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그런데 그거 사실이야? 지완이 다른 악마도 아니고, 그 녀석이랑 계약을 한게?"
"맞아. 확실해.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인상착의도 같아."
"악마한테 인상착의가 무슨 소용이야. 심지어 천사로도 위장하는 존재인데. 그래도 이름이 같다면 확실하겠네. 적어도 계약할 땐, 본인의 이름을 정확히 말해야 하니까."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본 건데?"
동팔의 물음에 동욱이 자신의 의문을 말했다.
"이상하니까 그렇지. 너랑 나랑 계약을 한 건 같은 해야. 그리고 거의 비슷한 때였지. 하지만 악마는 계약의 서를 사용할 수 있는 것에 조건이 있다고 들었어. 그 중에 하나가 계약을 하고 일정 기간 동안 다른 존재와 계약할 수 없다는 거야. 약 2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더라."
"그럼 이상하지 않아? 네 말대로 너랑 나랑 계약을 한 시간 차이는 고작해야 한 두 달이 전부인데? 그런데 그거 누가 말했어?"
"내가 악마의 일을 어떻게 알겠냐. 당연히 웜우드지. 그 녀석이 그렇게 알려주니까 나도 네가 한 질문을 그대로 했어. 그러자 방법이 없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 5년 동안 계약하지 못하는 조건으로 연속 계약을 할 수 있다고 하던데."
동욱의 말에 동팔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정말 그 녀석을 믿을 수 있어? 결국 자신도 악마라는 거잖아. 둘이 서로 짜고 움직이는 거면 어떻게 할 거야?"
동팔의 물음에 동욱이 답했다.
"어떻게 할 방법이 있겠냐? 이미 우리는 시한부로 저당 잡힌 목숨이야. 그러니 최대한 저항할 수 있을 때까지 저항하는 거지. 이왕이면 완전히 벗어나는 거고. 다만 악마와 계약을 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웜우드의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란 말이지."
"그럼 그 녀석이 갑자기 잘 던지는 이유는 어떻게 된 건지 모른다는 거야?"
"적어도 계약의 힘인 건 분명한데… 확실한 건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 있다는 것 정도밖에 없어. 악마들의 일이니 인간인 우리가 아는 것엔 한계가 있잖아. 언젠가 다 같이 모여 있어야 무언가 해보는 건데, 그 녀석은 왠지 우리랑 거리를 두는 것 같고."
동욱의 말에 동팔은 내심 말할 수 없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녀석이 나를 이기려고 악마와 계약했으니 당연하겠지. 그러면 나랑 지완이는 결국 끝까지 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제일 잘 풀리는 것이라면 각자가 순차적으로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기. 또는 3년 안에 같은 팀에 소속되어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완이 동팔과 끝까지 겨루려한다면, 같은 팀에 있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실. 아무리 선수의 영입이 구단의 입김과 의지에 좌우되지만, 선수가 싫다고 버티면 버리든가 받아들이든가 두 가지 선택밖에 남지 않는다.
"일단 WBC를 대충 3위 안으로 마무리하고, 셋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면 어떻게든 또 방법이 있겠지. 확실한 건 우리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면 풀려나는 거잖아."
"그래. 지금은 그게 우선이니까. 우승이면 좋지만, 군대 문제 생각하면 3위 안에 드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지. 그래도 월드시리즈 우승보다는 쉬울 거야. 사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부상을 최소화 하려고 하니, 걸린게 많지 않은 WBC에는 가능한 출전하지 않으려고 해. 구단도 마찬가지고."
애써 비싼 값으로 선수를 데리고 왔는데, 요상한 세계 대회에서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이 된다면? 그 손해를 어딘가에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선수와 구단 모두 심각한 손해를 보게 된다. 특히 실력을 인정받아 몸값이 높은 선수일수록 타격은 더 심각해진다.
높은 위험에 높은 이득이 있다면 모를까, 얻는 것도 많지 않은 곳에 뼈아픈 타격을 받으러 자청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얼추 정해진 선에 맞추어 적당히 할 생각인 동욱과 달리, 동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실상 메이저리그 협회에서 주관하니 싫다며 대놓고 말할 순 없겠지. 모두가 WBC에 안 나가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들 정상급 선수가 생각보다 많은 것도 아니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잖아. 그리고…여기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은 어떻게 하냐? 그리고……."
"그리고……?"
"무엇보다 지는 것 따위 싫어."
동팔의 본심이 드러난 적나라한 말이었다. 하지만 동팔의 말에 동욱은 시큰둥했다.
"지는 건 나도 싫다. 하지만 네 말대로 항상 이길 수 있는 건 아냐. 시간과 에너지엔 한계가 있고, 우린 가능한 그걸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해."
***
이적과 계약의 시간이 끝나면 각 구단은 휴식기를 거친 후, 스프링캠프가 시작된다.
팀이 빨리 꾸려진 경우는 다른 팀보다 더 빨리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시작하는 시간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리고 이번에는 WBC를 준비하는 훈련이 있는 해.
차출되는 선수는 각 구단에서도 자신의 자리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는 선수들이다.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가 아쉽긴 하겠지만, 한국은 세계 대회에서의 성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크다.
그러니 훈련을 할 때에도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예선 1라운드가 한국의 고척 돔구장에서 진행되지만, 그 사이 훈련은 따듯한 남쪽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2월 중순부터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훈련장에서 훈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까앙~!!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날아가고, 그 공을 잡기 위해 선수들은 몸을 날린다. 그리고 강도 높은 훈련을 마치고 나면, 당연히 꿀맛보다 더 달콤한 휴식시간이 주어진다.
"으아~ 미치겠다. 스프링캠프보다 더 한 것 같다."
"그러게요."
그 말을 한 선수는 주변을 돌아본다. 그리고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했다.
"역시 군 면제가 걸려 있어서 그런가? 젊은 애들이 정말 열심히 합니다."
"하긴 나 같아도 이번에 잘 하면 2년 세이브할 수 있는데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그런데 동팔이랑 동욱이는 이미 현역 복무한 거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땐, 두 사람 모두 주목을 받기 전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던데요. 동팔이도 그렇지만, 동욱이도 어떻게 보면 운이 좋은 거죠. 유망주도 아닌데, 군대 갔다 와도 다시 받아주는 곳이 많진 않잖습니까."
"그래도 이번에 합법적인 병역 브로커 아니야. WBC는 이름값에 비해 메이저리그 출신 선수가 많진 않으니 우리도 우승을 노릴 수 있잖아. 메이저리그 협회가 피파의 월드컵을 따라 만들었지만, 역사도 짧고, 우승해도 특별한 명예의 무게도 가벼우니까."
아무리 몸값이 천문학적인 축구선수라도 국가대표가 되어 월드컵에 출전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한다.
반면 메이저리그 선수는 같은 입장이라도 야구의 월드컵과 같은 WBC에 나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단에 소속되어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는 것을 더 큰 명예이자 팀 전체가 추구하는 최종적인 목표다.
"그래도 올림픽보다 WBC에서 두각을 나타내야 메이저리그로 진출할 기회가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메이저리그의 투수와 타자에게 통하는 선수라면 결국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한다는 의미니까요. 이 대회에선 특급 선수가 잘 나오지 않아도, 결국 메이저리그는 메이저리그 아니겠습니까."
월드컵도 그렇지만, WBC도 출전하는 선수들은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어 다음 시즌에 주전으로 활약할 발판을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이는 연봉협상의 고지에서 더 높은 위치를 선점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대진표 정말 이상하게 짜여졌던데……. 이거 미국 애들이 자국팀 우승시키려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의 말에 다른 선수가 사실을 말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 실제로 우승한 경우는 없었잖아. 전부 다른 나라가 우승했지. 일본이 두 번. 도미니카도 한 번. 아쉽지만 우린 아직 준우승이 최고 성적이고."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선수들이 말했다.
"그래도 쿠바를 왜 꼭 우리, 아니면 일본이랑 같은 라운드에 넣어 버리냐는 거지. 그것도 예선 1라운드에. 쿠바는 오히려 미국이랑 가까우니까 거기랑 같이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리고 지난 대회에서도 그렇지만, 방식이 이상해서 어떨 때는 우리가 일본이랑 세 번을 만났던 때도 있었잖아. 그 외…우리가 준우승 했을 때. 그 전에 두 번 우리가 다 이겼는데 마지막에서 지는 바람에 준우승으로 끝났었지?"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온 이야기였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이 아무리 따지고 또 따져도 주최하는 쪽에선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나마 계속 이의를 제기하자 2라운드의 1위와 2위를 서로 교차하여 준결승을 치르게 한 것이 전부였다.
"여기서 그 이야기해서 뭐 하냐? 소용없는데. 그리고 설령 그런 미친 짓을 하더라도 그건 누워서 침 뱉기여, 침 뱉기. 계속 그렇게 하면 전 세계 리그가 아니라, 자기네들 리그로 끝내겠다는 거지 뭘."
"그리고 사실 이 대회에서 우승해 봤자, 좋아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 그렇게 권위있는 대회도 아닌데 뭘……."
지려고 경기에 임하는 선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에게 있어서 동기부여가 약한 것은 사실. 그러나 얼마 후에 이들이 전력을 다 하리라 결심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난다.
***
한편, 메이저리그 사무국.
곧 있을 WBC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아무에게 말할 수 없는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한국과 일본, 쿠바를 몰아넣긴 했지만, 지난번처럼 변수가 발생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지."
"설마 도미니카가 전승으로 우승할 줄은 누가 알았겠어? 거기에 요즘 젊은 것들은 애국심을 어디에 가져다 팔아먹었는지 전부 자기 몸 챙기기만 하고. 그것들만 나와도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인데 말이야."
"선수만 문제가 아냐. 구단도 문제가 많아. 선수가 원해도 구단이 허락하지 않으면 출전할 수 없으니까. 이건 어떻게 강제로 할 수도 없고……."
"그랬다간 우리 전체가 물갈이 될 것이 뻔 한데 어떻게 하나.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지."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것에 대한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규정을 만들 준비를 했다.
"이미 일본과 한국을 포함해서 다른 나라들은 여전히 대진표에 불만이 많으니 더 이상의 수정은 불가능할 거고… 이미 발표도 끝난 마당에 하면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거니 못 쓸 방법이야."
"그리고 대진 조작으로 우리 미국이 우승하는데 유리할 수 있지만,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면 조작질을 관두고 정정당당하게 대회를 치르는 것이다. 그것이 주최하는 쪽의 기본적이며 당연한 준비 자세. 하지만 이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해 둔 것이 있어. 일본을 제외하면 투수 자원이 약하잖아. 한국도 나름 괜찮고, 다른 나라도 좋은 투수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한 선수가 계속 던질 수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건 선수보호를 위해서 투구 숫자에 제한을 건 상태지? 그 규정은 있을 텐데 왜?"
그러자 먼저 말한 사람이 말했다.
"그 숫자를 조금 더 줄이면 돼. 한 5개 정도 더 줄이면 일부 나라를 제외하면 투수 자원이 많지 않아서 고전할 수밖에 없을 걸."
그의 말에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럼 결국 미국이랑 일본이 맞붙는 거잖아? 아, 그리고 한국에 뛰어난 투수가 있다고 들었었는데. 이름이 강동팔? 이번에 양키즈에서 영입했다고 들었어."
"아~ 자이로볼을 던질 수 있는 투수라고 했어. 한국은 이번에 상대하기 껄끄럽겠는걸. 그 전에 떨어지면 좋겠지만, 이번 선수 구성을 보니 일본과 나란히 세미파이널에 올라올 가능성이 높아."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럼 더욱더 투구제한을 해야 할 필요가 있겠어. 이왕이면 다양한 투수들이 공을 던질 수 있어야 기회가 돌아갈 것 아닌가?"
"그럼 어느 정도로 줄이는 것이 좋을까? 5개 더 줄이는 것으론 큰 영향력이 없을 텐데?"
"이번에 실험적으로 10개 줄인다고 나가자고. 더 다이나믹하게. 싫으면 던지지 말던가."
그 이외에도 다른 안건으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원하는 대로 이번 대회에 한해서 실험적인 의미로 투구 숫자를 10개 더 줄여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그들의 일방적인 발표는 다른 나라와 언론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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