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어제의 그 사건 이후의 일상은 다른 때와 다르지 않았다.
내일 선발 등판하는 동팔.
하지만 그것도 리그의 절반 이상을 지나자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민희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시간이 달라 데이트 약속을 잡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제는 동팔의 일정에 맞춰 만나는 시간이 정해졌다.
내일 선발 등판하는 동팔이었고, 홈에서 하기에 거리의 문제도 없었다.
경기가 끝난 늦은 시간이라 월요일처럼 오래 만날 수 없었지만 만난다는 자체가 중요했다.
평상시처럼 데이트를 하고 바래다주는 길.
동팔은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생각을 바꿨다.
"민희야. 집까지 바래다줄게."
"네? 그러실 필요 없어요. 혼자서도 갈 수 있으니까 가까운 곳에 내려주시면 되요."
동팔이 어떤 마음으로 말인지 알 수 없는 민희는 극구 사양했다.
'그렇다고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해줄 수도 없고… 말하면 분명히 무서워할 텐데…….'
동팔이 항상 내려주던 곳에 민희를 내려주며 말했다.
"민희야. 혹시 이상한 사람 붙으면 소리 질러! 알겠지?"
"누가 저한테 붙는다고 그래요. 알았어요.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생기면 소리를 질러서 아빠가 나오시도록 할게요."
그 말에 동팔은 조금이나마 안심을 하고 민희가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시야에 사라진 사이에도 무사히 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동팔은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민희는 골목길로 들어가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람은 없는 것을 확인한 민희는 안심하며 중얼거렸다.
"오빠는 왜 그 말을 해가지고선……."
평상시라면 아무렇지 않게 걸어갔을 길이었다.
하지만 동팔의 걱정에 민희도 괜히 무서운 마음이 들어 조심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여자가 오가기 힘든 길이긴 하지… 아니, 남자도 마찬가지려나?'
남자든 여자든 검은 옷을 입은 누군가가 뒤에 다가오면 무서울 것이다. 그것도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골목길이라면 더욱더.
뒤통수를 무언가에 맞으면 기절하거나 죽는 것은 남자나 여자나 같았기 때문이다.
성별 문제를 떠나 불안해진 민희는 자신만의 방어 준비를 생각했다.
'싸운다고 해서 내가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럼 처음부터 강도 짓할 생각을 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겠지? 그중에 하나가 핸드폰으로 통화하기고…….'
적어도 통화를 하고 있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바로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범행을 저지르려는 사람은 한 번 더 생각하기 마련.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그냥 아빠 보고 나와 달라고 하자."
아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통화를 하면서 시간을 벌고, 같이 있는 것이 확실했다.
범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혼자인데 대상이 둘 이상이라면?
강도가 범행 대상을 고르는 과정은 온라인 게임에서 몬스터를 잡는 과정과 상당히 유사했다.
온라인 게임에서 몬스터를 노릴 때 여러 가지를 생각한다.
내가 잡을 수 있는 몬스터인가?
노력한 것에 비해 보상이 괜찮은가?
대체적으로 이 두 가지가 판단의 큰 기준이 되지만 그 못지않은 기준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동족의식이 있는 몬스터인가 하는 점이었다.
한 몬스터를 치는데 같은 몬스터들이 보고 달려든다면 압도적인 장비와 기술을 가지지 않는 이상 건드리지도 않는다.
괜히 건드렸다가 잡을 몬스터를 잡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캐릭터가 몬스터에게 잡혀 하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 돌아다니는 몬스터는 아주 좋은 사냥감이다. 설령 그 몬스터가 동족의식이 있는 몬스터보다 강하더라도.
그래서 두 사람 이상이 있을 때 강도는 생각해야 한다.
내가 과연 두 사람을 동시에 제압하거나 무력화 또는 살해할 수 있는지.
한 명이라면 그 한 명을 처리하는 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둘 이상이라면 한 명이 당하는 사이, 다른 사람이 방해하거나 비명을 질러 더 많은 사람을 오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면 범행을 저지른 사람은 선택해야 한다.
도주하거나 다른 사람이 오기 전에 다른 사람을 처리할 수 있는지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보통의 경우에는 도주하는 것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전에 범행을 저지를 생각을 접거나 다른 대상을 노리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을 해본 적이 없는 민희였지만 이 정도 상식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핸드폰을 꺼내어 아빠에게 전화하려던 순간, 자신의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생겼다.
"누구……."
민희가 뭐라 하기도 전에 그녀의 입이 하얀 천으로 막혔다.
갑작스러운 입막음에 그녀의 비명은 나오지 못했고, 숨을 들이쉬는 순간에 의식이 멀어지며 몽롱해졌다.
툭.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지자 검은 그림자의 남자는 그냥 두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동료가 나타나더니 민희의 핸드폰을 주웠고, 자신의 동료와 함께 민희를 들고 그곳에서 사라졌다.
협박과 회유 그리고 협박
다음 날 아침.
"네? 민희가요?"
―그렇다니까? 어제 안 들어 왔어. 혹시 같이 있나 싶었는데… 아닌가?
민희 아버지의 전화에 동팔은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래도 같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사실이 그랬으니까.
"아뇨. 어제 분명히 항상 내려주던 곳에 내려줬습니다. 그리고 골목길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했구요."
―뭐? 그런데 왜…….
동팔의 대답에 민희의 아버지는 확연히 불안감이 들었다.
―내가 무슨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렇다면 벌써 나한테 연락이 왔을 거야. 그런데 왜 민희를… 혹시 자네 누군가에게 협박 받은 적 있나?
민희 아버지의 물음에 동팔은 말하는 것이 두려웠다.
'어떻게 하지? 분명히 그놈들이 민희를 납치한 것 같은데…….'
자신이 불법 도작 조작의 제의를 거절하는 바람에 납치되었다는 것을 말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변명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같은 사태는 그로서도 처음이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동팔은 떠듬떠듬 이틀 전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그게… 그제 누군가 와서… 이상한 제의를 했습니다. 볼넷을 주면 오천만 원을 현금으로 주겠다는 거요. 조작이라 받아들일 수 없어 거절했는데… 그 사람이 갈 때… 후회할 거라면서……."
동팔이 말하자 민희의 아버지가 크게 호통을 쳤다.
―뭐?! 그럼 왜 그걸 안 받아들여서 내 딸이 납치되게 만들어!!!
죄인이 된 심정에 동팔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민희의 아버지가 이어서 말했다.
―미안하네. 그게 당연한 선택인데 내가 이성을 잃었어. 나쁜 놈들은 납치한 놈들이지, 자네가 아닌 것을…….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의 심호흡은 통화를 통해서 동팔의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그의 말대로 잘못한 것이 없는 동팔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움츠러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아마… 곧 연락이 올 겁니다. 그럼 최대한 민희가 안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말을 그 작당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건가? 그게 알려지면 수렁에서 나올 수 없어. 그놈들이 돈을 준다는 보장도 없지만… 이 사실을 이용해서 협박하면 어떻게 할 건가?
사실이 알려지면 그것으로 선수 인생은 끝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투수라도 도박에 연루되면 그것으로 프로에 설 자리는 없었다.
국내만이 아니라 해외라도 마찬가지였다.
민희 아버지의 말에도 동팔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희가 다치거나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건 싫습니다. 차라리 야구를 하지 못하면 못 했지……."
그 말을 하는 동팔도 자신이 민희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동팔의 말에 민희의 아버지도 놀라고 있었다.
'민희가 예뻐서 사귀는 줄만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었어?'
딸 가진 아버지 입장에서 딸의 애인이 이런 말을 하는데 싫을 리가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재기를 준비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데도 야구보다 민희를 더 생각하는 말에 민희 아버지의 동팔을 경계하는 마음이 많이 풀어졌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으니까. 그동안 공만 던지며 살았으니 이렇게 험악한 일에 엮이면 어떻게 할지 몰라 당황스럽겠지. 경험이 있는 나도 당황스러운데 자네야 오죽하겠어.
민희 아버지의 말에 동팔은 조금이나마 안도하면서도 한 가지 물음이 생겼다.
'험악한 일이라고? 그런데 민희 아버지는 뭐 하시다 은퇴하셨다고 하셨지?'
하지만 지금 질문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동팔이 의문을 가지는 사이, 민희 아버지가 이어서 말했다.
―최대한 시간만 끌어주면 되네. 그놈들의 요구에 꼭 응할 필요는 없어. 최대한 하는 척만 하면 될 거야. 그리고 그 생양아치 놈들한테 코 꿰이면 정말 골치 아파.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그들의 요구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게. 알겠나?
이후로도 민희 아버지의 신신당부를 들으며 통화는 마무리되었다.
민희 아버지에게 사실을 말해서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이건 좋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설마 정말로 민희를 납치할 줄이야. 미친 거 아냐?'
그 생각을 할 때, 동팔에게 전화가 왔다.
발신인을 본 동팔의 눈이 크게 떠졌다.
"민희……?"
동팔이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민희야! 어디야? 괜찮아?"
동팔의 물음에 답한 사람은 발신인의 목소리가 아닌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역시 애인이 소중하나 보네. 이렇게 다급하게 말하고.
능글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동팔의 신경을 거스르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전화를 끊을 수 없었다.
민희의 번호로 왜 이 남자가 전화를 했는지는 너무도 뻔했기 때문이다.
"민희 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
동팔이 크게 소리쳐도 그는 여전히 능글맞게 말했다.
―어허. 소리 낮추쇼. 다른 사람 알아차리면 많이 곤란해질 텐데? 영원히 못 보는 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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