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승협이는 둘째 치고라도, 오성의 우승에 제물이 될 필요는 없어. 경기에 무기력하게 임하다 실책이 쏟아지면 팬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 시즌 마지막 경기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
그 뒤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후에 연봉 협상을 위해 아무리 포스트시즌 진출이 물 건너갔더라도 내년을 대비해야 했다.
팀의 성적은 좋지 않더라도, 선수 본인의 성적이 그나마 괜찮으면 연봉이 깎일 일은 없었다.
오직 실력으로 모든 것을 평가받는 프로이기에,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가족들만 아는 강제 은퇴를 당하게 된다.
프로는 오직 운동만 하고 온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성적이 좋지 않아 밀려나면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많지 않았다.
다른 공부를 시작하거나 아니면 동팔같이 아는 사람을 통해 겨우 회사에 들어간다.
그것도 아니면 개인 사업을 시작하든가, 눈치를 보며 다른 일을 계속 알아봐야 했다.
그게 싫다면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어떻게든 팀에 붙어 있어야 했다.
실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의지였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이기려는 의지가 없어 어이없는 실수를 하게 되면, 감독은 그 선수를 경기에 내보내도 괜찮을지 걱정한다.
슬럼프가 있으니 실력만을 보고 연봉을 결정하지 않았다. 운도 생각해야 했다.
팀과 동화되지 못하고 노력하지 않으며, 실전에서 실수가 많으면 계속 데리고 있어야 하는가 고민하게 된다.
선수들은 프런트에 자신들은 항상 뛸 준비가 되어 있으며, 항상 노력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최선을 다했다.
그 기회가 마지막이라면 더욱 불사르며 경기에 임해야 한다.
이번에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화나의 선수들과 코치들.
감독도 예외는 아니라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끝내어 유종의 미라도 거두어야 했다.
그걸 알아도 화나의 팬들은 마음이 꺾이고 있었다.
"오늘 오성 선발이 남궁지완이라면서?"
"끝났다. 끝났어.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현수막은 올해도 보겠지. 그것도 진 경기에서……."
내년의 희망을 보기 위해선 이기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팬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팬들의 기대는 분노로 바뀌게 된다.
"상대가 강동팔과 비견된다는 남궁지완이니 점수를 내는 건 기대하지도 않아. 하지만……."
"수비에서 실책하면 가만 안 둔다……."
팬들이 생각하는 실책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놓치는 게 아니라 잡을 수 있는 타구를 잡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날 화나의 선수들은 전에는 잘 보여주지 않던 환상적인 수비 능력을 보여주었다.
화나의 마운드에선 투수가 한두 이닝마다 바뀌었다.
어차피 마지막 경기기에 체력 관리를 위해 투수를 아낄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든 막을 수 있는 건 막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화나. 선수들도 집중에 집중을 하며 오성이 점수를 얻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버티긴 버틴다."
"화나에서 지금 던지는 투수가 몇 번째 투수냐?"
"몰라. 한 다섯 번째? 6이닝까진 두 이닝에 한 명이었는데 나중엔 이닝이 안 채워져도 타자 한 명 상대하면 바로 바꾸기도 했잖아."
"그런데 오성은 남궁지완 한 사람으로 9회까지 간다. 역시 저력이 있다는 건가… 투구 수가 이제 90개던가?"
"아마도."
그의 말에 맞게 9회 초에 올라온 투수는 남궁지완이었다. 마무리가 바뀌면 혹시 모른다는 기대감이 화나의 팬들에게 있었다. 하지만 또 남궁지완이 올라오자 기대는 사라지고 말았다.
"연장전이라도 기다려야 하려나……."
"그래도 0대 0이니까. 혹시 모르지……."
결국 남궁지완의 이어지는 등판으로 화나는 9회가 될 때까지 점수를 내지 못했다.
이어지는 9회 말 오성의 공격.
화나의 팬들은 기도했다.
"제발 이번 이닝도 무사히 넘어가라. 제발 무사히 넘어가라……."
그래야 연장전에 돌입하고, 지친 남궁지완을 보호하기 위해서 오성이 그를 내려 보낼 것이다.
오성은 포스트시즌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오성의 팬들은 전혀 반대로 기도했다.
"어떻게든 한 점만 내면 끝내기… 끝내기 가자."
"승협이 형님 은퇴하시는데 리그 우승 정도는 해야지."
"코시 직행해도 RG랑 우산이 만만한 팀은 아냐. 우승을 장담할 수 없으니 리그 우승이라도……."
그나마 유리한 쪽은 홈구장을 쓰고 있는 오성이었다.
하지만 9회 세 번의 기회 중 벌써 두 번의 기회를 날아가고 말았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하나.
이것마저 날리면 연장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남궁지완을 계속 마운드에 올릴 수 없는 오성이 불리하다.
그 상황이 바로 화나가 노리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끌고 가는 건 쉽지 않다.
단 한 점이라도 나오면 실패하는 작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방법이 아니면 남궁지완이 선발로 나온 오성을 이길 방법은 전혀 없었다.
단 하나의 실수나 실책을 하는 순간 와르르 무너진다.
그래서 화나의 선수들은 이전에 없던 집중력을 발휘하며 어떻게든 점수를 내지 않는 것에 집중했다.
투구 수가 많아져도 강한 타자는 최대한 걸렀다.
진루를 시켜도 홈에만 들여보내지 않는 것에 집중했다.
오성으로선 점수를 낼 기회가 몇 번 찾아왔지만, 아쉽게도 화나의 호수비에 의해 전부 막혔다.
이제 9회 말 2아웃 상황.
나가 있는 주자도 없는 오성이 경기를 끝낼 유일한 방법은 단 하나, 홈런이었다.
이번에 올라오는 타자를 보고 응원하고 있던 오성의 팬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승협!! 이승협!!"
처음에는 작았지만, 어느새 한 목소리가 되어 라이온스 파크를 가득 채웠다.
그들은 이승협에게 승리를 위한 홈런이나 안타를 바라지 않았다.
이제 정규 리그 마지막 타석이 될지 모를 이 순간을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염원만 있었다.
그걸 그가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었다.
타석에 선 이승협은 항상 그렇듯이 무표정이었다.
캐스터와 해설위원도 이 장면을 보며 중계를 계속해 나갔다.
[이거 흥미진진한데요. 마침 타석에 이승협 선수라니…….]
[연장전이 확정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정규이닝의 마지막 타석인 건 확실합니다.]
[이대로 아웃될지 아니면 안타를 때려 오성의 공격의 물꼬를 틀지. 그것도 아니면 홈런을 쳐서 오성의 리그 우승을 확정지을지 기대가 됩니다.]
한편, 동팔은 생각보다 간단히 이번 경기를 마무리했다.
따악!!!
[큽니다! 큽니다~!! 홈런!!!]
[히네신스의 통쾌한 홈런으로 RG는 이번 시즌 리그 준우승을 확정지었습니다!!]
동팔의 압도적인 구위와 9회에 터진 홈런으로 RG가 승리했다.
하지만 아직 결과가 확정된 건 아니었다.
"이제 남은 건 오성과 화나의 경기인가?"
"지금 상황이 어떻지?"
경기가 빨리 마무리되어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같은 시각에 오성의 경기 결과에 따라 리그 우승과 준우승이 가려지니 RG로선 당연히 집중해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결과는 생각보다 빨리 나오지 않았다.
"지금 연장 들어갔다고 합니다. 11회예요. 여전히 0대 0이라고 합니다."
"뭐? 정말? 그럼 투수는?"
오늘 오성의 투수는 강동팔과 맞먹는다는 남궁지완이다.
분명 오성이 무실점으로 막았으니 연장까지 간 것일 터.
바꿔 말해 투수가 교체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오성의 타선과 투수들의 전력이 화나보다 더 탄탄하기 때문에 시간이 가면 더 유리한 것도 사실이다.
남궁지완이 아니더라도 화나의 타선을 막을 수 있는 뛰어난 계투진이 있었다.
그들은 오성이 선수 보호를 위해 남궁지완을 내렸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그들의 예상을 벗어났다.
"여전히 남궁지완입니다. 투구 수는 이제 110개네요. 잘 하면 12회까지 던질 지도 모릅니다. 연장 넘어가선 삼진보다 범타 처리로 효율적인 투구를 하고 있답니다."
오성 라이온스 파크.
11회를 넘어 12회를 넘어가고 있었다.
연장전답지 않게 아직 시간은 많이 흐르지 않았다.
점수가 많이 나지 않은 것이 주효했고, 연장전이 되면서 남궁지완이 주로 범타로 처리한 덕분이기도 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건 한국 프로야구 리그에서 정해진 이닝은 12이닝까지다.
그때까지 승부가 나지 않으면 무승부로 간주한다.
오성의 입장에서 무승부는 패배와 같았다.
[오성… 많이 힘들겠습니다. 남은 이닝은 12회 말뿐이에요.]
[무승부가 되면 오성은 RG와 같은 승차를 가집니다. 승률을 생각하면 RG가 더 유리하죠. 무승부도 RG가 더 많습니다. 이 경기가 무승부가 되면 승률에 의해 오성은 이번 리그를 준우승으로 마무리하게 됩니다.]
[오성은 지는 건 물론 무승부도 허용할 수 없습니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세 개. 이 기회를 살려야만 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남궁지완 선수가 어떻게든 12회까지 버티고 또 버텼다는 겁니다. 대선배인 이승협 선수의 명예로운 은퇴를 위해 헌신한 거예요.]
중계진들이 이야기할 때, 남궁지완은 오성의 더그아웃에서 얼음팩으로 찜질을 받고 있었다.
옆에선 그가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다른 선수들이 대신 얼음팩을 쥐고 찜질해주고 있었다.
"수고했다. 지완아."
"우리도 대비는 했지만 끝까지 던질 줄은 몰랐네. 어찌되든지 시간적인 여유는 있으니까 이제 무리하지 말고 잘 회복하그라."
연장 12회까지 가면 자연스럽게 불펜 투수는 물론 마무리투수도 단 한 점의 실점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연장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기고 있을 때만 가능하기에 단 하나의 실책이나 실투가 패배로 이어진다.
다른 경기보다 3이닝을 더 던져야 하기에 다른 경기 때보다 더 많은 체력을 소모한다.
그래서 연장전까지 갔을 때, 특히 12이닝까지 갔을 때 패배하면 그 다음 경기에 쓸 투수가 많이 줄어들게 된다.
승리하게 되면 고양감에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기지만, 패배하면 상실감이 그만큼 크다.
연장전 패배 이후에 그 팀이 타격을 크게 받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12이닝을 던지면서, 최대한 효율적인 투구를 하여 127개의 투구로 상대 타전을 봉쇄했다면?
그 팀은 불펜 자원을 아낄 수 있고, 설령 지더라도 다음을 충분히 대비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9이닝을 완투하는 것도 힘든데 그보다 더 긴 이닝을 던진다는 것은.
하지만 남궁지완은 그걸 해냈다.
남궁지완은 팀 동료와 후배 그리고 선배들의 독려에 간단하게 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