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111화 (111/325)

[111]

"네가 야구를 포기하지 않으니 혜진이 입장에선 너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테니까."

동팔은 머리를 크게 맞은 것만 같았다.

그 사이 지완의 말은 이어졌다.

"사람이 도움만 준다고 끝이 아니야. 도움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 혜진이가 너와 사귄 이유는 네가 야구밖에 모르는 바보였기 때문이야.

그 이외의 것은 자신이 어떻게든 뒷바라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아까 말했다시피 네가 실패했어도 그동안 사귄 인연과 애정으로 함께하려고 했는데… 혜진이 마음을 모르고 야구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너야. 혜진이 진짜로 원한 것은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줌으로써 받아들여진다는 거였는데… 넌 그걸 전혀 캐치하지 못했어.

"

지완은 그 말을 하고 편하게 등받이에 기대면서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몰랐지. 완전 철벽이더라. 내 위치랑 연봉을 자랑해도 씨알 하나 먹히지 않았어. 우연찮게 너무 아파서 마지막으로 목소리나 듣자고 전화한 것이 반전이었지. 설마 집까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거든. 아주 잠시였지만. 죽 하나 사들고 오더니 빨리 나으라는 말만 해주고 갔다. 그 이후로 나도 전법을 바꿨지… 설마 이렇게 잘 먹힐 줄은 몰랐어."

지완의 말에 동팔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정말? 정말로 혜진이가… 그래서 나를……?'

동팔은 성공해서 가족은 물론 혜진이도 편하게 살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야구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단순히 월급을 받는 삶으론 만족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야구를 좋아하는 자신이었기에 자체를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혜진과 갈라서게 된 계기였음은 꿈에도 몰랐다.

"그 이후로 내가 많이 의지했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약한 게 혜진이야. 하긴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이 닮긴 닮았지. 남을 많이 생각하는 건… 특히 약하거나 힘들어 하는 사람에겐 더욱."

동팔은 지완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정신이 얼떨떨했고, 그동안 혜진을 속물처럼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래… 혜진이랑 결혼하는 건 어쩔 수 없지. 그런 쪽으로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니까. 그런데… 이미 많은 것을 가진 네가 왜 그 녀석이랑 계약한 거지? 고작 야구를 더 잘하겠다는 것에 목숨이랑 영혼을 걸어?"

그렇지 않고서야 남궁지완의 급격한 구위와 기록 향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전이라면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도핑을 의심했겠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떤 종류의 힘을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와 계약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현상이야. 제구력도 그렇지만 구속을 끌어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 짧아.'

동팔의 말에 지완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네가 그 말을 할 자격이 있어? 악마와 계약하지 않고 순수하게 노력하는 선수들을 농락한 너희들이? 이런 힘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순수하게 달려들었던 내가 미련했지."

지완의 말에 동팔이 말했다.

"내가 말한 요점은 그게 아니잖아. 나와 동욱이 계약한 건 더 이상 물러날 것이 없고, 잃을 것도 없는 상황이라서였어. 하지만 넌 아니잖아. 오성의 에이스에 투수 중에서도 뛰어난 실력으로 인정을 받는 네가 왜 모든 것을 버리고 계약한 거야? 나중에 혼자 남게 될 혜진이랑 네 아기는?"

동팔은 지금 지완의 제일 큰 걱정을 바로 찔렀다.

그러자 지완의 눈썹도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네가 신경 쓸 일 아냐. 혜진이는 너랑 관계없으니까 이젠 신경 꺼. 청첩장도 어디까지나 혜진이가 너에게 너무 미안해해서 전해주지 못하니 대신 하는 거야. 아, 혜진이한테 이건 말하지 않았으니까 괜한 오해는 하지 말고."

"그건 신경 안 써. 민희한테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는 거야. 이미. 내가 묻고 싶은 건…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무얼 얻으려는 건데? 명성? 지위? 다른 사람이 세우지 못할 기록?"

동팔의 물음에 지완이 답했다.

"널 이기고 싶었다. 서로 동등한 상태에서."

지완의 말에 동팔은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뭐? 고작 나 하나 이기려고 미친 짓을 해?"

동팔의 말에 지완이 발끈했다.

"고작? 나한텐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어. 그런데 그 산이 부상이라는 이유로 갑자기 사라졌다고. 평생 동안 네 그늘에 가려진 내 자존심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래. 몰라. 하지만 그게 네 모든 것을 버릴 만큼 중요한 건 아니잖아. 항상 잘나가고 주목받다가 나 때문에 안 되니 그게 그렇게 분했냐? 방출되지 않고 꾸준히 성장하고, 혜진이를 데리고 간 것도 모자라서?"

"그래. 모자라. 혜진이를 노린 것도 널 이기려는 마음에 시작한 게 맞아. 그래서 계약했다. 됐냐? 적어도 너를 제대로 이기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을 절대로 바꾸지 않는 지완을 보자 동팔은 절로 이빨이 갈렸다.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어차피 우리 둘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냐. 라이벌이니 뭐니 하는 것도 주변에서 떠들 뿐인 거지. 나는 나고, 너는 너일 뿐인데. 야구는 투수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냐."

동팔의 말에 지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좋겠네. 이전처럼 난 너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구나. 하긴 말이 라이벌이었지, 네가 날 신경쓴 적이 있기나 했겠어.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네 뒤에 있는 게 당연하다… 그 말이야?"

지완의 비꼬는 말에 동팔은 속이 답답했다.

"사람이 말을 했으면 그대로 좀 받아들여라."

"그럴 수 없으니까 문제지. 그동안 네가 날 보아온 눈빛이 뭔지 알아? 그건 무시야. 너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눈빛. 나는 그걸 참을 수 없어."

지완의 말에는 그동안 느껴온 모멸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동팔은 그 사실을 인지한 적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동팔에게 지완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이름을 들었고, 라이벌로 엮이다보니 종종 만났을 뿐이다.

실제로 그를 집중해서 본 적이 없었다.

혜진이 자신과 결별하고 나서, 지완과 같이 있던 프로필 사진을 보고 겨우 인식했다.

"그래서 확실히 각인시켜 줄게. 네가 이젠 절대 무시할 없게 만들 테니까."

지완의 말에 동팔은 잠시 동안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깊은 상처를 받았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어떻게 만나는 모든 사람을 기억하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특히나 고교생 때엔 오직 야구에만 집중하던 때였다.

심지어 지금 사귀고 있는 민희도 기억하지 못할 때였으니 지완의 말은 억지가 심했다.

하지만 동팔은 그 말을 해도 이 상황이 그리고 지완의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넌 계약한 걸 후회하지 않아?"

"응. 후회하지 않아. 너처럼."

지완이 말에 동팔이 말했다.

"아니, 난 후회해. '차라리 계약을 하지 않았더라면 야구가 아닌 또 다른 행복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라면서."

"……!!"

예상치 못한 동팔의 말에 매섭던 지완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동팔의 말이 이어졌다.

"야구를 계속 하는 건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려는 욕심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처음에는 남들이 좋아해 주기 때문에 야구를 했는데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을 때의 허탈함은 생각보다 컸어.

내 인생이 부정당하고 무너진 느낌이니까. 공든 탑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나 싶었고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어. 야구를 포기하면 내 인생도, 삶도 부정당한다 생각했거든.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여유를 두고 생각해보니 아니더라고.

"

동팔은 그 말을 하고 지완과 같이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네 말을 듣기 전에는 몰랐지만 내가 야구를 완전히 포기했다면 난 민희가 아닌 혜진이랑 같이 오손도손 살았을지도 몰라.

아마 거의 그렇게 되었겠지. 그렇다고 민희가 싫다는 건 아냐. 내가 힘들었을 때 제일 큰 힘이 되어주고, 목숨까지 건 아주 고마운 사람이야. 설령 혜진이가 널 선택해도 상관없어. 어떻게 되든 나는 민희랑 이어지고, 가정을 이루며 소소한 행복 속에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며 늙어갔겠지.

"

동팔의 말에 지완이 물었다.

"그래서… 무엇을 후회한다는 건데? 넌 최고의 투수야. 월드시리즈 우승도 꿈이 아닌 녀석이?"

"맞아. 꿈은 아니지.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건 참 좋아. 그런데… 시간이 너무 없어. 이제 남은 시간은 3년이야. 구위를 최고로 끌어올렸지만 나는 한국이라는 작은 리그의 우승조차 하지 못했다. 준우승도 대단하긴 하지만… 월드시리즈 우승보다 무게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잖아? 넌 너 혼자의 힘으로 월드시리즈 우승할 수 있어?"

"……."

"못할 거야. 너도 알다시피 야구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내가 후회하는 건 이거야. 내 주변에 있던 작지만 소중한 행복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허영심에 눌려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물러설 생각은 없지만 나 말고 다른 녀석도 미련한 선택을 했다는 것이 황당하고 또 화가 난다."

지금 동팔이 지완에게 화를 내는 건 스스로를 향한 책망과도 같았다.

특히 자신과 달리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그가 가지고 있던 행복을 모르고 버리는 모습은 더욱 분노가 치밀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한 대 때리게? 정신 차리라고? 하지만 이미 늦었어."

지완의 비꼬는 말투에 동팔은 진지하게 답했다.

"아니, 한국 시리즈에서 보자. 거기서 나와 네가 왜 다른지 보여줄 테니까."

처음에는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을 채간 나쁜 놈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많이 미워했고, 원망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앙금은 남아 있지만 혜진이 그의 아기를 가진 이상 갈라서게 만들 생각은 없다.

지완의 말대로 그건 이미 끝난 일이다.

지금은 주변사람들의 기대와 행복을 악마와의 계약 따위로 팔아먹은 지완에게 제대로 알랴주고 싶었다.

지완은 동팔의 마음을 전혀 모르고 여전히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한국 시리즈? 그 전에 플레이오프에서 이기고나 와. 우산이 올라올 거라 말하지만 어제 경기에서 보니 지아도 장난 아니더라. 특히 너랑 날 고전시킨 한동욱은 우리가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괴물이던데. 고의 볼넷이 아니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더라. 작년에 포스트시즌 규정이 추가돼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지아는 빠르게 탈락했을 걸."

이번 와일드카드에서 CK가 한동욱을 상대로 고전한 이유가 새로 추가된 규정 때문이다.

"별거 아닌 것 같은 규정이지만, 그 규정 때문에 한동욱을 상대하는 투수들이 미치겠지. 감독 입장에서 한 선수를 보내려고 투수를 계속 바꿀 수도 없고……."

지완의 말에 동팔이 말했다.

"그건 어떻게든 할 거야. 그런 걸로 걱정하지 말고 한국 시리즈 준비나 잘 해. 거기서 나랑 볼 테니까."

"뭐, 그러시든지. 매 경기마다 나서는 한동욱이랑, 많아봐야 두 경기 나올 수 있는 너. 이 둘 중에 누가 더 유리한지는 뻔하지만."

여전히 이죽거리며 삐딱한 남궁지완의 말투.

동팔은 더 말해봤자 소용없음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그때가 되면 너도 알겠지. 그리고 혜진이한테 전해 줘. 결혼 축하한다고. 그리고 이전 일은 신경 쓰지 않으니 미안해 할 필요 없다고.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고."

그리고 지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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