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101화 (101/325)

[101]

민희의 이야기

다행이다.

민희가 그때 느낀 감정이었다.

그동안 동팔의 앞에서는 가족에게 보여준 적이 거의 없는 조신한 숙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동안 보여준 적이 없었던, 하지만 가족들에게 자주 보여주었던 행동을 하게 되었다.

윽박지르고, 협박하고, 자신의 요구를 강요했다.

비록 그것이 동팔을 위한 것이고, 자신을 희생하는 방향이었지만 그에게 생소한 모습이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당시에는 죽으면 죽으리란 생각으로 그 말을 했지만, 막상 풀려나니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크게 밀려왔다.

상황이 바뀌자 걱정도 바뀌었다.

전에는 살고 싶은 마음으로 동팔이 나쁜 사람들과 엮이면서 선수 생활이 위협받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 동팔이 전처럼 자신을 사랑해줄지 자신이 없었다.

'가지 말까? 이렇게까지 나왔는데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동팔이 있을 잠실구장을 향하며 1초마다 마음이 수시로 바뀌었다.

마침내 도착하자 그녀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어떻게 하지? 차라리 나중에 만날까? 그래도 오빠가 걱정할 텐데?'

여러 생각이 밀려 들어왔다.

우선은 부정적인 생각이 밀려 왔다.

'이런 모습은 분명히 싫어할 거야. 그동안 좋은 모습만 보여줘서 충격이 컸을 것이 분명해.'

부정적인 생각만 드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야. 그래도 누나가 있으니 여자의 현실(?)에 대해 잘 알고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예상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아냐. 나는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더 실망했을 수도 있어.'

생각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바뀌었다.

실망과 절망에서 희망과 체념으로.

그러다 다시 부정적인 생각이 밀려왔다.

걸음을 잠시 멈출 때는 있었지만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그녀가 걸음을 돌리지 못한 이유는 바로 동팔 때문이다.

'그래도… 많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자신이 그에게 받아들여질지 아니면 멀어질지 알 수 없어서 두렵다.

하지만 그것보다 민희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은 동팔에 대한 걱정이었다.

공을 던지면서도 납치당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것이다.

이왕이면 동팔이 볼 수 있는 관중석으로 가는 것이 좋겠지만 이미 경기가 거의 끝나가는 상황.

가더라도 동팔이 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가 끝났다.

민희는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자 얼굴을 가리고 피했다.

시간이 지나 관중들이 거의 다 나갔을 때,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가자… 계속 피할 수 없잖아. 이왕이면 오빠가 걱정하게 하는 시간을 줄여야지… 경기가 끝나도 나랑 연락이 되지 않으면 분명히 죽은 줄 알 텐데…….'

자신보다 동팔을 더 걱정한 그녀의 마음이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었다.

그 전에 동팔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당시엔 인터뷰를 하던 중이었다.

결국 직접 만나는 수밖에 없어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자신을 막는 스태프.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저기… 동팔… 오빠한데 전해주시겠어요. 민희라는 사람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

구단 선수도 아니고, 선수 가족도 아니니 스태프는 민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단순히 전하는 거라 어려울 것도 없었다.

스태프는 솔직히 귀찮기는 했지만 정말로 동팔 선수와 아는 사람일 수 있기에 민희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희는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동팔과 그를 따라 같이 달려오는 선수들을 볼 수 있었다.

"민희야!!"

"오빠……!!"

걱정과 달리 동팔은 그녀를 보자마자 강하게 안아주었다.

자신의 얼굴이 조폭에게 맞아서 부어올랐는데도, 소리치며 악을 쓰는 모습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걱정이 사라지고, 동팔이 자신을 안아주자 민희는 이제야 다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호의로 의무실로 들어가 붓기가 빨리 가라앉을 수 있도록 얼음찜질을 받게 되었다.

민희는 그가 자신을 받아들여주었다는 안도에 긴장이 풀렸다.

의도하지 않게 그의 옆에서 깊은 잠에 빠진 민희.

그러다 동팔이 무언가 말을 하자 깊은 잠을 나와 선잠을 잤다.

민희의 귀에 동팔의 말이 흐릿하게 들려왔다.

"분명히 놀랐습니다. 민희한테 이런 모습을 있는 줄 몰랐죠. 하지만 이 정도 가면은 누구나 쓰면서 살아가지 않습니까? 고작 그 이유로 거리를 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자신에 대해 한 말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 거리를 둬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 그녀의 가슴을 따듯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누구랑……?'

대체 누구와 대화를 하는 것일까?

잠에 든 민희에게 한 말 치곤 이상했다.

그녀에게 하는 말이라면 분명히 다짐이나, 고백의 말이 되어야 했다.

지금 동팔은 민희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민희는 동팔이 누구에게 말하는가 싶어서 눈을 뜨려 했다.

그러나 눈꺼풀은 잘 열리지 않았고 겨우 벌어진 틈새를 통해 무언가를 보였다.

'남…자? 양복?'

어두운 양복을 입은 남자의 다리가 보였다.

구두는 빛을 흡수하는 것처럼 어둠 그 자체였다.

하지만 모습만 보일 뿐,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남자의 목소리만 들리지 않을 뿐, 동팔의 목소리는 몽롱한가운데서도 확실히 들렸다.

"의무감 때문이 아닙니다. 이건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일 뿐입니다. 헤어지는 때가 온다면 그때 생각하면 될 일이죠. 지금은 나에게 모든 것을 던진 사랑스러운 사람과 어떻게든 함께할 생각을 할 때입니다.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걱정하는 바람에 소중한 현재를 잃어버릴 수 없어요."

틀림없이 앞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동팔의 말이 끝나자 그는 몸을 돌리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응? 뭐지…? 헛것을 봤나?'

만약 의식이 멀쩡한 상태였다면 귀신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잠에 취한 상태였는지 마취가 된 것처럼 의식의 감각은 둔했다.

덕분에 놀라지 않고 눈을 거의 감은 상태로 있었다.

민희는 방금 전에 본 것이 무엇인가 알고 싶었다.

'누구? 의무실 사람? 하지만 하얀 가운이 아니었는데? 그러면 선수나 코치, 감독님? 하지만 유니폼이 아니잖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민희는 자신을 향한 동팔의 고백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가 사라지고 동팔은 민희의 얼굴을 아프지 않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민희는 다시 깊은 잠에 빠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동팔이 자신에게 한 고백으로 인해 민희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고 깊은 잠에 다시 빠졌다.

"사랑하면 되잖아. 상냥한 모습이든, 드센 모습이든, 민희는 민희니까……."

각자의 위치 그리고 팀과 동료

민희가 풀려난 다음 날.

동팔에게 일어난 일은 언론에 알려지기도 전에 다른 구단의 선수들에게 알려졌다.

"오늘 동팔이한테 도박 조작단이 다가왔다던데?"

"오늘은 아니고 그 전이었겠지. 동팔이가 거부하니까 애인 납치해서 협박했다더라. 그런데 무슨 조작하라고 했더라?"

"그야 항상 나오는 볼넷이겠죠. 다른 건 조작하는 게 어렵지 않습니까? 삼진이 쉽게 나오는 것도 아니고."

특히나 자신들과 연관이 되어 있기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들에게도 이런 일이 언제 다가올지 모르고, 특히 도박과 연관되면 앞으로의 선수 생활은 물론 그 다음에 있을 코치나 감독의 길마저 막혔다.

"그런데 그놈들은 이상하네. 보통 연봉 낮은 애들한테 다가오지 않아? 볼넷 하나에 이, 삼백 받으면 혹하고 넘어갈 애들한테 가야 성공할 텐데."

"그게 안 되니까 납치를 했겠죠. 결과는 오히려 정반대가 되었지만."

"그건 그렇고 강동팔이도 대단해. 그런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다니. 나라면 걸리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넘어갈 수 있으니 들어줬을 지도 몰라."

"하지만 그 전에 자진신고하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그놈들 물고 늘어질 거예요. 돈 안 받는다고 해도 그냥 은행 계좌에 돈 넣어놓고 엮으려 할 겁니다. 그리곤 협박하면서 돈을 더 뜯으려 하겠죠."

그의 말에 선수들은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으아~ 그런 말하지 마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

"그러니까 자진신고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협박해도 나중에 우리가 더 유리한 상황에서 방어할 수 있으니까요. 난 이미 신고했으니 신고하려면 신고해라, 뭐 이런 식으로."

선수들은 도박단의 협박이나 제안이 왔을 때, 어떻게 거절할 것인지와 이후의 대처 방안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불안함을 알았을까, 각 구단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지? 오늘은 훈련하기 전에 불법 도박 제의가 들어왔을 때 선수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먼저 교육한다."

구단에서 하는 교육은 현실성을 많이 반영했다.

선수의 입장에서 최대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거절하는 방법과 거절할 수 없을 때의 방법을 교육해주었다.

가장 난감한 것은 동팔과 같이 주변인이 납치되었을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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