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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경기에선 지아의 젊은 선수들이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이런 큰 경기에서 제일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평정심입니다. 평정심을 유지하게 해주는 좋은 건 역시 경험이죠. 어제 경기는 절박함으로 뛰었지만 지금은 강한 압박을 느끼고 있을 지아의 선수들입니다.]
[사실상 지아의 이번 시즌은 리빌딩이 목표였습니다. 지아의 임기태 감독이 시즌 초반에 그 말을 안 했습니다. 리그를 시작하자마자 리빌딩을 공식적으로 선언해 버리면 사실상 시즌 포기와 다를 바가 없죠. 하지만 팬들은 이미 짐작하고 내년에 더 나아질 팀을 기대하며 참아왔는데 생각보다 빨리 성과가 나왔죠?]
[그렇습니다. 시즌 중반을 넘어서까지 지아는 오직 한동욱 선수에게 많이 의존했습니다. 후반기에 들어서 성장한 젊은 선수들의 감이 오르면서 하나하나 따라잡았고, 결국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않았습니까.]
방송화면은 그들의 모습이 아닌 지아의 변화 그래프를 보여주었다.
숫자를 말할 필요가 없도록 그래프 통해 보완해 주었다.
[기록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토너먼트에선 기록이 전부는 아니죠. 상승세를 타고 있는 지아인가 아니면 그동안 4위를 수성해 온 저력을 지닌 CK인가. 오늘 결판이 납니다. 그럼 이번 경기의 관전 포인트는 무엇일까요?]
[항상 그렇듯이 지아의 경기는 한동욱 선수를 어떻게 막느냐가 관건입니다. RG의 강동팔, 오성의 남궁지완 선수를 제외하면 그를 막을 투수가 없습니다.
막을 수 없으니 피해야 하는데 고의 볼넷을 줄 수가 없어요. 거기다 홈런 기록에 가려져 있지만, 이번 시즌 도루가 65개입니다.
성공률은 7할. 나가도 성가신 선수죠. 한동욱 선수가 흔들고 뒤이어 나온 타자가 안타를 치면 기본이 3루는 갈 겁니다. 거기에 희생플라이든, 뭐든 작전을 걸면 절반 이상은 점수가 납니다.]
해설위원의 말이 나오자 한동욱의 이번 시즌 기록이 화면에 나왔다.
한동욱은 이번 시즌 62개의 홈런, 65개의 도루, 0.639의 타율과 100개가 넘는 볼넷을 기록했다.
도루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독보적인 1위였다.
[무엇보다 토너먼트는 실책의 유무가 큽니다. 기록상으로 보면 의외로 지아의 실책이 제일 적습니다. 이것도 한동욱 선수의 영향이 큽니다만, 팀으로 따져도 적습니다.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선 지아가 유리하겠군요. 물론 기록대로 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만.]
중계진들만이 아니라 두 팀의 팬들 그리고 순수한 야구팬들이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구를 포함한 간단한 행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경기가 시작되었다.
CK의 홈경기였기에 지아의 공격이 먼저였다.
1회부터 승부가 갈리진 않지만, 지아의 선수들은 어제의 경기보다 더 집중하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4번 타자인 한동욱이 타석에 서기 전까지 아웃된 타자는 1명뿐이었다.
두 명은 각각 안타와 볼넷으로 1, 2루에 진루한 상태였다.
1사 주자 1, 2루의 상황.
이번에 오른 타자는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타자이자 세계에서도 톱클래스에 속할 한동욱이었다.
'하아… 저걸 어떻게 처리하지……?'
마운드 위의 투수는 한동욱이 올라오자 절로 어깨가 굳었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해도 이번 경기에 걸린 것이 많으니 위축이 되었다.
아직 사람들은 모르지만, 어제 CK가 더 많은 경험을 가졌음에도 진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한동욱이란 상대가 커도 너무 컸다.
고의 볼넷이 아니면 상대할 수 없는 타자.
제대로 승부를 하는 순간, 안타나 홈런을 허용하고 만다.
운이 좋아야 범타다.
특히 리그 중일 때와 달리 토너먼트라 심리적인 흔들림은 더욱 컸다.
한동욱 한 사람에 의한 흔들림이라면 승패에 큰 영향은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가 있더라도 한 명의 선수로 인해 승패가 갈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젠 한동욱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도 신경 써야 했다.
지아의 투수들도 리그를 거치며 성장하여 쉽게 안타를 맞지 않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 하나의 결과인 점수를 만들고 그 정점에 한동욱이 있었다.
'먼저 치기 힘든 몸 쪽 낮은 곳으로 가고, 다음에는 바깥쪽으로 빼자. 그 다음에는 좀 빠지는 걸로 가면… 고의 볼넷이라는 말은 듣지 않겠지.'
투수도 처음부터 한동욱을 상대로 승부를 볼 생각이 없었다.
뛰어난 선구안에 최강의 타격능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슬럼프 한 번 겪지 않은 선수.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으니 적당히 넘어가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투수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휙~!!
한동욱은 공을 보자마자 어디로 향할지 알았다.
'몸 쪽.'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나서 보내면 볼이 된다.
안쪽 아래쪽이라 치더라도 장타가 될 가능성은 낮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타자의 경우에 해당했다.
슥.
처음부터 초구를 칠 생각이던 동욱은 이미 레그킥을 시작했다.
띄었던 발을 디뎠을 때 처음과 달리 바깥쪽으로 살짝 빠졌다.
동욱은 타격지점에 힘을 제대로 싣기 어려운 뒤쪽보다 앞쪽을 감안하고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한동욱은 원하는 지점을 정확히 맞췄다.
레그킥도 제대로 해서 힘도 역시 잘 실렸다.
이대로 가면 2루타는 확실했다.
이미 1, 2루의 주자들이 뛰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싹쓸이 2루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한동욱은 거기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타점을 앞으로 하는 당겨치기라 밀어서 힘을 싣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한동욱은 짧은 그 순간까지 힘을 조금이라도 더 싣기 위해 배트를 단단히 쥐며 팔을 이용하여 밀었다.
공이 떠나자 한동욱은 배트가 내야지역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손잡이 끝에 손가락을 걸어 바깥으로 날렸다.
의도하지 않게 빠던(빠따 던지기의 줄임말, 메이저리그에선 배트 플립(Bat Flip)이라 부른다)을 하게 된 한동욱.
하지만 그를 포함해 투수조차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과연 공은 어디로 날아갈 것인가?
한동욱의 타구는 파울지역과 홈런지역을 구분하는 기둥을 향하고 있었다.
마침 운이 좋게 공은 바람을 타고 홈런 지역으로 향했다.
"와아아아아!!!"
홈런에 CK의 팬들을 제외한 모든 관중이 환호성을 질렀다.
투수는 멍하니 공이 넘어가는 것을 보았고, 주자와 한동욱은 루상을 빠르게 돌며 점수를 3대 0으로 만들었다.
그 이후 CK도 분전하여 어떻게든 점수를 내며 따라붙었지만 결과는 8대 7의 난타전으로 준플레이오프에 지아가 진출하게 되었다.
지아가 CK를 누르고 준플레이오프에 진출을 확정지은 다음 날.
동팔은 지완과 만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예약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레스토랑이었다.
식사가 목적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한국 최고의 투수인 두 사람의 얼굴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한 사람만 있으면 닮은 사람인가 하지만, 둘이 같이 있으면 의심이 확신으로 변할 것이다.
이곳은 유명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레스토랑이라 서로를 알아보아도 호들갑을 떨지 않고 모르는 척 넘어갔다.
공개된 카페나 식당보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보긴 오랜만이야. 리그 중일 땐 만나서 이야기하기 힘들었는데 지금에서야 제대로 이야기한다."
"선수가 다 그렇지. 우린 서로 연고지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잖아. 20살 때는 집이라도 가까웠지만, 내가 오성에 이적한 다음에 대구로 갔으니."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동팔은 많이 불편했다.
'혜진이 이야기는 안 꺼내네. 그것 때문에 서로 얼굴 마주치지 않으려는 줄 알았는데…….'
한 남자는 한 여자의 이전 애인 그리고 다른 남자는 그녀의 현재 남편이다.
자연스럽게 헤어진 것도 아니라서 과거는 과거라며 웃으며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동팔이 피하지 않은 건 그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였다.
"민희한테 이야기 들으니 혜진이랑 결혼했다면서?"
"민희? 아… 맞다. 이전에 혜진이가 말한 그 아가씨구나. 너랑 사귀고 있다는 아가씨. 예쁘고, 착하고, 능력 있다고 칭찬 많이 하더라."
"그래? 혜진이가……."
앙금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오랜 시간 사귀어 분명히 지금도 혜진이란 이름을 들으면 마음 한편이 욱신거렸다.
그 배경에 지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당시엔 그를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것도 2년의 시간이 지나고, 민희와 사귀게 되면서 많이 사그라졌다.
그렇다고 짜증이 안 나는 건 아니다.
지금 만나고는 있지만 동팔은 여전히 그가 껄끄러웠다.
"그런데 왜 만나자고 한 거야? 줄 게 뭔데?"
"아~ 그거? 여기 있어."
지완은 청첩장을 동팔에게 주었다.
동팔은 단번에 이 청첩장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았다.
바로 자신의 앞에 있는 지완과 헤어진 애인 혜진이란 것을.
동팔은 청첩장을 받고 확인한 다음 말했다.
"지금 나한테 도발하는 거냐?"
동팔은 지완이 자신에게 청첩장을 왜 굳이 직접 주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자 지완이 답했다.
"도발은 무슨. 이미 끝날 일 가지고 아직도 좀스럽게 틀어박혀 있을 거야? 화가 나고 짜증나겠지만 당시의 혜진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선택 아니겠어?"
"아… 그때 넌 잘 나갔으니 자기 인생을 위해 애인 버린 것을 이해해 달라… 뭐 그런 거야?"
동팔은 혜진이 자신을 떠나고 지완을 선택한 이유가 그런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자신은 누나를 통해 중견 회사에 겨우 들어간 신입사원이었다.
지완은 오성의 에이스로 자리를 잡았던 때.
동팔의 말에 지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야… 이 자식… 혜진이랑 오래 사귀었다고 해서 잘 아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잖아. 야, 넌 혜진이가 고작 그런 이유로 너랑 헤어졌다고 생각했어? 혜진이가 어떤 앤데 오래 사귄 정을 떼다 시피하고 헤어지려 했을까? 그렇게 강한 혜진이가."
지완의 말에 동팔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럼 넌 혜진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데?"
"그야 네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지. 혜진이가 널 버리고 날 선택한 진짜 이유를."
동팔은 지완이 왜 그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에 혜진이 자신을 버리고 간 것은 창창한 미래가 사라진 자신이 싫어서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 생각을 하는 사이 지완의 말이 이어졌다.
"혜진이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속물이 아냐. 네가 실패해서, 다른 일을 하게 되었어도 끝까지 함께하려 했어. 둘이 같이 벌면 어떻게든 함께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넌 그렇게 하지 않았잖아. 넌 끝까지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어. 그게 혜진이의 마음을 얼마나 허탈하게 만들었는지……."
"내가… 야구를 포기하지 않아서? 그게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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