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121화 (121/325)

[121]

"두 사람 우리 보면서 어떤 생각 할까요?"

"아마도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까? 적어도 동팔이는. 지완이는 널 모르니 그냥 아는 사람인가 생각할거야."

그러다 화면이 바뀌자 혜진은 민희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언제 결혼해? 도박단이랑 연루되었다는 건 들었지만, 그 이후로 소식을 못 들었거든."

민희는 납치를 당한 상태에서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언론에 전부 소개가 된 건 아니지만, 선수들 사이에선 두 사람의 이야기는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혜진도 건너서 들어 알고 있었다.

혜진의 물음에 민희는 고개를 조금 숙여졌다.

"생각은 하고 있어요… 그런데… 오빠가 많이 주저하고 있어서……."

동팔이 앞으로 3년 안에 월드시리즈에 우승하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민희는 단순히 야구에 집중하기 위해서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알고 보니 악마와의 계약에 의해서였다. 정해진 기간 안에 월드시리즈에 우승하지 못하면 죽는다.

이런 상황이니 괜히 민희와 결혼했다가 죽게 되면? 그럼 혼자 남게 될 민희가 눈에 밟히는 건 당연했다.

"왜?"

혜진의 되물음에 민희는 어물쩍 넘어갔다.

"그건…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적어도 3년 안에 결혼할 거라고 말 했어요."

민희가 혜진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 그리고 민희는 그 말을 하면서 조금이지만 동팔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내가 말할 수 없는 없는 것처럼, 오빠도 말할 수 없었겠지?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을 테니까… 이 고독함에서 혼자 많이 힘들었을 거야…….'

그리고 민희는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 되던지 간에, 저는 오빠랑 빨리 결혼할 생각이에요. 그거 말하려고 여기 왔어요."

민희의 결정에 혜진이 물었다.

"그래? 그렇게 말하면 분명히 당황스러워 할 텐데. 그런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뭐야?"

혜진의 물음에 민희는 경기장 안을 본다.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는 동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동팔의 모습을 눈에 각인시키듯 본 민희는 결심을 하게 된 이유를 혜진에게 말했다.

"그건 바로……."

설령 진흙탕에 뒹굴더라도…

한국 시리즈 2차전은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투수전으로 흘러갔다.

RG와 오성이 각각 8번의 공격을 했지만 어느 팀도 상대하는 투수를 뚫지 못했다.

수비에서 실책을 기대할 수도 있었지만 그 마저도 연속적으로 터지지 않으면 점수로 이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삼진 대결이 아닌 범타를 이용한 효율적인 투구를 한 동팔과 지완. 그리고 수비에서도 흐름이 끊어지지 않게 실책을 최소화해 나가고 있었다.

결국 서로 8회 말이 될 때까지 변변한 타격이나 진루를 하지 못하고 말았다. 당연히 점수는 0대 0.

의외의 변수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이 예상하는 확실한 변수는 단 하나였다.

"이제 슬슬… 누가 먼저 체력이 떨어졌을까?"

"그건 봐야 알지 않아? 투수 숫자는 분명히 동팔 쪽이 더 많지만… 지금 구위를 보면 지완 쪽이 불안한 것 같은데……."

"그냥 느낌 아냐? 전에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12회까지 던졌잖아. 그 체력이 있는데 벌써?"

"그래서 더 힘들지 않을까? 그때로부터 시간이 지났지만 몸의 회복이란 게 쉽게 되는 것도 아니야.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않았다면 신호가 올 때가 됐지."

이런 생각은 RG만이 아니라 오성의 팬들도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오래전부터 동팔과 지완을 보아온 두 여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반 팬보다 더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지완 오빠한테 아쉽겠지만… 이제 슬슬 교체 타이밍이지 않을까요? 7회 때보다 8회 때 구위가 조금 떨어졌어요. 뛰어난 제구력으로 어떻게든 넘겼지만 9회는 좀……."

"나도 같은 생각… 하지만 지완인 자존심이 강해. 다른 상대도 아니고 동팔이라면 특히… 아마 감독님이 결단이 필요할 거야."

이기고 싶은 상대보다 더 빨리 마운드에 내려온다. 그리고 상대하는 타선의 위력도 상대방이 더 높다면?

그렇게 되면 단순 판정만으로 보면 지완의 패배, 동팔의 판정승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느끼고 있을 지완은 쉽게 마운드에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혜진은 알고 있었다.

"그럼 언니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아무리 투수가 던지고 싶어도 감독의 결정이 먼저야. 원하지 않아도 감독님이 정하면 따라야지."

혜진의 말이 끝나자 RG의 9회 초 공격이 끝났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증명하듯 오성의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는 남궁지완이 아닌 다른 투수였다.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한눈에 봐도 지완의 표정이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겨우 8이닝만 던졌는데 교체라니…….'

자신과 달리 동팔은 여전히 9회 초에 올라와 공을 던졌다.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투구의 내용은 동팔이 더 좋았다.

삼진 개수는 동팔이 2개 더 많았다.

범타를 유도하며 자신이 더 효율적인 투구를 했지만 체력 문제로 구위가 먼저 떨어진 쪽은 자신이었다.

상심한 지완의 옆으로 승협이 다가왔다.

"많이 아쉽지? 더 던지고 싶은데."

"아뇨. 괜찮습니다. 감독님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니 결정하신 걸요. 선수인 제가 감독님의 결정을 무시할 수 없지 않습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완의 표정에는 여전히 불만이 어려 있었다.

그의 반응에 승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가슴으로는 답답하고 짜증이 날 거다. 그래도 너도 알다시피 최후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는 거 아니겠나? 그리고 계속 던지다가 기록이나 승패는 둘째 치고, 네가 다치면 우야노? 네가 다치지 않고 내년에 메이저리그 가야 니한테도 좋고, 구단 입장에서도 좋은 거 아니겠나."

승부도 승부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부상을 당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몸이 재산인 선수들에게 있어 아무리 작은 부상이라도 일반인과 달리 치명적인 손상을 의미했다.

아무리 잘 나가는 선수라도 부상 하나 때문에 강제로 은퇴 당한다. 바로 전에 공을 던졌던 동팔처럼.

동팔과 같이 완벽하게 재기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동팔이야 회복 능력을 얻었으니 괜찮겠지만… 나는 그게 아냐. 그리고 3년 안에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기 위해선 작은 부상이라도 당할 수 없으니…….'

다른 말도 아니고 부상이라는 말에 점차 진정되기 시작하는 남궁지완.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것이고, 분한 것은 분한 것이다.

다만 지금은 어떻게 방법이 없으니 참고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지켜야 할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 오늘 경기를 보러 온 혜진을 위해서라도.

경기 중 혜진을 향해 무언가 사인을 보낼 수 없었다.

지완은 홀몸이 아닌 그녀가 와준 것이 고마웠고, 또 미안했다.

'동팔이가 선발이라 껄끄러울 텐데… 그래서 더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전에는 동팔에게 이기는 것만이 중요했던 지완. 하지만 이젠 단순히 이기는 것만 목적이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아주 작아 보였지만 지완에게 있어서 중요한 변화였다.

다른 사람도, 그 자신도 인지하지 못할…….

국내 1, 2위를 다툴 두 국산 투수의 대결이 관전 포인트 중 하나였다. 하지만 한국 시리즈라는 자체만으로 승부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또한 중요했다.

한국 시리즈 2차전, 두 투수의 대결은 동팔의 판정 승.

12회 초에 터진 히네신스의 솔로 홈런과 끝까지 뒷문을 지킨 강동팔의 투구로 인해 RG의 1대 0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2차전은 결국 RG가 승리했습니다. 오성은 남궁지완과 불펜자원을 동원한 반면, RG는 강동팔 선수 한 명으로 경기를 끝냈어요."

"그래서 3차전은 RG가 조금 유리할 겁니다. 하지만 4차전이 되면 또 모르죠. 그리고 7차전까지 가게 될 확률이 높아졌는데, 이러면 오늘과 같이 강동팔 선수와 남궁지완 선수의 대결이 다시 이어질 것 같습니다."

이후에 중계진들의 중계가 이어졌고, 솔로 홈런을 쳐 승부를 결정지은 히네신스가 이번 경기 MVP로 뽑혔다.

그 자리에 동팔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많았지만 그동안 너무도 많은 경기에서 MVP에 뽑히는 바람에 이런 결정이 내려졌다.

동팔로서도 히네신스가 인터뷰를 하는 것이 나았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동팔이 찾은 것은 핸드폰.

"민희가……?"

경기할 때 관중석에서 혜진과 같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 연락이 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예상대로 부재중 통화에 민희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동팔이 통화 버튼을 눌러 민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기… 민희야?"

―네. 오빠. 지금 많이 바쁘시죠?

"아냐. 그렇게 바쁘지 않아."

―바쁜 거 다 아니까 괜찮은 척하지 마세요. 짐 정리하고 있을 시간일 텐데… 그리고 곧 버스 타고 서울에 올라가셔야 하잖아요. 내일 만나서 이야기해요. 저는 혜진이 언니 바래다드리고 내일 올라갈 거예요.

"응……."

어째서 혜진이와 같이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민희의 말대로 경기가 끝났고, 내일 있을 3차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서울로 바로 올라가야 했다.

"알았어. 기다릴게……."

통화를 마치고 난 동팔은 항상 그렇듯이 짐을 챙기고 선수단 버스에 몸을 실었다.

동팔이 어두운 밤을 뚫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위에서 민희에게 하나의 문자를 받았다.

[내일 오전 11시에 만나요.]

계속 어떻게 될까 걱정하는 것보다 나았지만 생각보다 민희의 결정이 빨리 나왔다.

동팔은 서울에 올라가는 길에 더욱 조마조마해졌다.

그래도 이 조마조마함이 언제 끝날지 알기에. 그리고 오늘 경기를 보러 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희망이 있어 괴롭지만은 않았다.

***

운명의 날.

민희는 아침부터 호텔을 나와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전에 혜진으로부터 대구에 온 김에 좀 놀다 가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미 시간을 공지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오성도 잠실에서 RG와 경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지완도 서울로 가야 했다. 그래서 혜진은 민희가 빨리 가야 한다고 하자 굉장히 아쉬워했다.

민희도 혜진의 마음을 알았지만 미안함을 뒤로 하며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다가온 운명의 오전 11시.

지정된 곳에서 동팔과 민희가 만났다.

민희가 동팔을 만나자마자 먼저 말했다.

"정말… 제가 한 선택을 전부 받아주실 거예요?"

농담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단어 그대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민희의 말에 동팔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답했다.

"응……."

과연 민희가 어떤 선택을 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어제 경기를 보러 왔다는 것이 희망적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낙관하기엔 일렀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동팔의 확답에 민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