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동욱은 배트 중 세 개를 우선 꺼냈다.
가방 안에 있는 것들은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는 배트가 대부분이다.
그 중 유일하게 깨끗한 배트가 있었다.
잘 보이지 않지만 담황색으로 된 배트에는 작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동욱아. 애 많이 썼다. 엄마는 충분하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열심히만 해.
그 아래에 적힌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6년 전, 한동욱이 프로로 처음 입단했을 날짜였다.
당시 어렵던 집안 살림에 프로가 쓰는 배트를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당신이 쓰지 않고 모은 돈으로 마음을 담아 축하 선물을 주셨다.
자신은 강동팔이나 남궁지완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들어온 프로가 아니었다.
턱걸이로 지명되어 2군에 들어간 것이 전부였다.
동욱은 어떻게든 프로에 있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그 사이 군대도 다녀왔다.
자신을 좋게 본 타격 코치 덕분에 제대 후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욱은 알고 있었다.
여차하면 가용할 백업이었을 뿐 주 전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자신은 국내에 많지 않은 스위치히터에 많은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오랜 시간 그를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격려와 위로였다.
그래서 동욱은 매번 가져오면서도, 입단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어머니께서 선물한 배트를 쓰지 못했다.
동욱은 배트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응… 부담 없이 열심히 할게. 엄마……."
서울로 올라오기 전과 경기에 나서기 전에 어머니와 통화했다.
그래도 경기 전,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기 위해 들여다보았다.
마음을 잡은 동욱은 다시 중얼거린다.
"오늘은 가지고 가볼까?"
한동욱에게 있어 큰 대회 경험은 많지 않있다.
지금은 매 경기가 그에게 있어 큰 경기였다.
내색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생각보다 긴장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동욱은 남들 모르게 어머니가 선물한 배트를 만지며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를 떠올렸다.
오늘은 어제처럼 중요한 경기다.
그런데 상대 투수가 한국 리그 최강인 강동팔이다.
서로 상대하는 것이 껄끄러운 관계였다.
서울에서 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직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배트를 가져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욱은 다시 가방에 넣으며 생각했다.
'아냐. 그럴 필요까진 없잖아? 괜히 가져갔다가 잃어버리면 큰일이야.'
***
한편, 동팔은 평상시 자신이 끼는 글러브가 아닌, 낡은 글러브를 보고 있었다.
글러브 속에는 역시나 흠집이 많이 나고, 때가 많이 탄 야구공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너도 참 주인 잘 못 만나 고생 많이 했지.'
그 글러브와 야구공은 자신이 방출되기 이전에도 한 몸처럼 함께한 것들이다.
방출되면서 계약금도 반납해 남은 돈이 거의 없었다.
용돈을 받는 것도 눈치가 보여 이전에 쓰던 글러브를 아껴서 써야 했다.
그동안 재활과 재기에 힘쓰면서 굴리고 또 굴려 부드럽다 못해 해진 부분이 많았고, 어떤 부분은 작게 금이 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형태를 유지하는 건 그만큼 동팔이 관리를 잘한 덕분이었다.
이제 완벽히 재기하다 못해 초월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팔은 이 낡은 글러브와 야구공을 버리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버릴 수 없었다.
'정말 고생 많이 했지.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공허함과 허탈한 상태에서도…….'
동팔은 낡은 글러브와 공을 볼 때마다 그때를 떠올렸다. 그와 함께 여기에 오기까지 도와준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물러설 수 없어. 나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서라도……!!'
민희와 가족들 그리고 아마추어 리그에 뛰면서 만난 민철과 다른 사람들의 추억이 어린 물건이다.
자신을 응원하는 팬들과, 선망하는 시설의 아이들까지.
오늘은 한 경기의 승패가 큰 영향을 주는 포스트시즌이었다.
한국 시리즈로 가는 관문인 플레이오프.
오늘은 자신이 선발로 오른다.
처음 마운드에 올랐을 때에도 상당한 압박을 받았지만, 지금은 그 전부터 부담을 느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잠을 설쳐 피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정신을 맑았다.
"후우… 긴장하지 말자. 어차피 이건 건너갈 길이지, 목표는 아니잖아?"
스스로에게 그 말을 하며 마음을 다져나갔다.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은 오래지 않았다.
아무리 긴장했어도 동팔의 구위는 떨어지지 않았다.
1회 초는 가볍게 6개의 투구로 삼자 범퇴시켰다.
삼진은 없었지만 투구를 최소화하여 효율적으로 운영했다.
동팔이라고 삼진에 욕심이 안 나겠는가.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려놔야 했다.
2회 초에 첫 타자로 만나게 될 한동욱 때문이다.
처음 상대했을 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상대하는 것이 어려운 타자였다.
그리고 자신을 상대로 홈런을 친 유일한 타자였다.
계속 상대하면 할수록 유리한 쪽은 타자였다.
투수의 공은 보면 볼수록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플레이오프 시작부터 팬들이 기다리고 있던 동팔과 동욱의 맞대결이었다.
자연스럽게 지아의 팬들은 1회 초보다 더 높은 목소리로 응원했다.
"한동~욱 홈런!"
"한동~욱 홈런!!"
홈런이 나와도, 반대로 삼진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두 사람의 대결.
예상한 대로 두 사람의 접전은 앞선 세 타자를 합친 것보다 두 배 더 많은 12개의 투구를 소모하며 풀카운트까지 갔다.
따악~!!
포스트시즌 첫 맞대결의 결과는 2루타였다.
한동욱은 천하의 동팔에게 안타를 쳤다.
하지만 지아 선수들과 팬들은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이런… 이번 이닝은 끝났네."
"홈런 아니면 어떻게 점수를 내냐?"
"후속타가 터지겠어?"
그들의 예상대로 이어지는 세 타자가 삼진과 외야 플라이로 아웃되는 바람에 점수를 내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됐어. 이 정도면 충분히 선방한 거야. 홈런 빼고 다 괜찮아. 그리고 맞더라도 한 점짜리 홈런 정도는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으니까."
RG에선 지아에게 주는 점수를 최대 3점으로 보고 있었다.
그건 전부 한동욱이 집중 타격하여 홈런을 쳤을 경우 그리고 그 앞에 주자가 없을 것을 가정한 수치였다.
하지만 한동욱이 전 타석에 홈런을 친다는 보장은 없었다.
삼진은 잡기 어렵고, 타율이 높다.
고의로 볼넷을 주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라 투수가 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더욱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동욱을 못 잡을 건 아니다.
다른 타자에 비해 쉽지 않을 뿐, 외야플라이나 범타를 이용하여 아웃카운트를 잡을 수 있었다.
그래도 타선에선 최악을 감안하고 움직여야 승리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동팔을 제외하면 RG의 높은 투수의 벽은 한동욱에게 소용없었다.
하지만 다른 선수들은 아니었다.
그러니 홈런을 맞더라도 주자만 쌓지 않으면 승리할 확률이 더 높아졌다.
그중 한동욱과 만나는 때는 최소 3회, 많으면 4회로 예상됐다.
그보다 더 많을 수 있지만, 그럴 땐 지아의 타선이 폭발하거나 주자를 많이 내보냈을 때의 일이다.
그 정도의 상황이면 이미 많은 점수를 잃은 뒤라 RG의 타선도 폭발하지 않는 이상 패배가 확정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항상 믿을 수 있는 동팔이라면 혹시라도 그럴 일이 없으니 실점의 고비는 세 번이었다.
그중 하나를 넘겼으니 오늘 경기의 실점은 최대 2점으로 줄어들었다.
다음 고비인 4회 초가 되기 전에 RG는 중심타선을 주축으로 2점을 만들어 내는 것에 성공했다.
점수는 2대 0.
4회 초가 되고 동팔은 앞선 두 타자를 간단히 잡았다.
그리고 이번 경기의 두 번째 고비인 한동욱의 두 번째 타석의 순서가 돌아왔다.
붕붕~
앞선 타석에서 2루타를 쳤지만, 자신을 제외한 모든 타자들이 동팔에게 봉쇄를 당하니 소용이 없었다.
'3루타를 쳐도 무의미해. 역시 처음 상대했을 때처럼 내가 홈런이라도 쳐야 하나?'
아무리 진루를 많이 하고 멀리 쳐도, 홈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점수가 되지 못한다.
진루한 것을 포인트처럼 적립해 점수로 인정하는 것도 아니니 무조선 홈으로 들어와야 한다.
타자 혼자서 진루는 할 수 있지만, 그 이후엔 다른 타자들의 도움과 상대팀의 실책이 있어야 한다.
후발 타선은 대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믿을 수 없었다.
상대팀의 실책을 기대하자니 동팔의 너무 압도적인 구위로 눌러버렸다.
당연히 한동욱으로썬 운신의 폭이 줄어들었다.
리그 중반 이후론 안타를 쳐도 다른 타자들이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불가능한 상황.
그리고 강동팔은 한동욱이 상대하는 것이 어려운 뛰어난 투수였다.
두 번째 맞대결은 강동팔의 승리로 끝났다.
따악!!!
노렸지만, 빗맞은 타구.
타구는 멀리 뻗어나가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던 좌익수가 가볍게 잡았다.
그리고 나중에 7회 초가 되어 다시 두 사람의 마지막이 될지 모를 대결이 벌어졌다.
하지만 긴장감 때문인지, 마지막 타석에 선 한동욱은 간만에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결과는 4대 0으로 RG의 승리였다.
많은 관심을 받은 경기였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결국 RG랑 지아가 붙은 게 아니라, 동팔이랑 동욱이 맞붙는 경기였잖아."
"심심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심심해?"
"치고박고 막으면서 치열하게 할 줄 알았는데."
한동욱이 중간에 솔로 홈런이라도 쳤다면 분위기는 달아올랐겠지만 지아의 영패로 인해 김이 새고 말았다.
하지만 플레이오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 2차전은 RG가 승리했지만 뒤이은 3, 4차전은 지아가 다시 저력을 발휘하면서 2승 2패로 만들었다.
결국 플레이오프가 5차전까지 가게 되자 많은 팬들이 승부의 결과를 직접 보기 위해 잠실구장을 찾아왔다.
RG의 작전은 이번에도 단순했다.
"한동욱에게 한 방 맞아도 되니까 다른 타자들이 나오지 못하게 어떻게든 틀어막아. 이번에는 모든 투수들이 짧게 치고 갈 거니까 전부 대기하고 있어."
특별히 더 많은 분석을 하지 않았다.
이미 앞선 네 번의 경기로 인해 선수들은 상대방의 특징과 버릇을 알고 있었다.
특별한 작전이 아닌 이상 그들에게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투수들은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임상훈 감독은 타자들을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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