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지완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가는 동팔을 보며 생각했다.
'꼴 좋다……. 한 가운데 공으로 삼진이라니…….'
다른 타자들이라면 몰라도 동팔에게만은 삼진을 꼭 먹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보통 삼진으론 성이 차지 않았다.
이왕이면 삼구 삼진이면 좋겠지만, 선구안이 좋은지 볼은 걸러내었다. 그러니 삼구 삼진이 불가능하다면 그 다음으로 치욕스러울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한, 스트라이크 존의 한 가운데에 들어가는 공을 못 치게 하는 것.
'첫 타석에는 조심스러웠지만, 오히려 가운데 공을 못 치고 있어. 그럼… 그걸 최대한 이용해 줘야지. 타자의 약점을 공략하는 건 투수의 기본이잖아. 안 그래?'
지완은 동팔이 좋은 공을 치지 못하고 헛스윙 하는 이유를 간단하게 생각했다. 그건 중계진의 판단대로 생각이 많기에 생긴 일이라 보고 있었다.
특히나 아쉬워하는 동팔의 표정을 보면 더욱 기분이 좋았다.
'도발이라면 성공했어. 하지만…마침표를 찍을 능력이 없으면 소용없잖아? 어정쩡한 타격으론 내 공을 칠 수 없어.'
그 생각을 하며 남궁지완은 지금 이 순간을 즐겼다. 그리고 동팔을 슬쩍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타자로 나서서 쪽팔림을 자초해."
한편, 동팔은 겉모습과 달리 분통이 터지거나 하지 않았다. 동팔은 더그아웃에 들어가며 생각했다.
'이것으로 세 번째 타석. 이제 남은 기회는 단 하나…….'
동팔이나 지완이라고 해서 항상 완벽한 투구를 하지는 못한다. 무결점에 가깝다는 것이지 운이라는 요소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원치 않게 실책이나 행운의 안타로 주자가 나가기도 한다. 앞으로 남은 이닝과 순번을 생각할 때, 동팔에게 남은 기회는 그의 생각대로 단 한 번이었다.
***
어제.
동팔은 동욱이 말하는 유일한 방법을 말해주었다.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어. 바로 상대의 방심을 이용할 것.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방심 한 번에 무너지는 법이야.
"그건 알고 있어. 그럼 그 방심을 어떻게 유도할 건데?"
-그야 네가 얼마나 희생하느냐에 따라 달라져. 다른 선수도 아니고 투수인 네 타격 능력을 누가 높게 평가하겠냐? 그 전에 솔직히 말해서 네 타격이 주목받는 건 어디까지나 네가 투수라서 그런 거지, 객관적으로 보면 평범한 것 보다 낮아.
동욱의 정확한 지적. 그리고 그 사실이 의미하는 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너는 지완의 공을 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건 지완이도 알고 있어. 그러니 그걸 이용해야지. 아무리 빠른 볼이라도 이미 알고 있는 코스로 온다면 충분히 받아 넘길 수 있으니까.
"결국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공을 던지게 만든다… 그 말이지?"
-그렇지. 하지만 그만큼 네가 밑밥을 잘 깔아야 해. 그러면 확률은 올라가.
"밑밥?"
대체 어떤 밑밥을 깔아야 한단 말일까? 동팔의 물음에 동욱이 자신의 생각을 말해 나갔다.
-아, 그건 말이지…….
***
지금 RG의 임상훈 감독은 여전히 0대 0의 대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이번 한국시리즈 우승이 걸린 경기에서 피가 마르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거의 된 거 같지 않아?"
감독의 물음에 옆에 있던 코치가 답했다.
"네, 거의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교체하는 건 안 되겠죠?"
"그렇지. 어떻게 만든 함정인데. 자그마치 세 타석이나 희생했어. 그걸 무위로 돌릴 수는 없잖아."
그 말을 하면서 임상훈 감독은 방금 전, 남궁지완의 투구 내용을 떠올렸다. 그리고 남은 이닝을 보더니 코치에게 말했다.
"이제 중요한 포인트는 9회초, 아니면 10회초야. 그 사이 실점하지 않도록 신경 써."
그 이후로 RG의 공격은 물론 오성의 공격도 특급 에이스인 동팔과 지완에 의해 점수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어떻게든 상대 투수와 수비의 틈을 공략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양팀의 타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틈이 보이지 않았고, 설령 우연히 행운의 안타와 실책이 나와도 점수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10회초. RG의 공격에서 동팔이 또 타석에 들어서자 이젠 RG의 팬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또……."
"그렇게 헛스윙 하는데 왜 교체를 안 하는 거야?"
한 가운데 공도 치지 못하는 타자를 왜 자꾸 타석에 세우는지 이해할 수 없는 RG의 팬들. 그리고 이건 오성의 감독과 코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상훈이 미쳤나? 왜 자꾸 동팔이를 올려 보내지? 타격감이 제일 떨어지는 선수를?"
감독의 말에 코치가 답했다.
"분명히 뭔가 노리는 것 같은데 뭔지 모르겠습니다."
"한 가운데 공을 못 치니 그걸 노리는가 싶지만, 그런 것 치곤 너무 못 쳐요."
그들은 동팔이 한 가운데 공을 노리기 위해 함정을 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궁지완이 거의 실투성과 같은, 스트라이크 존의 한 가운데로 향하는 공을 던질 때마다 아찔했다.
하지만 세 번의 타석에서 번번이 좋은 공이 들어왔어도 계속 치지 못하자 이젠 안심하고 있었다.
"아무리 상훈이가 황당한 작전을 해도 이렇게 까진 아닌데…대체 뭐지? 단순히 팬서비스라면 이렇게 나올 애가 아냐……."
상대를 아니 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동팔이가 타석에 들어섰다고 해서 불안한 건 아니었다. 동팔이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때는 그가 타석에 설 때가 아닌, 마운드에 올라왔을 때였으니까.
"무승부로 가면 8차전이야. 쉽지 않겠지만, 그땐 동팔이가 올라오지 않으니 유리한 건 우리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번 7차전은 무승부로 간 다음, 8차전에서 승부를 보는 것이 더 나아보였다.
'적어도 타석에 서니 체력이 더 빨리 소진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동팔이 체력이 좋아. 어떻게 된 체력인지 원…….'
적어도 동팔이 마운드에서 내려오면 틈이 보이겠지만, 아직까지도 동팔은 그 자리에 있었다.
사람들은 동팔이 9회말까지 마운드에서 투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위가 떨어지지 않자 감탄하고 있었다.
"정말 체력 하나 쩐다, 쩔어!"
"전에도 보긴 봤지만, 어떻게 저렇게 던질 수 있지? 투구 숫자도 120이 넘어가는데……."
특히나 타석에 올라오며 쉬는 시간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니 더욱 놀라웠다.
사라들의 의심과 무시, 그리고 놀람의 시선을 한 번에 받으며 타석에 선 동팔.
지완은 이번에도 타석에 올라온 동팔을 노려보았다.
'이제 네 번째……. 그런데도 왜 자꾸 올라오는 거야?'
첫 타석 때는 미심쩍었다. 단순한 이벤트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두 번째 타석에 올라오자 지완은 의심했다.
'설마 날 방심시키려고? 일부러 한 가운데 공을 안 치는 건가?'
첫 타석 때도 그렇고, 두 번째 타석에서도 유독 한 가운데 공을 치지 못했다. 그러니 지완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세 번째 타석에서도 한 가운데 공을 치지 못하고 삼진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자 남궁지완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자식이 투수라고 생각이 많아선……. 단순했으면 이전에 안타나 홈런을 쳤을 텐데…….'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네 번째 타석이 되자 의심은 사라졌다. 오히려 계속 타석에 올라서는 동팔이 우습게 보였다.
그런 남궁지완을 모를 수 없는 동팔. 그리고 어제 동욱의 조언을 떠올렸다.
-방심을 유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선 앞선 타석을 버려. 네가 제일 잘 칠 수 있는 공은 무조건 헛스윙을 하는 거야.
동욱의 조언에 동팔은 당연히 이런 의문을 던졌다.
-그럼 너무 노골적이지 않아?
그러자 동욱이 말했다.
-당연히 처음에는 노골적이라 의심하겠지. 하지만 그게 계속되면 의심이 흔들리게 되고, 방심을 유도할 수 있어.
확실히 그것만 생각하면 그렇다. 그러자 동팔이 물었다.
-그럼 그 전에 좋은 공이 오면 쳐서 퍼 올리면 되지 않아?
그러자 동욱이 물었다.
-그 공이 오는 건 어떻게 알고?
-아, 그건…….
솔직히 말하면 모른다. 한 가운데 오는 공임을 알면 바로 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걸 알 수 없다. 특히나 남궁지완의 공은 빠르기 때문에 알아차리기가 더욱 어려웠다.
한 가운데 오는 척 하며 빠지는 변화구는 자신은 물론 지완도 충분히 던질 수 있다.
-분명히 좋은 공이 오겠지만, 그 공이 오는 때를 네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해. 하지만 그게 안 되니까 이렇게 사전 작업을 하는 거지. 앞선 세 타석은 버려. 네 번째 타석에서도 마찬가지. 좋은 공이 와도 모르는 척 하고 헛스윙을 해.
-응? 그러면 완전히 포기하라는 거야?
-당연히 아니지. 투 스트라이크까지 몰리면, 그때가 진짜 기회야!
지완이 던진 첫 투구는 한 가운데로 향하는 빠른 직구였다. 네 번째 타석에 들어서면서 계속 본 공이었기 때문에 동팔은 그 공의 궤적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잘 하면 칠 수 있는 공이었지만, 다음을 위해서 동욱의 조언대로 헛스윙을 했다.
휭~ 퍽!
"스트~ 라이크!!"
볼 카운트는 불리했다. 하지만 동팔은 불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동팔은 정신을 집중하며 생각했다.
'거의 완벽하게 보였어.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자신이 원하는 공이 왔을 때,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느냐 없느냐 였다.
한편, 관람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혜진은 짧게 감탄사를 질렀다.
"아, 설마……?"
혜진의 말에 옆에 있던 민희가 물었다.
"네? 혹시 뭔지 아셨어요?"
민희의 물음에 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마도… 확실하지 않지만…동팔이는 지금 한 가운데로 오는 공으로 유인하고 있어. 일부러 타석을 버려가면서까지……. 그래도 끝까지 교체되지 않은 것을 보면 감독님이랑 이야기를 끝냈을 거야."
혜진의 의견에 민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설마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민희의 말에 혜진이 말했다.
"아냐. 오히려 그래서 그 생각을 유도하기 위해 실행했을 거야. 리그 중이나 평상시에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지만, 지금이라면 어떤 수단을 써도 될 때니까. 그리고 지금 지완이의 공을 받아 넘길 타자가 없잖아. 그건 오성도 마찬가지고."
혜진의 말에 민희가 물어봤다.
"하지만…그럼 보통 타격 능력이 제일 좋은 타자에게 희망을 걸어야 하지 않나요? 솔직히 지금 타격 능력이 제일 떨어지는 사람은 RG에서 동팔오빠잖아요."
그러자 혜진은 확신하며 말했다.
"맞아. 동팔이의 타격 능력이 제일 떨어져. 하지만 그래서 그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타자이기도 해. 방심은…아무리 완벽한 댐이라도 무너트릴 수 있거든."
"네?"
두 여인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볼 카운트는 어느새 2스트라이크에 2볼이 되었다.
완벽하게 몰려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 혜진이 말했다.
"특히나 지금이라면… 많은 것이 걸려있는 상태라면 투수는 어떤 공을 던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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