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96화 (96/325)

[96]

"야. 바닥 치워. 그리고 줄 풀어."

보스의 명령에 그들은 그대로 했다.

줄이 풀리자 보스가 민희에게 말했다.

"경기 끝나기 전까지 끝난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여기 어차피 호텔인 거 알고 있지? 전화는 못 하니까 그렇게 알고 있고. 괜한 짓해서 위험 자초하지 마."

맞는 것보다야 나았지만 이들이 갑자기 행동을 바꾸니 오히려 이상했다.

'풀어주는 것도 아니고… 그럼 여전히 오빠를 이용하겠다는 거잖아……?'

민희는 안심하지 않았다.

완전히 안전하게 돌아가기 전까지 그리고 오늘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민희가 혹시라도 자해할 것을 대비해 여전히 세 명의 사람을 남기고 나왔다.

보스는 방을 나오면서 부하에게 말했다.

"음식 시켜."

"어떤 걸로 시킬까요?"

부하의 질문에 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먹음직스러운 향이 강한 걸로 한두 개. 너무 많이 시키면 속셈이 뻔히 보이잖아."

민희의 예상대로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고,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쉽게 포기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이후에 일을 진행할 때 부하들이 따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가볍게 생각했던 일이 극단적으로 치닫자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조직을 이끄는 보스답게 일단 참고 다른 길을 모색해 나갔다.

지금 자신들에게 어떤 위험이 다가오는지는 전혀 모르는 상태로.

조작의 결과

시간은 흘러 저녁 6시가 다가왔다.

경기 시작 30분 전이었지만 여전히 전화가 오지 않아 동팔은 더욱 초조했다.

'협박도 없고, 됐다는 말도 없고…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그래서인지 동팔은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연락이 없어도 볼넷을 던질까? 어차피 기록을 세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적도 없는데…….'

그동안 삼진에 집중하다 보니 볼넷은 절로 생기지 않았고, 자신이 던지는 공을 칠 수 있는 타자도 한동욱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가끔 치는 타자가 있긴 했지만 파울볼이나 플라이가 전부였다.

그 이외에는 삼진이라 의도치 않게 노히트노런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 기록도 세워 가고 있었지만 시한부 인생과 다름없는 동팔이 기록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덕분에 동팔이 볼넷을 던지는 것이 불법 도박장에서 나올 정도가 되었고, 높은 배당률을 가지게 되었다.

다만 배당률이 너무 높아지는 바람에 이렇게 민희가 납치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만 것.

그러니 그들의 요구대로 볼넷을 던지면 될 일이었지만 문제는 상대팀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번에 상대하는 팀이 CT인 거지? 최약체 팀을 상대로 볼넷을 처음으로 허용하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

상대가 한동욱이라면 몰려서 그랬다면 될 일이었기에 의심받을 일도 없었다. 하지만 최약체인 CT를 상대로 볼넷을 주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특히 주의해야 할 강타자가 없는 팀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들이 왜 지금 움직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한동욱이 있는 지아와 경기한다면 배당률을 더 떨어졌겠지. 그러니 제일 높을 때인 지금을 노렸을 거고…….'

한 번의 기회에서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나름 머리를 굴린 흔적이었다.

이런 상황은 동팔에게 운신의 폭을 더 좁게 만들었다.

동팔이 더그아웃에 들어가면 더 이상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연락이 오더라도 받을 수 있는 길이 차단된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한편, 호텔의 방에 있는 조폭들도 동팔이 초조해하는 것보다 더 초조해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독하네, 독해…….'

부하들이 초조해하는 사이 보스도 같이 초조했다.

하지만 높은 직위에 있으니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최대한 웃으며 말했다.

"그냥 이야기 한 번 해주면 안 되겠어? 상황이야 좋지 않겠지만… 볼넷 하나면 던지라고 해. 돈 받으면 대가성 때문에 걱정되면 안 받아도 되는 거고.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있겠어? 나중에 몸도 생각해야지. 애인 보고 싶지 않아?"

보스가 따듯한 죽을 내밀며 천천히 천천히 말했다.

"몸 생각해서 죽 시켰어. 이거 먹고 힘내서 경기장 가야지. 지금 애인이 얼마나 조마조마하게 생각할지 생각해보라고."

보스가 말하자 때마침 민희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반응에 보스는 내신 쾌재를 불렀지만 내색하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얼른 가서 얼굴 비쳐야 애인도 안심하고 공 던지지. 안 그래? 그리고 표는 여기 있어."

시즌 권을 받아서 표를 준 의미는 거의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의도를 잘 전달하기에 좋은 수단이긴 했다.

그들의 수단이 통했을까.

무언가 고심하던 민희가 드디어 입을 열었고, 자신의 앞에 있던 죽을 조심스럽게 떠먹었다.

민희의 변화에 보스는 기쁜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죽을 먹는다는 건… 살고 싶다는 의미… 좋아.'

역시나 몰아치기보다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나가야 했다 생각했다.

보스는 민희가 죽을 먹기 시작하자 눈빛으로 부하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물론 말이 없어 부하들은 눈빛의 정확한 의미는 몰랐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있으니 입도 뻥긋하기 어려웠다.

민희가 죽을 다 먹은 후 보스를 보며 말했다.

"핸드폰… 주세요."

민희의 말에 보스는 반색하며 말했다.

"그럼. 여기 있지. 잘 부탁해."

잘 짓지 않는 미소까지 지으며 핸드폰을 주는 보스.

핸드폰을 받아든 민희는 바로 동팔에게 전화했다.

이미 스피커 상태로 만들었는지 신호음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들렸다.

신호음을 길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조마조마해하고 있는 동팔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민희니?

"…네. 오빠……."

납치당한 이후 처음으로 듣는 민희의 목소리에 동팔은 크게 안도했지만 동시에 크게 불안했다.

이젠 정말로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민희가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스는 고개를 돌려 희희낙락하는 자신의 표정을 민희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됐어. 이제 볼넷만 하나 던지라는 말만 하면…….'

이게 거의 끝난 상황이라 생각했다.

"오빠… 절대로… 볼넷 던지지 마세요. 저는 괜찮으니까… 절대로."

민희의 말에 보스의 표정이 단번에 바뀌었다.

보스는 인상을 쓰고 민희를 노려봤지만 민희는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절대 던지지 마. 오빠."

처음에는 힘이 없던 목소리였지만 방금 먹은 죽 덕분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갔다.

"만약 던지면 나 풀려나자마자 오빠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알겠어? 볼넷이 아니라 무결점으로 처리해! 실수로 볼넷 나왔다 해도 똑같아!!!"

민희가 소리치자 보스는 그녀에게서 즉시 핸드폰을 빼앗았다.

"이, 이년이! 미쳤나!!!"

하지만 민희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게 소리쳤다.

"볼넷 던지면 죽여버릴 거야!! 나만 죽을지 나랑 같이 죽을지 오빠가 선택해!!!"

계속 있어봤자 좋지 않을 거라 생각한 보스는 민희의 뺨을 후려쳤다.

짝!!

하지만 그래도 민희는 비명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래도 맞는 순간 말이 멈추었으니 어떤 상황인지 모를 수 없었다.

"아… 이년… 진짜 돌아버리게 만드네."

보스는 그대로 동팔과 통화하기 위해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저기. 동팔 씨. 애인 말 신경 쓰지 말고……."

더 말을 하려 했지만 전화는 이미 끊겨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 진짜 미쳐버리겠네……."

보스는 그 말을 하더니 품에서 날카로운 칼을 꺼내 탁자 위로 꽂듯이 던져 박았다.

"야. 좋게 말할 때 다시 전화해. 그리고 던지라고 말해라. 진짜 죽기 전에."

하지만 그의 말에도 민희는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안 해. 아니, 못해. 경기가 곧 시작되면 선수는 핸드폰 못 들고 가거든."

괜찮은 것처럼 말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크게 떨리고 있었다.

민희의 말에 보스는 이를 뿌득 갈더니 핸드폰을 들고 직접 동팔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방금 전과 달리 바로 받지 않았고, 몇 번의 신호음이 가더니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상대가 받자 보스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말했다.

"강동팔 선수……."

―죄송하지만 지금 강동팔 선수는 더그아웃으로 들어가서 받을 수 없습니다. 혹시 급한 용무시라면 제가 대신 전해드리겠습니다.

민희가 말한 것이 사실이자 보스는 당황했다.

"저기… 그게… 말할 수 없지만 중요한 일인데……."

애인을 납치했으니 어서 전화를 바꾸라고 말할 수 없었다. 범행은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안 됐고, 특히 제 3자의 경우 협박이 잘 통하지 않고 경찰에 신고하면 모든 것이 끝났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만 핸드폰을 더그아웃에 반입할 수 없습니다. 말씀하시는 사유가 2촌 이내의 경조사 정도가 아니면 전해드릴 수도 없습니다.

정확히 말은 않았지만 2촌 이내의 급박한 경조사는 어디까지나 장례식과 같이 누군가 죽었을 때였다.

'어떻게 하지? 어머니가 사고를 당해 위독하다고? 아냐. 그렇게 되어버리면 선발 취소가 될 수 있잖아. 그럼 볼넷은커녕 공 자체를 못 던지게 되는데…….'

그 생각을 할 때에 상대가 물었다.

―그런데 여기엔 '내 사랑 미니'라고 나와 있는데… 남자분이시네요? 혹시 핸드폰 주우셨나요?

그의 말에 보스는 급히 통화를 끊었다.

이미 스피커 모드로 해놔 부하들은 물론 민희도 통화 내용을 전부 들은 상황.

보스는 무언가 깊이 생각하더니 부하를 불렀다.

"야. 너 노트북 가져와. 그리고 너, 저년 묶어."

부하들은 보스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고, 민희도 자신을 묶으려는 것에 저항하지 않았다.

이젠 정말로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체념을 넘어 초탈한 모습이었다.

보스는 탁자에 꽂은 칼을 뽑아 칼의 면으로 민희의 뺨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아직 끝난 거 아냐. 이젠 네 목숨으로 도박할 거거든. 베팅한 다음 잃으면 죽고, 얻으면 산다. 하나에 몰빵할 테니 그렇게 알아. 목숨은 분산이 안 되잖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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