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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이 없다면 만들어야지. 볼 배합으로 속이려 해도, 거기에 당하지 않으니 결국 정면승부를 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거의 대부분은 맞아. 그러니 팀을 위한 선택을 하자면 무조건 볼넷. 그것도 고의 볼넷밖에 없어. 하지만… 그 선택을 하는 건 쉽지 않을 거야. 미국의, 그리고 메이저리거의 자존심이 있는 이상."
강타자를 상대로 투수가 고의 볼넷을 주면 어느 리그를 가더라도 그 선택을 한 모든 사람이 야유와 욕을 얻는다.
당연히 뛰어난 실력을 지녀야 밟을 수 있는 메이저리그라면 더 심하다.
고의 볼넷을 얻었다는 건, 타자의 실력을 인정받는 것이 되지만, 투수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것도 된다.
그런데 그걸, 자신보다 하위 리그라 생각하는 선수에게. 그것도 처음 상대하는 타자를 상대로 하리란 건 예상하기 어렵다.
"그래도 기록을 보면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으니 고의 볼넷은 주지 않겠지. 하지만 정면승부가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으면 선택은 뻔하잖아. 바로 속이는 거야."
동팔의 말에 지완이 물었다.
"그럼 동욱이 속을까?"
그러자 동팔이 간단히 답했다.
"우리 공에도 안 속는데, 속겠냐? 속으면 우리한테 두들겨 맞아야지."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이미 이 정도는 동욱이도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상대방의 의도를 알고 있는 이상, 절대로 속지 않을 거다."
"그럼 혹시 정면승부를 선택한다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다른 투수의 물음에 동팔이 확신하며 답했다.
"그럼 당연히 우리에게 좋죠. 최소 장타. 어쩌면 홈런도 가능합니다."
***
동팔이 말한 것은 게리 존슨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첫 대결을 하는 지금, 정면승부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볼넷을 줄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스트라이크는 위험해. 강속구 승부는 피하는 것으로 하자. 속일 수 있는 걸로 속이는 것으로…….'
굳이 위험한 일을 자청할 필요는 없다. 일단 견제하는 의도로, 그리고 자신의 뒤에 올라올 불펜과 마무리 투수를 생각해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야 했다.
거기에 앞으로 리그에서 마주치게 될 것이니 그 전에 직접 상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게리 존슨은 이번에 던질 공을 준비했다. 그의 주력구는 100마일에 달하는 강속구. 거기에 타이밍을 빼앗는 체인지업. 그리고 느리지만 바로 앞에서 떨어지다시피 하는 포크볼이었다.
어설프게 익힌 공으로 던졌다가 제구가 되지 않아 실투로 이어질 수 있으니 던질 수 있는 구종은 저절로 제한되었다.
그리고 동욱도 자신의 실력만 믿고 방심하지 않았다.
'게리 존슨. 강속구를 비롯해 뛰어난 제구력을 지닌 투수. 확실히 메이저리그 투수 중에서도 뛰어나. 하지만…지금 던질 수 있는 공은 포크볼이 전부야. 강속구 승부를 피할 가능성이 높고, 체인지업은 속구를 던진 다음에나 유용한 구종이니까.'
메이저리그든, 어느 리그든지 간에 자신이 확실하게 던질 수 있고, 컨트롤 할 수 있는 구종이 많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뻔히 예상되는 공이라도 치지 못하게 던지면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
많은 구종을 섭렵하려다, 전부 이도저도 되지 않아 두들겨 맞는다. 이도류보다 일도류가 더 낫다는 검도계의 말도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만으로는 안 되겠지만, 확실히 던질 수 있는 구종이 셋 정도만 되어도 뛰어난 활약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동욱을 상대로 던질 수 있는 구종의 한계는 위험하다는 것을 게리 존슨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한동욱은 처음부터 그가 던질 공의 구종을 확신했다.
'빠른 공은 무조건 직구, 느린공은 거의 포크볼.'
그가 생각하는 확률은 99%. 하지만 무조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공의 회전을 보면 더 확신할 수 있어.'
예상을 끝나고,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예상대로 게리 존슨이 공을 던질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 그리고 그에 맞추어 배트를 휘두르는 것이다.
스윽~ 휙~!!
게리 존슨은 자신의 장기인 포크볼의 그립으로 잡고 던졌다. 그가 던진 포크볼의 속도는 135키로. 분명히 빠르고 정확히 날아오는 공이었다.
하지만 이미 오타니의 150에 달하는 포크볼을 직접 상대해 봤기에 어려운 공은 아니었다.
흐읍.
이미 공을 던지기 전에 호흡을 정리한 한동욱은 공의 회전을 통해 공의 궤적을 예상했다. 그리고 포크볼이라 거의 떨어지듯 날아가기 때문에 휘두르는 방향은 아래에서 위로 퍼 올리는 쪽. 그리고 맞추는 포인트를 더 앞으로 상정하고 휘둘렀다.
따악~!!!
초구를. 그것도 빠른 직구가 아닌 포크볼임을 예상하면서도 배트를 휘둘렀다. 그리고 자신있게 휘두른 배트는 정확히 스윗스폿에 조금 벗어났다.
그러나 힘으로 밀어 붙이면서 타구의 비거리를 늘려버렸다.
"오~, 오~, 오~."
"간다, 간다, 간다. 넘어간다!!"
경기장에 있는 모든 과중들, 그리고 선수들은 날아가는 타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비록 노리고 쳤다지만, 포크볼이라 제대로 된 힘을 싣는 것이 쉽지 않아 아직 알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외야수가 열심히 뛰어가며 어떻게든 한동욱의 타구를 잡으려 했다. 그리고 달리던 상태에서 뛰어 올라 글러브를 낀 손을 높이 들었다.
타구와 중견수의 글러브가 거의 일치하는 곳으로 가자, 관중들과 선수들. 특히 공을 친 한동욱도 시선을 지중했다.
휙~.
하지만 공은 손가락 하나 차이로 글러브 위를 스쳐지나갔다. 중견수가 열심히 달려갔지만, 잡지 못하고 허탈해하자, 이제야 안심하고 기뻐하며 루상을 도는 한동욱.
그리고 그가 더그아웃으로 돌아오자 감독과 코치들, 선수 전원이 기뻐하며 반겨주었다.
"이번에도 한 건 했네!!"
"결국 네가 미국을 상대로 쳤구나!!"
"축하한다!!"
먼저 점수를 냈으니 당연히 한국이 유리해졌다. 그리고 이 한 점을 동팔과 지완이 어떻게든 지키기만 해도 우승은 확정된다.
그 이후, 한동욱의 홈런에 흔들린 게리 존슨은 이어지는 한국의 타자들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1점을 더 실점하고 2회초를 마무리 지었다.
***
미국의 공격은 강동팔이라는 철벽에 막혀 변변한 공격하나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선수들과 다른 실력을 증명하듯이 다른 때보다 동팔을 더 빨리 마운드에서 내려오게 만들었다.
"겨우 5이닝까지라니… 더 던질 수 있는데……."
동팔은 굳이 회복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이 이상 충분히 던질 수 있었다. 거기에 전과 달리 더그아웃에서 쉬는 동안 회복시킨다면 9이닝을 넘어 연장까지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규정에 의해 투수는 80개 이상의 공을 던질 수 없었고, 규정된 숫자를 거의 채우자 남궁지완과 교대했다.
동팔의 푸념에 편히 보며, 바로 앞에서 직관하는 투수들이 말했다.
"역시 동팔이야. 메이저리그의 강타자들을 상대로 그런 말을 다 하고."
"나라면 아무리 잘 던져도 3이닝도 힘들었을 텐데."
이미 동팔에 대한 대비를 했는지, 미국의 타자들은 평상시와 달리 초구에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공을 3개 이상 던지게 하기 위해서 2개 까진 지켜보다가 좋은 공이나, 예상한 공이 오면 주저하지 않고 배트를 휘둘렀다.
그 중에 절반은 배트에 맞아서 파울이 되거나, 일부는 안타가 되어 출루를 허용하고 말았다.
한국에서와 달리, 메이저리거를 상대하자 생각보다 많은 피안타를 기록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5이닝 동안 4개의 안타를 허용했을 뿐, 볼넷은 없었다.
그러니 예상보다 투구 소모가 심해졌고, 결국 5이닝을 마무리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이젠 6회초가 되어 남궁지완이 동팔을 대신하여 마운드에 올라갔다.
지완을 보며 더그아웃에 있는 다른 선수들이 말했다.
"지완이도 많이 성장했지. 그래도 마지막 결승전에 남은 투수가 자신밖에 없는 상황인데 중압감을 잘 버틸 수 있을까?"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지완이 이 자리에 없어서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동팔과 비교하면 무게감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들의 말에 동팔이 말했다.
"던질 수 있습니다. 지완이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어요. 상황이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생각보다 승부욕이 강한 녀석이거든요."
그건 동팔이 직접 경험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지난 일이라지만, 자신을 향한 승부욕이 과열되어 혜진을 노렸고, 결국 결혼까지 했다.
거기에 이전부터 동팔을 이기기 위해 절치부심 노력하였고, 심지어 악마와 계약을 하고 말았다.
결코 동팔에게 지지 않겠다는 처절한 의지가 있는 이상, 남은 4이닝을 더 완벽하게 막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동팔의 생각대로 남궁지완의 각오는 다른 때와 달랐다.
'쳇, 이왕이면 동팔이가 4이닝 만에 내려오고 내가 5이닝을 막는 게 더 좋은데…….'
아쉽겠지만, 이건 제비뽑기를 잘못한 자신의 책임이었다. 당시 동팔의 양보로 자신이 먼저 뽑았는데, 선발이 아닌 불펜이라 적힌 것을 뽑았다. 그리고 다음에는 동팔이 뽑을 필요도 없이, 감독이 손을 펴자 선발이라 적힌 패가 있었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조작이 아니란 것이 확실하니 변명의 여지도 없다. 그리고 동팔이 5이닝을 어떻게든 무실점으로 틀어막자 지완은 생각했다.
'피안타는 적어도 3개 이하. 볼넷은 무조건 허용 불가….'
이번에 4이닝을 감당하게 되면서 당연히 완벽하게 방어할 생각이다. 그리고 방금 전, 동팔이 한 투구보다 더 좋은 내용으로.
"후우……."
그렇다고 무리할 생각은 없다. 괜히 의욕이 넘쳤다가 무리해서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니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스윽~ 휙!!
지완은 먼저 100마일에 달하는 강속구를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는, 바깥 아래쪽을 향해 꽂아 넣었다.
공을 던지면서 지완의 몸은 강한 힘으로 인해 부담을 느끼며 작은 비명을 질렀다.
한계에 다다른 힘을 내기 위해 지완의 근육과 힘줄은 급속도로 많은 피가 몰렸다가 흩어진다. 그리고 관절의 인대는 한 순간에 가해진 과부화로 인해 겨우겨우 끊어지지 않고 버텼다.
몸의 피를 돌리는 혈관도 갑자기 강해진 혈압에 순간 부풀어 오르다가 진정된다. 하지만 그 순간들이 너무 짧아 지완은 느끼지 못했다.
몸의 한계를 느끼면서 강속구를 던진 이유가 있다.
이미 동팔이 100마일의 강속구를 뿌렸다. 그러니, 더 낮은 속도의 직구는 메이저리그 타자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지완의 빠른 공에 타자는 칠 생각이 들기도 전에 공이 포수 미트에 꽂히는 걸 봐야만 했다.
쉭~퍽!!
"스트~롸잌!!"
준결승 때와 달리, 스트라이크 존은 두 팀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그리고 이번 공을 본 타자는 생각했다.
'젠장, 초구 공략을 자제하지만 않았어도…….'
하지만 동팔과 동급이라 평가받는 지완을 상대하기 위해선 규정에 의한 투구 숫자의 한계를 이용해야 했다.
지완이 내려가면 앞의 두 사람보다 뛰어난 투수가 한국에는 없다. 그러니 적어도 8회말이 끝나기 전에 두 사람을 마운드에서 내리면 대역전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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