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118화 (118/325)

[118]

"민희 씨. 오늘 빨리 가려고?"

"네. 준비할 것이 좀 있어서요."

이후에 스터디 모임이 있지만 가지 않았다.

걱정으로 인해 집중할 수 없었다.

있더라도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낼 것이 분명하니 오늘은 빠지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은 시간대라 지하철엔 앉을 자리가 꽤 있었다.

하는 것도 없지만 걱정에 의한 스트레스와 압박에 지쳤다.

그런 와중에 민희의 신경을 바짝 세우는 사람이 다음 정거장 때 들어왔다.

'외국인!!'

서울에 외국인이 많아진 때는 생각보다 오래되진 않았다. 군사정권이 물어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섰어도 북한의 위협으로 인해 오려는 외국인은 많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한국이라고 하면 북한의 핵개발과 여전히 폐허인 남한을 떠올린다. 그나마 월드컵으로 나아지긴 했지만, 그동안 새겨진 이미지가 쉽게 바뀌는 건 아니다.

그래도 올림픽과 월드컵을 통해서 그리고 북한과 한때, 비록 겉모습뿐이라 해도, 평화 모드로 있었던 것이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이전에는 외국인이 한국에 가려 하면 주변에서 말렸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나라에 갔다가 전쟁에 휘말리는 건 아닌가 걱정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휴전상태가 오래되었지만 언제라도 선전포고 없이 개전이 가능한 상태였으니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 이미지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이 희석되어지고, 한류의 영향으로 관광을 오려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외국인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이제 서울에서 외국인 보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을 보는 한국인의 반응은 두 가지다.

'아, 외국인이다.'

그냥 보더니 자기 일을 하는 사람. 그리고 또 다른 경우는.

'오지 마라, 오지 마. 나한테 물으러 오지 마.'

외국인과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눈을 피하는 경우다. 아무리 학교에서 12년 이상 영어를 배웠지만, 막상 외국인과 마주치게 되면 한 마디 하는 것이 어렵다.

마음으로야 친절하게 대답하고, 대한민국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전제 조건인 대답을 할 능력이 없었다.

민희의 경우, 영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지만 지금의 바람은 후자에 가까웠다.

'나한테 오면 어떻게 하지? 나 아직 익숙하지 않은데…….'

외국인이 길을 물으러 오면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덕분에 이전에 했던 걱정이 쏙 들어갔다.

그리고 스스로가 너무 민망했다.

'나 이제 메이저구단 사람들이랑 영어로 협상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무슨 꼴이야!!'

과연 이러려고 영어를 배웠나, 심각한 자괴감이 밀려올 때 문제의 그 외국인 남자는 민희의 옆에 다가왔다.

민희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끝자리에 앉았지만 이 순간은 결코 그 사실에 기뻐할 수 없었다.

금발의 젊은 외국인은 민희를 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민희 씨죠?"

"네……?"

너무 유창한 한국어에 민희는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누구지? 왜 나를 아는 거지? 영어 학원에 외국인 강사 중에 이 사람이 있었나?'

하지만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무리 서울에 외국인들이 많아도 금발을 한 사람은 단연 눈에 띈다.

그리고 학원의 강사라면 자주 보일 테니 다른 사람보다 더 눈에 띄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민희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민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자 그 남자, 웜우드가 말했다.

"동팔 선수랑 잘 아는 사이입니다. 웜우드라고 말하면 알 거예요."

"네? 아, 네……."

동팔과 아는 사이라면, 자신을 알아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헌팅하기 위해 그냥 그 이름을 말했을 수 있어 일부러 커플링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웜우드의 동팔과 아는 사이라는 말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빠가 영어 잘 하는 건 알고 있지만, 언제 외국인이랑 친구였지? 난 본 적이 없었는데.'

왠지 자신의 이야기는 이 사람에게 말하고, 본인에겐 웜우드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에 은근히 질투를 하게 된 민희.

그 사이, 웜우드가 말했다.

"의외의 것을 알게 되서 걱정이 많죠? 이해합니다. 나쁜 건 아니지만 그런 걸 봤으니 놀랄 수밖에 없죠.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네……."

웜우드의 말에 민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계속 걱정하고 고민하는 문제였다.

다만 그 문제를 이 웜우드라는 사람이 어제 밤에 있었던 일을 이렇게 빨리 알 수 있었느냐는 점이 걸렸다.

'뭐지? 설마 오빠, 나 말고 이 사람한테 모든 고민을 다 말하고 다닌 거야?'

그녀는 웜우드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는 사이 웜우드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그게 싫다고 차 버릴 건가요? 얼마 전만 해도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사람을?"

"아니… 그건……."

당연히 아니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아뇨… 지금은… 그냥 놀랐을 뿐이에요… 그쪽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고… 왜 그런지 전혀 알 수 없어서… 웜우드라고 했죠? 당신은 왜 그런지 알고 있나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입으로 말씀드릴 수 없군요. 제가 말하면 그 친구 입장이 많이 난처해지니… 그래도 힌트는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네? 힌트요?"

"네. 그에게 말하면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는 열쇠라고 보면 되겠군요. 그건… 그쪽과 결혼하려는 걸 3년 뒤로 미루려는 이유… 그리고 저의 이름을 말하면 될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동팔에게 일어난 이해할 수 없는 빠른 회복.

그리고 동팔과 자신의 결혼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일까?

두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하는 사이, 어느새 다음 역에 도착했다. 그러자 웜우드는 몸을 돌려 내릴 준비를 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그리고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더 나은 모습을 위해서 말하겠습니다. 이걸 기억하세요. 불과 얼마 전엔 그쪽과 동팔의 상황이 반대였다는 것을."

"네?"

민희가 의아해하는 사이, 웜우드는 지하철에서 내렸다. 그가 내리자 민희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웜우드에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내렸다.

"저기요. 상황이 반대였다는 것이 무슨……."

웜우드가 내리자 민희도 곧바로 일어나 내렸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방금 전에 내린 웜우드를 찾을 수 없었다.

"어? 어디 갔지?"

설마 웜우드의 발걸음이 빨랐나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엘리베이터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었고, 올라가는 계단은 더 멀리 있었다.

그리고 인파속에 숨을 만큼 주변에 사람들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내린 자신을 포함해 열 몇 명의 사람이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 웜우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내가 헛것을 봤나?"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너무 명확한 형상이었다. 그리고 웜우드이 모습은 평범한 외국인 청년의 모습. 방송에서 잘 나오는 특정한 사람과 닮은 부분은 금발인 것을 제외하면 없었다.

―출입문 닫겠습니다. 출입문 닫겠습니다.

안내문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다시 탈 수도 없어서 결국 다음 열차를 기다려야 했다.

민희는 기다리기 위해 의자에 앉으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뭐지… 대체……."

어제 일에 다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겪게 되자 그녀의 눈동자는 계속 잘게 흔들렸다. 그 와중에도 민희의 머릿속엔 그가 말한 두 가지 사실이 떠나지 않았다.

'이름이… 웜우드라고 했지? 이름이 쓴 쑥이라니… 대체 이름을 누가 그렇게 지은 거야? 그리고… 어제 그 일과, 나랑 오빠의 결혼이 미뤄지는 거랑 무슨 관계?'

헛것이라 생각하고, 잠시 꿈결에 본 것이라 무시해도 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생각은 쉽게 떠나지 않고 있었다.

***

한편, 민희가 내린 그 차량에선 일부 사람이 자그마한 소리로 수군거렸다.

"젊은 처자가 미쳤나봐."

"그러게. 아무도 없는데 헛소리하더니 갑자기 나가네."

"이어폰도 안 꼈고, 전화 통화 하는 것 같지도 않았지?"

"그래도 곱게 미쳤네. 나가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소름끼쳐서 우리가 먼저 나갔어."

민희에게는 보였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은 웜우드로 인해 그녀는 졸지에 정신이 나간 여자 취급을 당하고 말았다.

***

민희는 먼저 동팔에게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이는 동팔도 마찬가지.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지나 한국 시리즈가 진행되었다.

오성과 RG의 한국 시리즈 첫 경기의 결과는 RG의 패배. 그것도 1점 차이의 근소한 승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정응원을 온 RG의 팬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내일 강동팔이 등판하니까 웬만해선 1승1패가 되지 않을까?"

"그러겠지. 타선에서 삽질하지 않으면. 아, 그런데 이번에는 힘들지 않을까? 내일 오성 선발이 남궁지완이잖아."

"아… 그러네. 갑자기 치고 올라왔지? 강동팔에 근접한 유일한 투수잖아. 그럼 내일은 완전히 투수전이야?"

"응. 아마 두 사람의 체력. 그리고 누가 더 효율적인 투구를 하느냐가 갈리겠지."

"끄응… 그거 예상하기 어렵네. 효율적인 투구를 한다고 범타 유도하다가 수비에서 실책하면 끝날지도 모르니까."

1차전에서 이기지 못하면 한국 시리즈에서 우승할 확률은 확연히 줄어든다. 그렇다고 1차전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연패를 해서 우승을 놓칠 수 있으니 그럴 수도 없다.

애초에 투수진이 막강한 RG였지만, 끝까지 발목을 잡은 것은 타선이었다.

잠실구장의 특성으로 인해 투수 전력에 많은 돈을 쓰다 보니 타자 중에 뛰어난 선수에 대한 투자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같은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는 우산의 경우, 뛰어난 육성 시스템으로 좋은 타자를 키워나갔다. 하지만 RG의 경우 육성선수 중에서도 타자출신이 많지 않은 것이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RG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RG의 탄탄한 마운드는 오성의 타자들을 충분히 감당할 여력이 있고, 타자들도 남궁지완을 제외하면 오성의 투수를 상대로 나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지아의 한동욱이 아닌 이상, RG의 투수를 압도할 타자가 없었다.

비록 오늘은 졌지만, 내일 있을 동팔의 선발을 기대하는 RG의 팬들. 그런 팬들의 마음과 달리, 동팔은 선발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건 자신의 앞에 있는, 민희 때문이다.

한국 시리즈 1, 2차전은 대구에서 열린다. 그런 상황에서 민희가 직접 대구로 내려왔다는 건 그녀가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는 것.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