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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오력의 투수-122화 (122/325)

[122]

'말해도 될까? 한 번 말하면 되돌릴 수 없는데…….'

동팔이 악마와 계약한 것을 물릴 수 없는 것처럼, 지금 민희가 해야 할 말 또한 계약과 같이 쉽게 취소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민희는 오기 전부터 떨었고, 지금은 더욱 떨렸다.

그러나 계속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민희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이번 시즌 끝나고… 저랑 결혼해요."

"응. 알았… 어?"

동팔은 자신이 민희를 속인 것과 같으니, 무슨 결정을 하더라도 같은 대답을 할 생각이었다.

같이 있자고 하더라도, 아니면 헤어지자 하더라도.

하지만 민희의 입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빠가 왜 결혼을 미루는지 알고 있어요. 혹시라도 잘 못될 경우를 생각해서 그런 거죠?"

"응. 나야 죽으면 어쩔 수 없지만… 혼자 남는 넌… 그냥 둘 수 없잖아."

"알아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전 그게 더 화가 나요. 오빠. 저 이제 성인이에요. 성인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시잖아요?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지는 거예요."

"민희…야……."

민희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민희는 동팔을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보려 하고 있었다.

"오빠. 제 인생의 길은 제가 결정할 거예요. 그리고 그 책임도 제가 질 거구요. 모든 게 다 좋게 끝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 이후의 인생은 제가 책임지면 되는 거잖아요."

민희의 말에 동팔은 방금 전에 자신이 들은 민희의 말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았다.

헤어지자는 말에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설마 결혼하자고 할 줄은 몰랐다.

"민희야… 잘못된다는 것은… 그렇게 되면 넌 혼자 남게 돼……."

"상관없어요."

"아이가 있으면?"

"괜찮아요. 키우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저 혼자도 아니고… 부모님도 계시고, 오빠 부모님께서도 모르는 척하실 것도 아니잖아요?"

민희의 말에 동팔은 그녀가 단단히 마음을 먹고 왔음을 느꼈다.

"그래도……."

아직 결혼은 무리라는 말을 동팔이 하기 전에, 민희가 먼저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결혼해요. 제가 그렇게 못 미더워요?"

"아냐! 그런 건!!"

"아니라면 우리 함께해요. 오빠가 말했잖아요. 제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받아들일 거라고……."

차라리 자신이 번 돈을 달라고 하면 줄 수 있었다.

헤어지자고 한다면 받아들일 각오도 했다.

이런 경우들은 모든 것을 끝내고, 허탈하겠지만 더 이상 자신의 책임이 없었다.

하지만 동팔은 결혼 그 이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난……."

민희의 결정에 혼란스러워 할 때 민희가 말했다.

"언제까지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려 할 거예요? 다른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는 것을."

민희의 그 말에 동팔은 말문이 막혔다.

"오빠가 잘못되었을 경우를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건… 제가 오빠한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민희의 말에 동팔은 마치 날카롭고 긴 송곳이 명치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온 것만 같았다.

또한 그녀의 말에 동팔은 남궁지완과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네가 야구를 포기하지 않으니, 혜진이 입장에선 너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지."

동시에 동팔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맞아… 그래서 내가 혜진이랑 헤어졌는데…….'

동팔은 그가 이어서 한 말이 떠올랐다.

"혜진이 진짜로 원한 것은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줌으로써 받아들여진다는 거였는데… 넌 그걸 전혀 캐치하지 못했어."

그러자 동팔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왔다.

'하아… 그렇게 큰 실수를 했으면서 또 같은 실수를 할 뻔하다니…….'

동팔의 생각을 알 수 없는 민희는 그의 한숨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내가 너무 강하고 노골적으로 나왔나? 화난 거야?'

민희가 불안해하고 있을 때, 동팔이 말했다.

"민희야……."

"네……."

"방금 전에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게."

"…네?"

예상치 못한 동팔의 대답에 민희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만약 지금 서 있었다면 그대로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대신 나랑 결혼해줘."

"…네?!"

결혼하자는 말을 못 들은 것으로 하자고 하더니, 그가 자신의 입으로 결혼을 제안했다.

황당한 상황에 민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동팔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적어도… 프러포즈는 남자가 먼저 해야지."

최소한 남자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동팔의 말과 행동.

아무리 남녀평등이 어느 정도 실현이 된 세상이라지만 아직은 남녀가 했을 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행동은 존재했다.

이미 주변이 다 아는 사이에, 사실상 결혼 준비까지 마친 상태라 할지라도. 형식적인 프러포즈는 남자가 해야 하며 여자는 그 순간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한다.

이 인식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민희는 자신이 방금 전에 말한 것이 사실은 프러포즈였다는 것을 인지했다.

"아, 그래서… 방금 전에 못 들은 걸로 하겠다고……."

민희는 웬 마초적인 사상인가 싶었지만 말로 내뱉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었으니 말이다.

괜한 자존심보다 실리를 택한 민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네… 설령 진흙탕에 뒹굴게 되더라도……."

***

예상치 못한 서로의 프러포즈로 인해 동팔과 민희는 바빠졌다.

동팔은 이 사실을 제일 먼저 부모님께 알렸다.

부모님은 아직 젊은 동팔이 결혼하겠다고 하자 주저하시면서도 반대하진 않으셨다.

"이 사람이다 싶으면 빨리 합치는 것도 나쁘진 않지……."

"하긴… 민희라면 똑부러지게 일도 잘하고, 너 힘들 때 함께해주고, 얼마 전에 일도 생각하면… 당연히 해야지. 그래도 너무 빠른 것 같지 않아?"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는 없었다.

자신의 남은 수명은 최소 3년. 그 안에 정해진 조건을 완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 서두르지 않으면 그나마 있을 결혼 생활이 더욱 줄어들 것이다.

민희의 부모님께서도 결혼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당연히 결혼해야지. 그렇게 민희가 열심히 했는데."

"그래도 너무 이른 거 아니야? 너 이제 25살인데?"

역시나 젊은 딸을 걱정하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딸이 결혼하겠다는 말을 듣자 그녀의 아버지의 표정은 뭔가 굉장히 뚱했다.

"아빠. 표정이 왜 그래? 항상 내가 시집갈 수 있을까 걱정된다면서?"

"크흠! 왜 옛날이야기를 꺼내? 크흠……."

"그럼 오빠가 나랑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민희의 말에 그녀의 아빠는 발끈했다.

"뭐?! 그럼 내 당장 달려가서 그놈의 다리몽둥이를 그냥 확!!"

단번에 달라진 아빠의 태도에 민희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했다.

"그럼 결혼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

민희의 말에 그녀의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약간의 침묵이 이어진 후, 아버지가 말했다.

"좀 있다 가면 안 되겠니? 한… 5년 후에."

5년 후면 동팔에게 남은 시간을 훌쩍 뛰어 넘은 상태.

어떻게 될지 모를 상황에 민희는 한 번 굳힌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응. 안 돼. 그리고 지금 결혼하지 않으면 내년에 미국에 못 가. 비지니스 비자도 아니고, 내가 오빠랑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미국에 가?"

아무리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이며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위치했지만 미국의 비자는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메이저리그 구단이 보증하고 데려오는 선수라면 구단이 알아서 비자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고 덤으로 가족 중에 한해서 일부 사람에게 비자를 받게 한다.

선수 관리는 매니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가족들의 조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뿐만이 아니라 외국 용병을 영입한 대부분의 구단이나 다른 스포츠의 팀도 마찬가지였다.

"상견례 날짜는 한국 시리즈 끝나면 하자고 이야기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결혼은… 3월 전에 예식장 구하면 그때에 맞춰서 할 거예요."

사실상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운 딸의 발언에 그녀의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하셨다.

그러자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너무 일방적인 거 아냐? 그쪽이랑 이야기는 해봤어?"

"그건 오빠가 알아서 하겠대. 생각보다 시간이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우리끼리만 진행할 수 없으니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갑작스럽다는 건 알지만 최소한 할 건 해야지."

"그렇게라도 생각하니 다행인데……."

그나마 두 사람의 사이를 양가 부모님이 알고 계셨고, 결혼도 시간문제라 인식했기에 순탄한 것이다.

만약 민희처럼 갑자기 일방적으로 통보하듯이 말한다면 어느 부모가 그 결혼을 허락할까.

"갑자기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정말로 시간이 없어서… 원래는 오빠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고 결혼하자고 했는데… 그러면 너무 늦지 않아?"

민희의 말에 엄마가 말했다.

"그럼 너무 늦지. 그때까지 마음 지킨다는 보장도 없고, 잡으려면 지금 잡아야지. 이미 지금도 충분히 잘나가고 있지만……."

현실적인 엄마의 말에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아빠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래야지.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없으면 많이 불행해. 사람의 가치가 재산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 이후로 민희는 부모님의 조언과 같은 잔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사실상 결혼을 허락해주셨고, 갑자기 말씀드린 것도 죄송스러워 참고 또 참으며 듣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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