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야. 너, 설마… 지완이 상대하는 것 좀 알려 달라고?
오성의 타자들 중에 만만한 타자가 없지만 동팔의 구위를 생각하면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이제 RG의 걱정은 남궁지완의 공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에 대해서이다.
2차전과 달라진 점은 남궁지완이 더 체력을 회복한 반면, 동팔은 12회까지 공을 던져 체력의 손실이 발생했다는 것.
동팔의 체력에 대한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지만 구단이 그걸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다시 투수전으로 가게 되면 두 선수의 체력이 제일 중요한 변수였고, 이후에 올라오는 투수들을 누가 더 빨리 공략하여 무너트리느냐의 싸움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동팔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 안에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설마… 너 정말로 지완이를 라이벌로 생각한 거야? 하긴. 지금 생각하면 그 녀석도 계약한 것 같지만… 왜 갑자기 의식하게 된 건데?
"그냥 그럴 일이 있어. 우리랑 달리 잃을 것도 많은 녀석이 계약을 했다는 것에 화도 나고, 정신 좀 차리게 할까 생각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아, 그래서 일단 찍어 누르고 보자? 그리고 네가 지완이한테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잖아. 이건 뭐…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지.
"앞뒤가 바뀐 거 아냐?"
―그럼 넌 똥 묻은 개가 되고 싶은 거야?
"그건 아냐."
어차피 악마와 계약을 한 사이에 누가 누구를 나무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동팔은 동욱이 왜 굳이 속담의 앞뒤를 바꾼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솔직히 네 심정은 이해가 돼. 모든 것을 가진 녀석이 주변에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에 화가 나겠지. 나라도 그러겠다. 단,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에 한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뭔가 말에 뼈가 있다?"
―그냥 그렇다는 거야. 그래서 알고 싶은 게 지완이 공을 어떻게 공략하느냐… 그거 맞지?
"그렇지."
―그런데 난 가능하지만 넌 불가능해. 그 이유는 너도 알잖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알기야 알지. 지완이 공이 안다고 해서 칠 수 있는 공이 아니란 것 정도는……."
머리로 알아도 그 공을 타격할 능력이 있어야 했다.
동욱도 그것이 안 되어 2군에서 전전하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지자 악마와 계약을 한 것이 아닌가.
―그걸 알면서도 나한테 물어보는 이유는 뭔데?
"그야… 너라면 혹시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넌 나 말고 지완이 공도 많이 쳐서 넘겼잖아."
동팔의 말을 들은 동욱은 순간 울컥했다.
'이 자식 뭐야? 뭐 이렇게 무책임하고 막무가내냐?'
자신을 높게 평가해준 것은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팔의 질문에 답해줄 의무도, 생각도 없었다.
―글쎄… 내 기준으로 방법을 말해줘봐야 아무 소용 없겠지.
"그렇지. 던질 수 있는 공을 전부 커트하고, 원하는 곳으로 던질 수밖에 없는 수법은 내가 많이 당했으니까."
하지만 그 방법은 그만큼 컨택 능력과 뛰어난 선구안이 갖추어져야 가능하다.
동팔의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절정을 넘어 초월한 동욱의 경지에 비하면 멀어도 한참 먼 상태였다.
―알고 있으면 됐다. 그런데 그냥 알려 달라고?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는 법.
"뭘 원하는데? 돈은 아닐 거고."
돈이야 많이 벌 예정이었다. 갑자기 부상을 당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에서.
동욱은 돈 말고 다른 것을 요구했다.
―조만간 광주에 놀러 와. 우리 엄마가 너를 보고 싶어 하셔서… 그냥 우리 집에서 밥이나 같이 먹자.
친구는 아니더라도 같은 입장에 있는 동년배 남자의 집에 가는 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전라남도 광주까지 가는 게 쉽지 않긴 했지만.
"지완이 공략법 하나를 아는 것 치곤 싸네. 알았어. 경기 끝나고… 조만간 거기로 놀러 갈게."
-그래.
"그래서 그 방법은 뭔데?"
한국 시리즈 우승자를 결정하는 7차전.
중요한 경기였기에 양 팀은 물론, 꼭 RG나 오성의 팬이 아니더라도 대구까지 오는 야구팬들이 많았다.
그리고 양 팀의 선발투수인 동팔과 지완의 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상대 선발투수의 가족이 만났다고 해서 안 좋게 보는 건 아니다. 설령 마주치더라도 누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지만 혜진이란 존재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어, 그래… 혜진이구나."
이미 오래 전부터 사귀어 왔으니 몰라볼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혜진의 미모가 흔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동팔이 힘들어할 때 헤어졌으니 껄끄러운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렇다고 한들, 동팔의 부모님이 혜진의 머리채를 잡는 일은 없었다. 특히나 혜진의 부푼 배와 영문을 모르고 있는 지완의 부모님을 보면 더욱 그럴 수 없었다.
"동팔이한테 얼추 이야기는 들었단다. 그래… 몸은 괜찮고……?"
"네. 잘 지내시죠? 곧 좋은 일 있다고 들었어요."
혜진이 동팔의 가족들 옆에 있는 민희를 살짝 보았다.
혜진의 말에 동팔의 아버지가 말했다.
"인연이 그런 것을 어쩌겠냐. 혜진이도 몸조심하고. 내년 1월에 출산 예정일이라면서?"
길지는 않았지만 무거운 분위기에서 간단히 서로의 과거의 감정을 정리했다.
그러니 옆에서 보고 있던 민희는 조마조마했다.
'다 좋은 분들이시니 불상사는 없겠지만…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괜히 끼어들었다가 분위기만 이상해질까 걱정도 되었지만 동팔의 전 애인과 현재 애인이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괜찮을까 싶었다.
그러던 때, 동팔과 달리 눈치가 100단인 그의 누나가 민희에게 방송 장면을 캡처한 것을 보여주었다.
"……!!"
그것은 바로 2차전에서 민희와 혜진이 같이 앉아서 사이좋게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
민희가 크게 놀라자 동팔의 누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다 알고 계시거든.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하긴 대구에 내려올 수 없었다 뿐이지, 아들이 선발로 등판한 2차전의 중계를 안 챙겨보실 리가 없었다.
홀라당 다 벗겨진 것처럼 민망해진 민희.
'그래도… 비슷한 좌석은 아니겠지? 이 상태에서 혜진 언니랑 같이 있으면 더 그런데…….'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혜진과 동팔의 가족이 간단히 대화를 하고 입장하고 보니 바로 옆에 붙은 자리였다.
아무리 앙금을 정리했다지만 감정이 쉽게 사라지는 건 아니다. 혜진이 동팔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선택했다는 것은 쉽게 봐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자연스럽게 부모님과 누나는 끝자리에. 민희는 바로 옆에 혜진을 두고 앉게 되었다.
'불편해! 불편해! 불편해~!!!'
어색해도 이렇게 어색할 수 있을까?
거기에 지완의 부모님이 혜진이 아는 사이라 생각했던 가족이 동팔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아들의 일이라지만 그들도 이 자리가 편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자리를 옮길 수도 없었다.
'앉기 전이라면 모를까… 앉아버린 이상 옮기면 더 피하는 게 되어버리는데…….'
'대체 누가 이렇게 자리를 배치한 거야?'
그들은 아기를 배고 있는 혜진이 스트레스를 받을까 걱정이 되었다.
혜진도 어색함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먼저 자리를 옮길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걸 아는 민희는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나까지 이러면 혜진 언니가 더 힘들어하겠지? 그렇다고 오빠 부모님이랑 언니도 생각해야 하는데…….'
시간이 지나고 자주 만나면 편해지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덕분에 주변에선 활발한 응원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이들이 있는 곳엔 적막이 맴돌았다.
그래서 민희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동팔의 부모님과 누나와 이야기를 하다가 흐름이 끊겼을 때 혜진에게도 물어봤다.
"저기, 언니… 혹시 오늘 결과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역시 지완 오빠 와이프니까 오성이 승리하는 쪽?"
두 사람의 대결이 아닌 팀과 팀의 대결의 관점으로 물어본 민희.
민희의 질문에 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모르지. 이건 끝까지 가봐야 하니까. 응원한다면 역시 오성을 응원하겠지만… 결과에 대한 거라면… 역시 서로 만만치 않을 거야. 최종전이니 부담도 많아서 수비 쪽에 실책이 나올 가능성도 있고."
의외로 객관적인 평가도 말하는 혜진이었다.
한편, 임상훈 감독은 동팔의 부탁에 황당했다.
"뭐?! 지명 타자로 넣어 달라고? 왜?"
한국 프로 리그에서 투수는 타석에 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 강타자를 넣어 클린업 트리오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팔이 하겠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특히나 지금은 다른 때도 아니고 한국 시리즈의 우승자를 가리는 최종전이었다.
중요한 경기에 갑작스러운 변수. 그것도 팀에 도움이 되지 않을 제안을 쉽게 받아들일 감독은 없었다.
"안 돼."
그러자 동팔이 다급하게 말했다.
"감독님!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먼저 들어주시고 판단해주세요."
"뭐?"
임상훈 감독은 시간도 없는데 무슨 헛소리냐며 내치진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허용한 건 아니었다.
"3분 준다. 말해 봐."
"네. 제가 이걸 생각한 이유는요……."
제한된 시간이었지만 동팔은 자신이 지명 타자로 나서려는 이유를 말했다.
아슬아슬하게 설명을 마무리하자 감독의 반응은 처음과 조금 달랐다.
"그래… 그 방법이라……."
그렇다고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생각해보고 결정하마. 일단 불펜에서 몸 풀고 있어."
"네!!"
동팔은 거절이 아닌 것에 만족하며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감독의 말대로 불펜에서 공을 던지며 몸을 풀었다.
쉭~ 퍽!!
여전히 빠르고 정확하게 날아오는 공.
공을 받은 불펜 포수가 공을 던지며 말했다.
"역시 동팔이! 공 좋다! 그래도 무리하지 마."
"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동팔은 여전히 위력적이고 빠르며 강한 공을 던졌다.
주변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수들이 생각했다.
'준비하면서 이렇게 전력으로 던져도 되나?'
'체력 빠지는 거 아냐?'
아무리 신인이래도 각자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었고, 이번 정규 시즌에서 많은 경기에 나섰으니 본인의 상태와 페이스 조절의 경험도 있었다.
그러니 동팔이 전력으로 던지는 것을 걱정스럽게 보면서도 말리진 않고 있었다.
동팔도 이전에는 불펜에서 전력으로 던지는 것이 적었다. 특히나 장기전이 예견되는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특히나 더 조심했다.
하지만 오늘 동팔이 이럴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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