얼굴이 저 얼굴이랑 똑같아요."
"그냥 비슷한 얼굴 아니니? 난 아시아 쪽 사람을 보면 얼굴 구분하기가 힘들던데."
아빠의 말에 지미는 확신하며 말했다.
"아뇨. 그 사람이 맞아요. 아침에 봤는데 남자가 일하러 가면서 양키즈 유니폼을 입고 있었어요. 등번호는 66번이었고요. 그런데 지금 나오는 투수 등번호도 66번이잖아요."
지미의 말에 아빠는 다시 동팔을 소개하는 기록을 보았다. 동팔이 나오는 화면에서 아래 부분에 자막과 같이 한국 기록과 등번호가 나와 있었다.
"어? 정말이네."
아빠의 말에 마실 것과 과자를 가져오던 엄마가 말했다.
"그냥 팬 아닐까요? 설마 옆집에 메이저리거가 왔겠어요?"
믿기 힘든 건 사실이다. 그러자 아빠가 말했다.
"확인하기 전까지 모르지. 하지만 출근할 때 양키즈 유니폼 입고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 물론 아주 희박한 확률로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아무리 자유로운 분위기의 미국이라도 최소한의 양식은 있었다. 출근하는 데 캐주얼을 입는 것은 용인되지만, 발레복을 입고 가는 사람은 없었다.
야구 유니폼이 발레복처럼 주변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옷은 아니지만 안에 받쳐 입을 수는 있는 정도였다.
대놓고 입고 다니는 경우는 딱 하나다.
바로 양키 스타디움으로 가서 양키즈를 응원하러 갈 때뿐.
아빠의 말에 엄마도 설마설마했다.
"그럼 정말로 저 선수 네가 옆집에 이사 왔을까?"
"그거야 내일 확인하면 되는 일이지. 어쩌면 정말 저 친구가 왔을 수도 있어."
지미는 거의 확신하지만 지미 엄마의 말대로 쉽게 다가오지 않는 것도 현실이었다. 이들은 중계를 보면서도 양키즈를 응원하는 데만 신경 쓰지 못했다.
"오늘 선발이 얼마나 잘 던지는지 보자. 완벽하게 막으면 내일 당장 선물 들고 찾아간다. 빨간 양말(보스턴 레드삭스) 놈들 따위 확 뭉개버려야지."
그렇지 않아도 개막전의 벤치 클리어링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두 팀이었다. 지미도 아빠의 말에 별다른 여과장치 없이 수긍하고 있었다.
"그래도 메이저리그에서 처음으로 던지는데 긴장하고 있지 않을까요? 못 던지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지미의 말에 아빠는 어딘가를 향해 눈짓을 했다. 그가 눈짓한 곳은 가족들만 아는 비밀의 공간이었다. 만약 강도가 들어왔을 경우 방어하기 위해 숨겨 둔 총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자 바로 지미의 엄마가 소리쳤다.
"여보!!"
"아이, 깜짝이야. 농담이야, 농담.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렇게까지 하겠어?"
설령 동팔이 제대로 못 던져 대패를 하더라도 잠시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동팔이 집에 돌아올 때쯤엔 화가 가라앉으니 지미 엄마가 생각하는 불상사는 없을 것이다.
그건 엄마도 알고 있었다.
"그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미 앞에서 그런 건 자중해요."
지금 엄마가 화를 내는 건 지미에게 안 좋은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농담으로라도 생명을 경시하는 것은 그녀가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였으니까.
"크흠… 농담도 못 하고… 크흠……."
아빠는 불만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괜히 더 아내와 싸워봤자 자신에게만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모의 언성이 높아지면 지미가 그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쉽게 삭일 수 없는지 궁시렁거리기는 했지만 더 이상 크게 말하지 않았다.
결국 그날 지미네는 생각보다 아주 조용하게 경기를 보았다.
***
동팔의 메이저리그 첫 선발 경기는 2대 0의 스코어로 양키즈의 승리로 끝났다.
경기 초반에는 긴장했는지 제구가 잘 되지 않았지만 이내 적응하고 압도적인 피칭을 보여주었다.
결국 동팔은 130개의 공으로 9이닝을 틀어막아 메이저리그 데뷔와 동시에 완봉승을 했다.
한국에서 첫 선발로 올라왔을 때처럼 메이저리그에서도 완봉승을 거둔 동팔이었다. 비록 한국에서처럼 노히트노런에는 실패했지만, 완봉을 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른 동팔은 미국의 취재진과 함께 한국 취재진의 집중적인 질문공세를 받았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아는 일반적인 이야기였다.
일상적이면서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일이 그 이후에 일어났다.
"지예야."
"어, 오빠? 여기 어떻게……."
"그야 당연히 네가 보고 싶어서 왔지."
참고로 민철의 이 말은 본인이 생각한 예상과 달랐다. 그냥 사실대로 출장을 왔다고 말하려 했다. 지예가 부담을 가지거나 불편해하지 않도록 하려는 민철 나름 배려가 담긴 생각이었다.
하지만 처음 그 말을 민희에게 했다가 여동생인 그녀에게 호된 야단을 맞았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그런 건 어차피 조금 뒤면 알게 될 일이에요. 그러니 그 전에 먼저 언니의 마음을 파고 들어가야 될 거 아니에요!!'
결국 두드러기가 날 것 같지만 적당히 느끼한 말을 느끼하지 않은 어투로 말하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놀라웠다.
"오, 오빠……."
설마 항상 냉철하고 분석적인 모습을 보이던 지예가 이렇게 흔들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한국에서라면 통하지 않을 말이지만, 여기는 미국이었다.
그리고 지예는 오랜(본인이 느끼기에) 시간 동안 혼자 있어서 외로움에 지쳐가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보고 싶은 님이 바로 눈앞에 있으니 그리고 보고 싶다는 말을 들으니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보다 놀라운 지예의 반응에 민철은 민희에게 마음속으로 고마워했다.
'쌩유. 민희. 나중에 청첩장은 친구들 중에서 제일 먼저 주마. 오는 건 둘째 치고.'
이미 완전히 넘어온 상태이니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민철의 목적은 확실하게 이루어진다.
목적은 바로 지예가 자신과 만나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행복해 하는 것.
인터뷰가 끝났으니 공식적인 일정도 없었다. 남은 일은 묵고 있는 호텔에 가서 기사를 작성한 다음 올리는 것이 전부였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초본으로 작성한 것이 있으니 거기다 붙여넣기만 하면 오늘의 일은 끝난다.
그 이후에 남은 것은 오랜만에 만난 애인과 함께 보낼 뜨거운 밤이었다. 그걸 생각하니 없던 힘이 절로 생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방해가 다가왔다.
"저기, 아가씨."
평소 지예에게 눈독을 들이던 양키즈 선수였다. 그는 지예의 앞에 있는 민철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뭐야, 이 고릴라는?'
인상으로 누군가에게 눌린 적이 없던 그였다. 미국에서 스포츠로 일류가 되었다는 것은 건장한 남자들을 상대로 지지 않기 위해 싸우고 또 싸워왔다는 것이다.
그런 그도 바로 앞에 선 민철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거 완전히 킹콩이잖아? 그리고 운동했나? 체구도 크고…….'
프로에 가지 못했다 뿐이지 민철도 포수 출신이다. 상대하는 타자들의 분석을 제일 많이 하고 투수를 리드하며 앉아 언제라도 견제를 해야 하는 것이 포수다.
그래서 포수 중에 몸이 호리호리한 사람을 찾는 건 어려웠다.
민철이 이후에 야구만 한 것도 아니고, 헬스도 좋아해서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조금 살찐 아저씨지만, 벗기고(?) 보면 근육이 눈에 바로 들어왔다.
지예가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녀는 민철의 옷을 벗기기 전보다, 벗긴 후에 그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비록 민철이 둔감한 남자라지만 적어도 자기 여자 노리는 건 재빠르게 알아차렸다.
"누구시죠?"
그 말을 하면서 그를 노려보는 민철이었다.
민철의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친 그는 마치 킹콩의 손에 쥐여진 엑스트라 한 명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대로 있으면 당할 거야. 이대로 있으면 안 돼…….'
그의 태세 전환은 야구 실력만큼 빨랐다.
"아뇨. 그게… 자주 보던 기자 아가씨랑 같이 있는 멋진 분을 보니 누구신가 싶어서요."
본래 계획은 지예의 애인을 찍어 누르는 것이었지만 민철의 험악한 인상에 정작 눌린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는 좋은 말로 둘러대며 지예와 민철을 보냈다.
사정을 얼추 알고 있는 동료들이 그의 뒤로 다가왔다.
"오늘은 마이클의 실연을 기리기 위해서 마실까?"
"그거 좋지. 친구의 불행은 우리의 기쁨이니까. 그런데 그 전에 사귀지도 않았지?"
겉으로 보기에는 위로해 주는 것 같지만 오히려 놀리고 있는 친구이자 동료들.
그들의 장난과 농담에 마이클도 응수했다.
"이 자식들이!! 나랑 해보자는 거야!!"
마이클을 자신을 놀리는 친구들을 잡기 위해 간만에 전력으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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