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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인에게 있어 군대 문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였다. 휴전을 한 나라의 상황으로 인해 한국의 모든 성인남성은 국방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2년에 가까운 시간을 국가의 안보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선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간이다.
하루라도 훈련을 하지 않으면, 다른 선수들에게 뒤쳐지는 것이 현실. 그래도 다행이라면 혼자가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겪는 일이라서 상대적인 박탈감이 없다는 것.
하지만 이왕이면 면제를 받아 2년의 시간동안 훈련과 경험을 쌓아 치고 올라가는 편이 좋은 것도 사실이다.
선수를 할 정도면 몸이 튼튼하니 면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면 남은 방법은 올림픽에서 매달을 따 면제를 받는 것.
이전에는 올림픽 동메달 이상, 아시안게임 금메달만이 가능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법이 다시 개정되어 세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일정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대체복무가 가능하게 되었다.
야구에선 그 대회 중 하나가 WBC였다.
WBC의 기준은 전 세계 급의 대회이기 때문에 3등 이상이 되어야 했다.(*사실 지금 기준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만 대체복무가 가능합니다. 이 조항은 본 소설에서만 있는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참가자들의 승리 의욕을 불태우는 상급(賞給)인 면제와 같은 대체복무. 하지만 그것도 이미 군대를 다녀온 동팔과 동욱에게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는 동욱이라면, 굳이 WBC에 참가하지 않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동욱의 선택은 의외였다.
-그래도 참가할 생각이야.
"어? 왜?"
-어머니께서 내가 국가대표가 되는 걸 바라시거든. 솔직히 올림픽에서 야구가 다시 정식종목이 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언제 국가대표가 되어 보겠냐? 우리 이제 4년 후에 다시 뛸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
이들에게 남은 시간은 3년. 다음 대회를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 그렇구나. 알았어. 어차피 나도 참가하니까 잘 해보자."
그것으로 간단하게 통화를 마친 동팔. 그리고 다음에 전화를 한 사람은 지완이었다.
"역시 지완이 너도? 그래서 참가할 거야?"
동팔의 물음에 지완이 답했다.
-당연히 참가해야지. 나 아직 군대 안 갔다 왔다. 혜진이 두고 내가 어떻게 군대를 갔다 오냐?
"아… 생각해 보니 그러네. 너 군대 안 갔다 왔지……."
순간 동팔은 참가를 철회할까 생각했다. 그럼 지완이 군대에 가게 될 확률은 꽤 높아질 테니까. 그런데 그 전에 지완이 말했다.
-한국시리즈에서 날 아주 잘 속였지? 그러니 이번엔 네가 나 좀 도와. 그러니까 내 합법적인 병역브로커나 해라.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네가 있는 것이 우승할 확률은 더 높으니까.
지완의 재수없는 말을 듣자 동팔은 더욱 참가 의욕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의 기대를 저버릴 선택을 할 생각은 없었다.
"됐네. 내가 왜 너만의 병역브로커야. 모두의 병역브로커지."
***
각 구단의 영입과 트레이드의 보이지 않는 전투가 진행되는 사이, WBC에 차출될 국가대표의 선발 명단이 발표되었다.
명단에는 이미 사람들이 예상한대로 강동팔과 남궁지완이라는 최강의 원투펀치. 그리고 역대 최강의 타자인 한동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승까지 오를 경우, 보름 사이에 최대 8번의 경기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한 경기 정규 이닝은 9이닝.
보통 선발이 5일에 한 번 등판하는 것을 생각하면 한 두 명의 투수가 계속 던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투수 보호를 위해 WBC에선 한 경기 당 던질 수 있는 투구의 숫자가 정해져 있었다.
그러니 탄탄한 마운드를 지킬 투수가 많을수록 더욱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된다.
동팔과 지완이라는 강력한 투수가 있는 한국팀이었지만, 그 둘만 의지할 수는 없었다.
한편, 민희는 민희 나름 열심히 동팔을 위해 또 다른 전장에 서 있었다.
"아… 정말 여러가지 조건들이 다 있네……."
민희는 지금 메이저구단에서 온 계약서 전문을 살펴보고 있었다. 제일 먼저 눈이 가는 곳이라면 역시 포스팅 금액과 연봉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민희가 집중해서 보고 있는 것은 계약 금액이 아니라 조건이었다.
"투수인 오빠가 마이너로 갈 일은 없지만, 마이너 거부권은 있어야 해. 그리고 단순히 돈을 많이 쓰는 곳이 좋은 팀은 아니야. 내년에 과연 어떤 팀이 월드시리즈 우승의 가능성이 높은지 그걸 파악해야 하는데……."
월드시리즈 우승은 실력과 운이 동시에 따라줘야 가능한 업적이다.
하지만 민희이 입장에서 운의 요소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 남은 것은 팀의 주축이 되는 선수가 누구이며, 실력과 기록을 파악한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계약 조건을 확인해 나가고 있었다.
'일단 나에 대한 것을 이미 알았는지 배우자에 대한 우대 조건을 건 구단이 절반 이상……. 하지만 마이너거부권을 먼저 제안한 쪽은 없어. 하긴 불리한 조건을 미리 달아둘 필요는 없으니 당연한가? 또 제공하는 숙소나 집도 근처에 통역도 붙여준다고? 오빤 통역 필요 없을 텐데?'
동팔이 지완이나 동욱보다 더 유리한 것이 있다면, 야구와 관련된 실력이 아니었다. 바로 영어를 자연스럽게 할 줄 안다는 것.
회사에 있을 때, 업무적으로 일을 못해서 그렇지 외국인이 왔을 때 김 대리와 함께 유이하게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과장님도 대화는 가능하지만, 위의 두 사람만큼 자연스럽진 않았다.
"먼저 통역을 뺄까? 아니 날 위해서라도 있는게 나으려나? 아님 차라리 내가 부딪히면서 익히는게 더 나을지도. 그럼 이건 그냥 넘어가고……. 역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계약 금액인데……."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건 싼 제품일수록 품질이 떨어진다는 의미. 그런 인식으로 인해 몸값이 적다면, 실력도 없다는 잘못된 선입견을 주게 된다. 이는 동팔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고 난 이후의 행보에 걸림돌이 된다.
돈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과도하게 달라붙을 이유도 없다.
"계약 기간을 보면…확실한건 장기 계약은 어디에도 없어. 2년 계약이 기본이고 1+1이나 2+1이 최고인가? 하긴 아무리 한국 리그에서 날아다녀도 메이저리그에선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검증해 보겠다는 거겠지."
이 정도는 이미 예상이 되었다.
한국 프로 야구가 많이 성장했다고 보지만, 메이저리그보다 아래라는 건 항상 바뀌지 않는다. 실제로도 그렇지만, 민희가 싫어하는 건 다른 이유였다.
"그래도 전보다 격차가 많이 줄었는데도, 여전히 이전의 격차로 생각하는 곳이 많구나. 인식이 쉽게 바뀌는 건 아니지만……."
경제적인 번영을 이룬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아직도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한국은 여전히 전쟁 후의 폐허 상태에 있다는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그나마 한류라는 것이 있어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국은 지금도 폐허란 이미지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일수록 더 한 경우가 있었다.
한국의 경제발전과 현재의 격차만 해도 40년이 넘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인식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만큼 한 번 각인된 첫 인상이 바뀌는 것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가 어떻게 인식하던지 간에 억지로 바꿀 수 없으니 넘어가야지. 그걸 감안하고 협상을 시작해야 하는데……. 그래도 오빠가 자이로볼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투수라는 점이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오빠 실력에 비해 불리하게 시작했을 테니까……."
이미 민희는 메이저리그 각 구단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모으고 있었다. 그래서 월드시리즈 우승 후보로 손에 꼽히는 팀을 자체적으로 알아 봤다.
약한 팀을 강하게 만들어 우승하는 것도 좋은 이야기. 하지만 이야기와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어도 허구다.
그리고 지금 민희는 낭만에 빠질 여유가 없었다.
'이제 오빠한테 남은 시간은 고작 해야 3시즌이 전부. 그 안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려면 선수 구성만이 아니라 구단의 재정 상황도 파악해야 해. 안 그러면 중간에 와해되는 경우가 발생하니까.'
하지만 민희가 판단한 것과 세간의 판단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역시… 유력한 팀은 뉴욕 양키즈. 클리블랜드… 시카고 컵스랑… LA 다저스 정도……?"
누가 들어도 단번에 알만한 유명한 구단들이었다. 그만큼 투자를 하고 좋은 성적을 거두면 유명세는 저절로 따라온다. 그러니 유명한 구단일수록 월드시리즈 우승에 더욱 가까운 건 당연한지도 몰랐다.
"문제는…오빠의 몸값이 생각보다 많이 올라서, 오빠가 어느 한 팀에 들어가면 그 팀의 전력에 누수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이건 어느 팀에 입단해도 같은 결론이 나올까?"
그렇다고 계약을 헐값에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다급해도 무료봉사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오히려 이상한 의심만 받게 된다.
이런 저런 상황을 생각하며 여러 가지를 고려하게 되자 민희는 절로 이 말이 튀어 나왔다.
"으…머리에 쥐 날 것 같아……."
***
각자가 각자의 미래를 위해 다음을 준비하고 있을 때.
스크레이치는 어두운 숲 속에서 자신과 같은 악마들과 만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의 몸에 맞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 중에 한 악마가 물었다.
"유흥은 어떤가? 스크레이치.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한 녀석 건졌다면서?"
그는 겉으로 보면 인상 좋은 백인 목수였다. 하지만 그가 여기 있다는 건 그 역시 스크레이치와 비견되는 악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건졌지만, 성과는 좋지 않아. 더 많이 끌어들이려 했는데 자살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몰아세웠지만… 결국 그 녀석 하나로 끝났어."
스크레이치는 그 말을 하고 숲속에 있는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다른 악마가 말했다.
"아쉽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못 데려갈 영혼을 데려간 거니까 거기에 마음을 두자고. 우리가 직접 나타나서 계약하는 자들은 전부 순수하고 맑은 영혼이라서 그대로 두면 지옥에 가지 않을 환자(악마들은 사람들을 부를 때 이렇게 부른다)들 뿐이잖아."
악마들은 절대로 사람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규칙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악마의 모습으로 나와서 말을 하면, 과연 어느 인간이 악마가 하는 말을 듣고 믿을까? 그럴 바엔 차라리 주변 사람들을 조종하여 흔드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민희가 도박단에 납치되었다가 풀려났을 때처럼. 당시 스크레이치는 민희를 버리고 더 좋은 여자를 기다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동팔은 스크레이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악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마들은 그걸 알면서도 그들은 극히 일부의 사람에게 나타나 직접 계약을 한다. 그 이유는 있었다.
"네 말대로 민호준은 정말 깨끗한 영혼이었지. 나와 계약하기 전까진……."
스크레이치는 그 말을 하고 아주 작은 웃음을 지었다. 아주 만족스럽진 않아도, 최소한의 성과는 확보되었으니까.
악마가 직접 나타나 계약을 하는 이유는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이 힘든 영혼을 취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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