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97화 (97/325)

[97]

더그아웃에 들어온 동팔은 바로 불펜에서 공을 던져 몸을 풀었다.

공을 던지면서도 공팔의 머릿속엔 민희의 외침이 떠나지 않았다.

"볼넷 던지면 죽여버릴 거야!! 나만 죽을지 나랑 같이 죽을지 오빠가 선택해!!!"

그리고 이어졌던 날카로운 소리와 끊겨버린 민희의 말.

어떤 상황인지 모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지금 자신에게 남은 것은 결정하는 것이다.

조작단의 말대로 볼넷을 던질 것인지 아니면 민희의 처절한 외침대로 던지지 않을 것인지.

어느 쪽도 쉽지 않았다.

민희가 소중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 소중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자신도 모르게 쫓아다니던 팬. 그리고 나중에 회사에서 만나게 되었고, 지금은 서로에게 힘이 되는 서로의 반쪽 같은 존재였다.

혜진이와 헤어지게 되면서 힘들었던 마음을 민희가 와서 더 크게 채워주었다.

비록 지금은 악마의 계약으로 인해 조건적인 시한부 인생이라 민희와 결혼하는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민희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계약 조건을 완수하면 제일 먼저 찾아가 프러포즈할 사람이 민희였다.

그런데 그러기도 전에 민희가 죽게 된다면 그 상실감을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말대로 볼넷을 던지면 민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했다.

오히려 굴복한 자신을 떠나거나 어쩌면 정말로 자신이 말한 대로 동팔을 죽이고 자신도 죽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민희가 이렇게 말한 건 처음이잖아? 이런 모습도 있을 줄이야…….'

항상 뒤에서 응원하고, 힘들 때마다 위로를 해준 민희거 이렇게 바락바락 대들면서 소리를 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의도치 않은 상황에 예기치 못한 모습.

싫은 건 아니었지만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놀랐을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민희의 처음 보는 모습보다 더 중요한 건 그녀의 안전과 그녀의 부탁이었다.

결정은 쉽지 않았다.

동팔은 불펜에서 공을 던지며 몸을 푸는 사이에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악마의 계약에 의해 시간이 제한되어 있듯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가왔다.

"와아아아~~!!!"

경기가 시작되자 수많은 관중들의 환호성과 응원소리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지금 동팔에게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동팔의 귓가에 들리는 소리는 단 하나.

"볼넷 던지면 죽여버릴 거야!!"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민희의 처절한 외침이었다.

뿌드득.

마운드에 선 동팔이 이를 갈며 결정을 내렸다.

"후우……."

이전의 강속구를 던질 때의 습관이 아닌 스스로의 결정을 지키기 위한 심호흡을 한 동팔.

동팔은 상대하는 타자와 포수의 미트를 보더니 강하고 빠르게 공을 던졌다.

쉭~ 퍽!!

시속 155키로를 넘는 강속구에 타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평상시와 비교해 힘이 많이 들어간 동팔의 공에 포수는 페이스를 낮추라고 손짓을 한 다음 공을 던졌다.

포수의 사인에 동팔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페이스를 낮출 생각은 없었다.

'이제부터 가능한 모든 타자를 삼구삼진으로 잡는다. 이번 이닝만 아니라… 경기 전부!!'

어차피 혹사하더라도 내일 아침이면 다시 회복할 것.

비록 회복을 하는 사이에 겪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테지만 동팔은 큰 고통을 겪더라도 상관없었다.

만약 민희에게 끔찍한 일이 생긴다면 그 고통보다 더 한 고통이 마음을 뒤틀어버릴 것이다.

오히려 이 고통이 민희를 향한 아주 작은 속죄가 된다면 평생 동안 겪을 각오를 했다.

"후우……."

이미 공을 한 번 던졌다.

하지만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가 한 말처럼 주사위를 던지듯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동팔이 던져야 하는 공은 못해도 80여 개.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절대로 볼넷을 허용할 수 없었고, 그것을 위해 동팔은 초반부터 강수로 나왔다.

쉭~ 퍽!!!

이번에 나온 구속은 시속 159키로.

초반에150 언저리로 던졌던 페이스가 아닌 처음부터 전력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틈조차 만들지 않기 위해서.

처음에는 동팔이 너무 페이스를 올리자 감독과 코치들은 걱정했다.

"동팔이 오늘 왜 이러지? 왔을 때부터 무언가 굉장히 조마조마해하던데……."

"이러다 이닝 다 채울 수 있을까? 지금부터 160이면… 나중에 힘 빠질 게 뻔해."

그들이 체크하는 것은 단순히 공을 얼마나 많이 던졌느냐가 아니었다.

고의 볼넷과 같이 힘없이 던지는 것도 피칭 포인트로 올라갔다.

힘들이지 않고 120개의 공을 던지는 것과 전력으로 80개의 공을 던지는 것이 더 많은 체력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코치들은 투수가 전력으로 던진 공을 세고, 그것을 기준으로 투수 교체 타이밍을 잡아 나갔다.

특히나 팀에서 최고로 중요한 전력인 동팔은 더욱 집중해서 체크했다.

"이 상태면 7이닝에 교체할지도 몰라. 말해 둬."

"알겠습니다."

1회 초가 끝나자 코치는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동팔에게 말했다.

"동팔아. 페이스 죽여. 지금 너무 빨라. 이렇게 던지면 나중에 9이닝까지 못 갈 수가 있어."

"알겠습니다. 하지만 교체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상태로도 9이닝 이상 던질 수 있어요."

"그러면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구위가 떨어질 기미가 보이면 바로 교체할 거니까 미리 알고 있어라."

"네."

코치는 이렇게 전달하면 동팔이 알아듣고 올라온 페이스를 낮출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동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페이스는 여전히 높았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쉭~ 퍽!!

"스트~라이크! 아웃!!!"

말을 듣지 않은 동팔의 행동에 답답한 사람은 코치와 감독이었다.

"오늘 동팔이 진짜 왜 이러지? 사춘기야? 반항하게?"

"구위 떨어진다 싶으면 바로 내려. 너무 페이스가 올라가면 부상당할 위험도 커진다."

"알겠습니다."

불펜투수들은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슬슬 몸을 풀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구위의 저하를 이유로 동팔을 내리지 못했다.

쉭~ 퍽!!

"스트라~이크! 아웃!!!"

동팔의 공은 전혀 속도가 떨어지지 않았다.

모든 구종의 속도는 최고속으로 날아왔고, 제구력이 떨어졌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동팔의 공은 예리하게 타자의 빈틈을 노리고 들어왔다.

결국 9회 초, RG의 타자들이 점수를 내준 덕분에 9이닝으로 경기를 끝내버렸다.

상대가 약체 팀이긴 했지만 동팔의 위력적인 구위에 눌려 헛스윙만 하고 끝이 났다.

동팔은 응당 경기 최우수 선수로 뽑혀 인터뷰를 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MVP인 동팔에게 돌아온 것은 축하가 아닌, 야단과 호통이었다.

"야! 강동팔!! 너 진짜 나랑 해보자는 거냐? 잘나간다고 우리가 우습게 보여?!!"

코치는 물론 감독은 동팔을 생각해서 그가 또 다치지 않게 하려고 성심성의껏 움직였다.

그래서 동팔에게 페이스를 올리지 말라고도 했다.

하지만 동팔의 행동은 그들을 완전히 무시하며 시위하는 행동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동팔은 감독과 코치의 반응에 억울해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

"상황? 어떤 상황? 대체 어떤 상황이라서 우리를 싹 무시한 거야? 엉!!"

한 코치가 언성을 높이자 최고참인 강중근도, 프랜차이즈 스타인 박호택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동팔이 오기 전 감독과 코치가 한소리를 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모습에 동팔은 더 미안했고, 죄송스러웠다.

동팔은 시계를 보고 경기가 끝났음을 알자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

"사실… 애인이 납치당했습니다. 볼넷을 주면 풀어주겠다면서……."

동팔의 말에 감독과 코치, 선수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민희 씨가 납치를 당해?"

동팔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게 된 그들은 동팔이 왜 자신들의 말에 동팔이 따르지 못했는지 이해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진즉 이야기하지 그랬어. 어떻게든 구단에서 움직였을 텐데……."

"그놈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경찰에 신고하는 거야. 신고한다고 해서 그놈들이 경찰 전부에 사람 심어놓은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알겠어?"

"너무 그러지 마세요. 이런 상황에 누가 무서워서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서 동팔아. 혹시 연락 온 거 있어?"

그들은 그동안 마음 고생했을 동팔이 안쓰러웠고, 그의 애인인 민희가 무사한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던 중 스태프 한 사람이 들어와 강동팔에게 물었다.

"지금 어떤 여자 분께서 강동팔 선수를 만나고 싶어 하세요. 이름이 민희라고 하면 아신다고 하셨는데… 혹시 정말로 아시는 분이신가요?"

그의 말에 감독과 코치, 선수들이 동팔을 쳐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동료들과 같이 나온 동팔은 스태프가 인도하는 대로 먼저 나갔다.

동팔은 그곳에서 한 여자를 봤다.

얼굴이 부풀어 올랐지만 확실히 민희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민희야!!"

"오빠!!!"

동팔은 민희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절로 달려가 민희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민희도 볼넷을 던지지 않고, 자신의 말대로 해준 동팔에게 달려가 안겼다.

"미안해… 내가 말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동팔은 그저께 민희에게 조금 더 신신당부하거나 제의를 받은 사실을 말했어야 했다고 자책했다.

그랬다면 민희를 납치하는 것이 실패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민희는 알았다.

"아냐. 오빠. 어차피 알았어도 결과는 같아……."

그들은 능숙하게 민희를 납치했다.

사람이 없게 만들고, 민희가 반항할 틈도 주지 않고 마취시킨 후에 납치했다. 설령 민희가 사실을 알고 극도로 경계했더라도 그녀의 말대로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동팔은 그들에게 맞아 부푼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아프지 않고?"

"응… 괜찮아……."

민희의 안전이 확인되자 안도하는 사람은 동팔만이 아니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