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뉴욕시 주변에 있는 동팔이네 집.
그곳에 큰 캐리어를 끌고 온 민철이 도착했다.
"하이."
미국에 왔으니 미국식으로 인사하는 민철. 그리고 민철의 인사에 민희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민희의 말에 민철은 민망해 하며 말했다.
"헬로우나 하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어차피 같은 한국 사람끼리 뭐 하러 영어를 해요. 그런데… 짐은 그게 다예요?"
"응. 그런데 집 좋다. 얼마짜리야?"
집으로 들어온 민철이 감탄을 했다.
그러자 민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들으시면 놀라실 거예요."
"왜? 비싸?"
"아뇨. 생각보다 싸거든요. 땅이 넓어서 그런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서울과 비교할 건 없죠. 나중에 구장 주차장을 보시면 아실 거예요. TV에서 보는 거랑 느낌이 달라요."
민철은 일단 작은 방에 짐을 갖다놓았다.
"미안하지만 잠시 신세 좀 질게."
"얼마든지요. 그런데…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뭔데?"
"굳이 오빠 첫 선발 등판할 때 언니를 만나야 해요? 차라리 지금 만나서 같은 호텔에 있는 것이 더 낫지 않나요? 그러면……."
더 자주 만날 거라는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민철은 민희의 말에 실수하고 말았다.
"알지. 그러면 확실히 숙소 비용이 줄어드는데."
"네? 숙박비가 줄어들어요? 왜요? 아, 설마……."
호텔의 경우 인원수로 가격이 결정되지 않았다. 보통 방을 기준으로 투숙 비용이 결정됐다.
그러니 두 사람의 숙박비가 줄어든다는 것은 단 하나. 같은 방에 지낸다는 것.
민희는 남녀가 같은 방에 지낸다는 것의 의미를 결혼 이후로 더 자세히 알고, 느끼고 있었다.
민희의 얼굴에 붉게 타오르자 민철은 크게 당황했다.
"아, 저기… 그게 말이야……."
"아뇨. 하긴 두 분 나이가 저희보다 좀… 그러니까… 그러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애인 사이의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이야기하진 않았다. 여자들 사이에서 성적인 이야기를 하려면 술에 취했거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튀어나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무리 애인 사이로 공인되어도 할 수 있는 말의 수위가 어느 정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민철과 지예의 사이를 알고 있는 민희라도, 민철의 말실수에 당황했던 것이다.
서로 어색해진 상황에 민철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
"동팔이 선발이 며칠 뒤지? 한 닷새 뒤던가? 서울에서 확인하고 여기 와서 다시 계산하자니 조금 헛갈리네."
"아, 네… 맞아요. 닷새 뒤에요."
"그리고 영살, 아니 영상 볼래? 스틸러스 애들이 동팔이한데 보내는 응원."
애써 숨기려 해도 민철 역시 당황하고 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의 말실수에도 민희는 놀리지 못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네……."
그래서 졸지에 두 사람은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 민철이 꺼낸 패드를 봤다.
두 사람의 거리는 꽤 많이 떨어져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이 부부는 아니니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적어도 패드에 저장된 동영상을 보려면 어느 정도 붙어야 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는 두 사람이나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처음에는 민철이 엉덩이를 떼며 살짝 다가갔다.
다른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동영상을 편하게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민철이 가까워진 만큼, 민희가 그만큼 거리를 벌렸다.
"……."
"……."
덕분에 잠시 잊을 뻔한 어색함이 다시 느껴졌다.
민철은 민희의 행동에 무언가 억울하고 야속했지만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받아들여야 했다.
'그 이야기를 방금 전에 듣고, 넓은 집에 남자 한 사람과 여자 한 사람… 아무리 믿는 사이라도 지금은 가까이가긴 좀 그렇겠지?'
지금 두 사람이 거리는 정확하게 민철의 팔보다 살짝 더 길었다.
만약 민철이 민희에게 흑심을 품고 덮치려 할 경우, 첫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거리였다.
물론 그럴 일이 없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
적어도 이 공간에 누가 찾아오지 않는 이상, 이 어색함과 긴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이가 좀 있는 민철은, 포수 출신이라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일단 동영상을 찾아서 보여줄게."
민철이 그 말을 하고는 다시 민희와 조금 떨어졌다. 그리고 동영상을 재생시킨 다음, 다가가지 않고 오직 손과 팔만 움직여 패드를 민희 앞에 두었다.
민철이 팔을 뻗는 바람에 민희는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방금 전보다 더 멀어지자 조금은 안심하고 동영상을 봤다.
[민철아. 그리고 제수씨. 안녕허냐? 너랑 함께 야구한 스틸러스다. 잊지는 않았제?]
작정하고 응원했는지 이들은 나름 오와 열을 맞추어 열렬한 응원가와 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각자 가지고 있는 동팔의 사인 볼을 보여주었다.
[니 기억나제? 스틸러스 떠나고 1부 팀인 우랑우탄에 가기 전에 말이여. 그때 니가 준 싸인 볼 여전히 가지고 있다.
마. 고작 2년도 안 되었으니 잊어버리면 내도 섭하고, 니도 섭하겠지. 다른 얼라들이 니랑 야구했다고 말하면 전부 안 믿는다 안 카나? 그라도 이렇게 싸인 볼이랑 그때 찍은 사진 보여주면 찍 소리 못 한데이. 그러다 나한데 사인볼 달라카기도 하고. 물론 내 이걸 줄 리가 있나.]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이후에 스틸러스 사람들의 응원이 이어졌다.
[그라고 지금 네가 그때 한 말이 생각나드라. 언젠가 프로에 다시 복귀하고, 나중에 메이저 가가 선발투수로 우뚝 서고. 그리고 나서 월드시리즈 우승하겠다는 니 포부 말이다.]
[그런데 고작 2년 만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줄 알았나. 장하다 장해. 하하하!]
[맞다. 참말로 장해. 그래도 말이다… 우리들은 니가 잘해서 자랑스러운 게 아이다. 그냥 네가 좋다.]
[네가 보인 야구에 대한 열정을 볼 때마다 마음이 타는 것 같이 아프기도 했지만, 동시에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보다 어려도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메이저가 보통 무대는 아니라 쉽지 않겠지만… 뭐, 성적이 안 좋으면 어때? 그래도 넌 우리한테 우리 자랑이다! 그러니 몸 상하지 말고!!]
[꿈을 향해 달려가. 우리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응원만 하고 있지만. 화이팅.]
[아, 그리고 제수씨도 화이팅. 동팔이 이야기하다 보니 제수씨 응원을 안 했네.]
[동팔이가 한눈은 팔지 않겠지만 바로 옆에서 도와주니 감사합니다. 혹시 필요한 것 있으면 부탁하고요. 몸은 가지 못해도 택배는 가니까. 하하하.]
이어지는 스틸러스 사람들의 응원.
비록 그 응원의 대부분이 동팔을 향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을 느껴지자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민희의 눈물에 민철은 방금 전과 다른 의미로 당황스러웠다.
"이거… 휴지가……."
그로서는 동팔과 민희의 집에 처음 왔으니 휴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화장실에 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그는 구조와 위치를 보고 어림짐작하여 화장실을 빨리 찾았다.
"민희야. 여기……."
"고마워요……."
민철이 준 휴지로 겨우 눈물을 닦은 민희가 일어나서 민철에게 말했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 아직."
"어머! 내 정신 좀 봐. 금방 준비되니까 기다려주세요."
"어차피 곧 점심이니까 간단하게 부탁할게. 빵이랑 우유 정도면 충분해."
"다행히 아침에 준비하다가 남은 게 있네요. 데워드릴게요."
그렇게 말해도 정말 간단하게 줄 생각은 없었다.
빵만이 아니라 곁들어 먹을 수 있는 슬라이스 햄, 계란 프라이 정도는 끼워줄 생각이었다.
아무리 장기 출장을 온 김에 왔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직접 전하기 위해 온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 영상 덕분에 방금 전의 어색함이 사라졌다.
***
시간은 흘러 어느새 메이저리그 개막전이 시작되는 날이 되었다.
동팔은 오늘 집을 나와 호텔로 간 민철을 배웅하고 구장으로 출근했다.
가기 전에 민철은 동팔과 민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거 눈치 없이 신혼집에 오래 있었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지예랑 결혼하면 우리 집에 놀러와.'
아직 결혼이 확정된 것도 아닌데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확정짓고 있었다.
그가 오래 있었다고 말을 했지만 그가 두 사람의 집에 머문 기간은 고작해야 이틀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두 사람의 밤이 불타지 못하게 한 것이라 민철은 가능한 빨리 집을 나와주었다.
민철의 생각과 배려와 달리, 두 사람은 그가 생각보다 빨리 집을 나오자 아쉬워했다.
그건 그거고, 오늘은 개막전이 있는 날.
한국에서 처음으로 프로에 데뷔했을 때와 달리 확고한 3선발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니 동팔이 불펜으로 올라올 일은 없었다.
지금은 메이저리그의 한가운데 서기 전, 분위기를 직접 겪기 위해 나오는 날이었다.
그리고 동팔에게 아쉬운 것이 하나 있었다.
'아메리칸 리그는 지명타자 제도지? 투수가 타석에 설 일이 없다는 건데…….'
타격 훈련을 해 왔던 것은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 어느 리그에 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동팔이 내셔널리그의 팀에 들어왔다면 9번 타순에 배치되었을 터. 그러면 그동안 노력하여 쌓은 타격 실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내보내 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리 경쟁이 치열한 메이저리그인데 굳이 그 자리를 내가 또 차지할 필요는 없겠지. 급한 것도 아니고, 지금은 투수로서 적응이 먼저니까.'
이미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적응은 거의 끝났다.
사실상 오늘의 할 일은 없으니 동팔도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상황은 항상 예상외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위협구에 두 선수 맞붙습니다!]
[개막전부터 벤치 클리어링이라니!! 시작부터 보통이 아닙니다!]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나면 직접 경기에 뛰지 않는 선수라도 무조건 뛰쳐나와야 했다. 어떤 구단은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날 때 나오지 않으면 벌금을 내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장면은 마침 중계를 보고 있던 한 아이의 눈에 바로 들어왔다.
"아빠. 벤치 클리어링! 벤치 클리어링이에요!"
잠시 화장실에 갔던 지미의 아빠가 아들의 말에 서둘러 끊고(?) 나왔다. 그러자 정말로 치고 박으려는 투수와 타자가 보였다.
또한 두 사람의 사이와 주변에선 싸움을 말리기 위해 달려든 양 팀의 선수들과 코치들, 감독도 있었다.
"왜 싸우는데?"
"공이 위험하게 왔다면서 싸운다는데요? 얼굴 바로 앞에 100마일의 공이 날아왔어요."
"그럼 싸울 만하구나. 그래도 지미. 웬만하면 넌 싸우지 마라. 몸이 다치면 손해야. 물론 빼앗는 것이 아니라 뺏기지 않기 위해 싸우는 건 이 아빠가 지지하마."
아빠의 말을 들은 엄마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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