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오빠… 물어볼 게 있어요."
"응……."
올 게 왔다는 건 알고 있지만 생각보다 그 올 것이 빨리 왔다.
'뭐라고 변명해야지? 어떻게 말해야 민희가 납득하거나, 알려는 걸 포기하게 만들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은 현재 자신의 상황에 대해 말해줄 수 없었다. 그럴 자신도 없고, 그 이후의 여파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올해 초에는 3년이나 남은 것 같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3년밖에 남지 않았다. 그나마 자신이 악마와 계약을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는 제약이 안 붙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짧은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할 때. 민희의 입술에서 나온 이름은 뜻밖의 이름이었다.
"혹시… 웜우드라는 사람… 아세요?"
질문을 던지면서 민희도 온갖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그때 본 사람이 과연 정말로 사람일까? 내가 헛것을 본 건 아니겠지? 만약 오빠가 그 사람 이름을 아는 것도 신기하지만, 정말 알고 있다면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
처음부터 다짜고짜 '오빠, 나랑 결혼을 연기하는 거랑 그때 오빠 멍이 사라진 일이랑 무슨 상관이야?'라고 물을 수 없었다.
그러니 그냥 묻더라도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아니라면 아니라며 그냥 물어봤다고 말할 수 있는 질문을. 그리고 설마 동팔이 웜우드라는 사람을 알까 싶었다.
하지만 동팔의 반응은 민희의 예상에서 어긋났다.
"뭐… 웜…우드? 네가 그 사람… 아니 그를 어떻게……."
스스로 악마라 말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마의 계략을 무너트리겠다고 하는 존재. 웜우드는 자신과 동욱만이 아는 존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희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동시에 동팔의 반응을 보자 민희도 당황스러웠다.
'어? 설마 정말로 아는 사이? 그럼 그 일은 어떻게 되는 거야? 헛것이 아니라 내가 제대로 본 거라면… 어떻게 한 순간에 사람이 사라질 수 있는 거지? 마술쇼도 아닌데?'
당황을 넘어 혼란스러울 때, 민희를 설마 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사람이 한 말의 의미가 뭐였어요? 오빠가 결혼을 미루는 거랑… 그 때 봤던 그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예요?"
민희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동팔은 생각했다.
'설마… 웜우드가 다 말한 거야?'
그에게 있어 민희의 질문은 피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막은 것만 같았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다면 무슨 소리냐며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지금의 동팔에겐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 그게……."
동팔은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혜진의 이별 통보,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그때에 만난 악마 스크레이치, 그와 한 계약과 그로 인해 받은 능력.
마지막으로 영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신이 완수해야 할 조건도.
동팔의 말을 듣자 민희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악마와 계약을 하고, 그로 인해 회복능력을 얻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정해진 기간 안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하면 영혼을 빼앗겨 죽게 된다?
이전이라면 동팔이 아무리 진지하게 말해도 농담처럼 넘어갔을 이야기였다. 그러나 얼마 전에 본 믿을 수 없는 회복의 현상을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여전히 주저하며, 두려워하고, 동시에 진지한 동팔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니 동팔의 황당한 말에도 가볍게 웃으며 넘어갈 수 없었다.
"그랬…군요……."
믿을 수 없지만 믿어야 했다. 하지만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그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는 별개의 문제.
"저기… 오빠……."
"응……."
동팔은 민희가 이대로 자신을 떠난다 할지라도 할 말이 없었다. 생각 같아선 잡고 싶지만, 그녀에게 족쇄를 채우는 행동과 같아서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니 민희의 말에 동팔은 거절할 수 없었다.
"지금… 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시간 좀 주시겠어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응……."
그리고 민희는 일어나며 말했다.
"그리고 오빠."
"응."
"나중에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몰라요. 대신…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받아들여 주시겠어요?"
사실상 민희의 이별의 전조(前兆)와 같은 말에 동팔의 심장은 톱날에 천천히 도려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동팔은 민희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응… 그럴게."
동팔의 허락에 민희는 마저 말했다.
"오늘 선발이죠? 이런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후회하는 일 없게 최선을 다 해 주세요."
동팔에게 힘든 순간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가 봐주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이번에 상대할 오성의 투수는 남궁지완.
악마와 계약을 하여, 지금은 자신과 비견될 구위를 가지게 되었다. 단 한 점이 승부를 가를 것임이 자명했다.
지금 동팔이 압도적이며 완벽한 피칭을 했기에 그의 몸값이 고공행진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순간에 실수하게 되면 흠이 생겨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민희가 어떤 결정을 내릴 지 알 수 없다. 거의 끝난 것 같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기에 동팔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답했다.
"응. 기다릴게. 언제까지라도……."
***
민희는 자신의 결정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 말해도, 한국 시리즈의 2차전이 오늘 열리는 이상 경기가 먼저일 수밖에 없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을 하루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결정할 수 없는 건 동팔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팔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보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무너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금 동팔은 민희와의 일도 걱정이지만, 또 다른 고민이 있었다. 어차피 민희에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가 걸린 일이니 그녀와 얽힌 걱정을 마음에서 쉽게 비울 수 없다.
그래도 이미 떠난 화살을 다시 잡을 수 없으니 동팔은 다른 고민에 집중하려 했다.
"후우… 오늘은… 좀 쉴까…? 애초에 원정을 와서 제대로 훈련할 수도 없지만……."
오늘 선발이라 강도 높은 훈련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얼마 전에 짧게 던져 감각을 억지로 끌어올릴 필요도 없었다.
임상훈 감독의 입장에선 단순히 동팔의 체력 안배를 위한 것이었지만, 동팔에게 있어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갑자기 회복 능력이 발현된 이유를 알아야 해. 여러 가지 가정(假定)이 있지만, 일단 한국 시리즈를 하고 있고 지금이랑 다음 선발에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예기치 못한 사태로 민희와의 관계에 심각한 위험이 생겼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가진 능력을 더 잘 활용할 틈이 보였다.
'이유가 뭘까? 단순히 타박상에 한해서? 아니야. 그러면 이전에도 타박상이 생기자마자 치료되어야 했어. 그리고 강한 손상이 발생해서도 아니야. 그랬다면 인대가 끊어질 정도로 훈련을 했던 그 때에 바로 바로 회복되어야 했겠지…….'
다행히 이전의 경험이 있어서 처음 세웠던 가정(假定)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지금은 간단히 훈련 폼을 살펴보는 수준에 타격 훈련도 호텔의 물건을 치운 후, 배트에 배트링을 걸어 가볍게 휘두르는 정도다.
'이 정도로는 피곤하거나 크게 힘든 건 아냐. 하지만… 지금 남은 가정 중 하나인 그거라면……?'
동팔이 생각하는 가정 중 하나는 이것이다.
"그럼. 이 정도는 금방 나아."
갑자기 회복되었을 때에 자신이 한 말을 떠올렸다. 그건 어렵지 않았다. 설치해 놓은 블랙박스에 저장된 영상을 여러 번 돌려봤으니까.
회복의 능력이 발현되기 전, 분명히 자신은 오늘의 경기를 행각해서 가능한 빨리 나아야 한다고 말했다.
동팔이 이렇게 생각한 건 다른 것이 아니었다.
'무릎 부상이었을 땐, 경황이 없어서 나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어. 그리고 회복되는 새벽에 너무 아파서 회복되지 않기를 바랐고. 그리고 산에 들어가 돌로 된 공을 던졌을 때도 마찬가지. 인대가 끊어지고, 힘줄이 끊어졌지만, 회복하는 순간이 너무 아파 낫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어.'
어쩌면 주문과 같은 말이라 빨리 낫고 싶다는 말을 하면 회복능력이 발현된 건지 모른다. 그리고 별다른 말이 없다면 정해진 시각에 회복능력이 발현되는 것이라면?
어떤 조건에 따라 능동적으로 발현된다는 것이 증명이 된 이상, 그 조건만 알면 지금의 능력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단순 피로에도 상당한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니 내색하지 않기 위해서 적당히 움직인 후, 그 말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했어도 동팔은 몸의 어떠한 변화도 느끼지 못했다.
"이게 아닌가?"
그나마 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가정(假定)이었지만, 폐기해야 했다. 그리고 동팔은 다른 조건을 계속 생각해 나갔다.
"설마 어투나 말의 속도에 신경 써야 했나? 아니면 특정한 음정이나 음절?"
동팔은 열심히 회복의 발현 조건을 알아내려 했지만, 결국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더그아웃에 들어가기 전, 핸드폰을 본다. 혹시나 민희가 연락을 했는가 싶었지만, 연락 온 곳은 고작해야 스팸 전화와 문자뿐이었다.
"후우… 일단 이기는 것만 생각하자. 무실점, 무실점……."
그리고 또 더그아웃에 들어와 경기를 준비하기 전, 상대해야 할 오성의 선수. 특히 남궁지완을 보자 동팔은 얼마 전에 그와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큰소리치고 나왔는데……."
주변의 소중한 것을 보지 않고, 자신의 아집에 사로잡혀 잘못된 선택을 한 남궁지완을 향해서 단호히 말했다.
지금 자신이 한 선택이 잘못되었으며, 순수하게 실력을 눌러버리겠다는 각오를 새웠다. 하지만 막상 지금 돌아보니 얼마나 황당한 발언이었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랑 지완이랑 비교할 수도 없지만, 설령 내가 이긴다고 해서 녀석이 마음을 바꿀까? 내가 열심히 노력한 것도 있지만, 악마의 능력에 기댄 것이니 별다른 감흥도 오지 않을 텐데…….'
지완을 상대로 우위를 점한다고 해도, 정작 동팔이 얻으려는 목적을 얻을 수 없다. 이긴다고 하지만, 지완이 핑계될 것은 있었다.
악마와 계약을 한 기간은 동팔이 더 길었다. 아무리 능력을 얻었더라도 그것을 발현하고 이용하는데 필요한 노하우가 더 축적되었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결국 이기는 것만으론 남궁지완이 주변의 소중한 것을 보지 않고, 잘못된 선택을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한다… 그렇다고 약한 모습 보여줄 수도 없고…….'
만약 상대적으로 남궁지완이 동팔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신의 잘 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아니, 두 사람이 비슷하거나 같다고 느끼게 만들 수도 없었다. 그것만으로 악마와 계약을 한 성과가 될 것이다.
'확실하게 내가 더 우위에 있음을 보여줘야 해. 그렇다고 힘으로 누르는 것도 상황을 다른 의미로 악화시켜. 그렇다고 강속구가 아닌, 느린공만으로 할 수 없어. 오성의 타자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스스로 제한을 걸자니, 그러면 인생과 앞으로의 계획에도 제한이 생긴다. 지금 당장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동팔이 선택하는 것은 간단했다.
"무조건 무실점. 그리고 진완이보다 더 좋은 기록으로."
타선의 압박감은 RG보다 오성이 더 강하다. 만약에 둘이 비슷한 기록을 한다면, 상대가 더 강한 동팔이 판정승을 거두게 된다.
당장 무언가 해결할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면, 적어도 다음에 다시 붙을 7차전까지 밀리지 않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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