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그건 그렇지만……."
친구의 말에 마크는 얼마 전에 나타난 모데스의 제안이 아른거렸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내가 메이저리거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지니게 되면 졸업 후, 1년도 되지 않아서 최소 트리플A에는 갈 수 있을 텐데…….'
한 해 야구 지망생이 미국에만 10만 명이 나온다. 그 외 다른 국가에서 오는 야구지망생을 포함하면 경쟁은 두 배가 된다.
그 중에 극히 일부만이 트리플A 리그에 발을 디딜 수 있다. 메이저리그의 40인 로스터 안에 들어가는 일이 없을 때도 있다.
'정말로 계약을 하는 것이 더 나을까? 그러면 이런 시궁창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그리고 부모님이랑 동생들에게도 더 나은 미래를 줄 수 있고.'
자기 혼자만의 문제라면 가차 없이 거절했을 악마 모데스의 제안이지만 가족들이 눈에 밟혀 내적 갈등이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이런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5년 동안 바짝 벌고 죽는 게 나을까? 그러면 적어도 가족들이 가난이라는 족쇄에서 해방될 수 있으니까…….'
자신을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수단이 악마와의 계약이라서 그렇지 타인을 위한 희생은 숭고한 것이니까.
그러다보니 마크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무릎이 낫는 것은 기본이야. 그리고 계약을 통해 얻을 것은 빠른 발과 민첩한 행동 그러면 투구를 치는 것도 더 나아지겠지. 힘은 내가 알아서 키워야 할 것이고…….'
이제는 모데스와 계약할 때, 어떤 힘을 요구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친구인 제임스가 말했다.
"야, 갑자기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
"아… 미안……."
"하긴 너는 나랑 달리 잘 나가기도 전에 이렇게 됐으니 생각도 많이 다르겠지. 원래의 나는 이해 못하지만 이해해 보도록 노력을 할게. 나는 관대하니까."
어느 영화에서 나오는 어떤 황제의 말투로 말하자 마크는 피식 웃었다.
"네가 페르시아 왕이냐. 그럼 머리도 다 밀어."
"야, 네 머리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냐? 레게 머리가 땋기 얼마나 힘든데."
아주 잠시, 모데스의 제안에 넘어갈 뻔한 마크. 하지만 친구의 말로 인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생각했다.
'그래… 강동팔이라는 선수도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해서 메이저리그에 섰는데 나라고 못하겠어? 일단 해 보자.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수술비도 어떻게든 마련해서 나은 다음에 그 다음을 생각하면 될 거야.'
***
한편, 동팔은 첫 선발인 만큼 한국 스포츠 언론의 시선을 많이 받고 있었다. 당연히 그와 단독 인터뷰를 하고 싶어 하는 기자들이 많았지만, 한국에서 그와 단독으로 인터뷰할 수 있는 기자는 유일했다.
"지예 누나. 오셨어요?"
"응. 오늘은 일로 왔어. 지금 잠시 쉬는 중이니?"
"네."
지예는 기자 신분으로 이미 출입증을 발급 받아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때, 아무나나 인터뷰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자유롭게 오가지만, 훈련에 방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출입증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예가 주로 하는 일은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 그리고 선수들끼리 편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찍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양키즈의 선수들과 코치들, 감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했는지 지예가 사진을 찍어도 아무렇지 않게 평상시처럼 행동했다.
오늘은 동팔이 메이저리그 첫 선발등판을 하는 날이라 그 전에 미리 단독으로 인터뷰를 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인데 각오는?"
"잘 던져야죠. 당연히 팀이 승리하는데 보탬이 되도록 할 겁니다."
"너무 원론적이다. '나 잘났어'하는 대답은 안 돼? 예를 들면 '9이닝 당, 삼진 10개'라든가. 아니면 한국에서처럼 평균 자책점을 0점대로 하겠다든가."
지예의 말에 동팔은 황당했다.
"네? 그러면 무슨 말을 들으려구요. 미국에선 그게 좋은 모습이지만 한국에선 건방지다는 말 나오는 거 다 알고 있거든요."
동팔의 말에도 지예는 여전히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지금은 평상시처럼 '누나, 동생'하는 사이가 아닌, 기자로서 동팔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알고 있어. 그래도 노파심에 말하는 거야. 혹시라도 다른 기자들 앞에서 말하면 조심하라고. 나야 알아서 자르겠지만 그 치들은 더 자극적으로 바꾼단 말이야. 예를 들면 '강동팔 왈(曰), 메이저리그 정복 선언!' 뭐 그런 걸로."
지예의 말에 동팔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네? 정말로요?"
"뭘 새삼스럽게 그런 반응을 보이고 그래? 이것도 나름 순화시킨 거야. 이건 한국 기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스포츠 기자들의 전형적인 문제니까, 한국 아니라고 방심하지 마. 지역 신문도 무시 못 해. 여긴 한 개 주가 한반도와 비슷하거나 더 크거든."
미국의 주 하나가 남한보다 더 넓다.
인구까지 많은 건 아니지만 이 정도만 해도 하나의 나라와 같았다. 그러니 주에서 관리하는 자체적인 경찰이나 방위군이 있고, 동시에 우리가 흔히 미국이라 말하는 연방차원의 수사국과 군대가 있었다.
그 연방 수사국이 영화와 미국 드라마에서 자주 보는 FBI(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다.
연방수사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경찰과 같은 차원은 아니고 광범위한 정보 수집기관에 더 가깝다. 거기다 미국에는 정보기관이 그것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더 있었다.
"어쨌건 이번 첫 선발에 대한 각오. 읊어."
"그건… 첫 선발이니 개인적으로 각별한 순간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팀이 리그에서 우승하고, 나중에 챔피언십 우승. 그리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향하는 여정의 처음이기도 하죠. 그 첫걸음을 편하게 하고자 합니다. 당연히 승리를 통해서."
"바꿔 말하면 방금 전에 한 말이랑 다를 것이 없네."
"어쩔 수 없잖아요. 아무리 야구가 투수놀음이라 해도 투수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그건 한국에 있을 때 뼈저리게 느꼈고."
"그야 그렇지. 원론적인 이야기지 그건. 당시 RG의 타격능력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더블 우승이었는데."
당연히 RG는 지난 이적 시장에서 동팔을 대체할 투수의 보강했다. 그래도 동팔보다 뛰어난 투수를 구할 수 없으니 최대한 버틸 수 있는 정도로만 구했다.
그리고 전과 달리 타자 쪽도 더 보강시켰다.
"그래도 양키즈라면 좋은 선수들이 많아요. 전부 믿을 수 있는 선수들이죠. 다른 구단도 마찬가지지만 지금 전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생각합니다."
"오케이. 지금은 이 정도만 할게. 아, 오늘 끝나고 너네 집에 들를까 했는데 오늘은 좀 곤란하다고 민희가 말하더라. 그래서 경기 끝나고 바로 인터뷰할 거야. 나 말고 다른 기자들도 있겠지만 그렇게 알고 있어."
다른 부분도 아니고 오늘은 안 된다는 민희의 말에 담긴 의미를 동팔은 알고 있었다.
'민철이 형, 지금 잘 하고 있으려나?'
이틀 동안 함께 지내는 사이, 민철은 민희에게 단기 속성 교육을 받았다. 과목은 '내 여자를 위한 이벤트'.
특히 지예가 좋아할 만한 이벤트의 준비였으니 민철은 평상시에 발휘하지 않던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는 민희를 착실하게 따르며 준비하고 있었다.
깜짝 이벤트니 그걸 당사자인 지예에게 말할 수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나중에 감회 같은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러면 됐어. 그럼 난 오늘은 빨리 가볼게. 오늘은 할 일이 많으니 미리 해 둬야지."
할 일은 동팔의 인터뷰를 기사로 미리 작성하는 것이었다.
다른 기자들은 경기 후 동팔의 인터뷰를 전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지예는 지금 인터뷰한 내용까지 추가해서 기사를 작성할 수 있었다.
이 내용은 오직 지예만이 작성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있는 신문사에선 이미 지예의 기사를 따로 관리하고 있다. 다른 신문사의 기자가 출처를 밝히지 않고 사용할 경우, 법적으로 단단히 따질 수 있었다.
이번에 하는 인터뷰를 위해 투자한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조치였다.
지예가 오가는 모든 이동 비용과 체류 비용은 전부 신문사에서 나오는 돈이었다. 그녀의 기사를 지켜야만 그 이상의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안 그러면 지예의 기사의 특수성이 사라져, 받아 적기만 하는 기사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동팔에 대한 기사는 다른 기자가 아닌 지예의 기사를 먼저 찾아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더욱더 관리와 보호의 필요가 있었다.
지예가 가자 다른 선수들이 다가와서 물었다.
"캉. 나 잘 몰라서 그러는데, 저 아가씨와 많이 친한 것 같더라. 혹시 잘 아는 사이야?"
"설마 기자이면서 와이프?"
아직 지예를 모르는 선수들이 많았다. 훈련할 때 종종 보이는 미인 기자라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훈련 중이라 먼저 가서 말을 걸거나 대화를 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감독과 코치와 종종 대화를 하지만, 선수 중에서 지예와 대화를 편하게 하는 사람은 동팔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처음부터 동팔의 메이저리그 생활과 인터뷰를 위해 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대화하지 못한 나머지 선수는 머릿속으로 그녀가 누군지 추측만 했다.
"와이프 아냐. 누이 같은 사람이야."
누나라는 말을 대체할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그렇게 설명했다.
"얼마나 알고 지냈는데?"
"내가 프로에 입단하기 1년 전이니까… 한 2년 정도? 내가 재활하던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취재해 왔어."
"오~ 그래?"
어쩌면 동팔의 과거를 알아낼 루트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팔의 아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혹시 애인 있어? 남자친구나."
한 선수의 물음에 동팔은 그에게 대답했다.
"있어. 이전부터 사귄 사람이."
"아… 그래… 그건 조금 아쉽네."
아쉽다. 하지만 그것은 포기의 의미가 아니었다.
'이전부터 사귀었다면 분명히 한국에서 사귄 거겠지? 출장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많이 외로울 것이고… 내가 그 틈을 파고들면… 충분히 가능해.'
한국이 살기 나쁜 곳은 아니지만 한국인들은 대체적으로 미국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얼추 들었다. 그리고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미국인과 결혼하면 자동적으로 영주권을 얻게 된다.
지예가 사귀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상황과 여건은 자신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무엇보다 자신은 메이저리거가 아닌가. 잘 나가는 기업의 오너가 아닌 이상, 젊은 나이에 그보다 돈을 잘 벌 직장은 거의 없었다.
있다면 미식축구선수나 농구, 아이스하키에서 자신과 동급의 수준을 가진 선수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단번에 찍어 눌러주지. 단번에…….'
그는 아직 민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당연히 그의 얼굴도 알 수 없었다. 직접 보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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