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그날 밤.
"수고하셨습니다."
경기를 마친 선수들 중 훈련을 하기 위해 남은 사람들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내일 등판하지만 평상시처럼 본인의 차를 타고 퇴근하는 동팔.
한적하고 주변에 아무도 없을 그때, 그의 뒤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저기… 강동팔 선수신가요?"
그의 말에 동팔은 생각했다.
'설마 팬인가?'
이미 경기가 끝나고, 시간이 지나 자정을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늦은 시간까지 남아 기다리는 팬인가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열성적인 팬이라면 지금 당장 달려와도 이상하지 않은데 왜 주변을 살피지?'
범죄를 저지르기 전의 사람처럼 그는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자연스럽고 익숙한 그의 행동과 모습에 동팔은 불길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불길한 느낌은 어김없이 맞았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동팔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동팔 선수. 제안할 것이 있는데요… 좋은 거니까 거절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뭔가요?"
"내일 있을 경기에서 아무 때나 볼넷 하나만 던지면 됩니다. 그러면 현금으로 5천만 원. 어쩌면 그 이상을 드리겠습니다."
그가 제의한 것은 바로 승부 조작이었다.
엄밀히 말해 승부 조작보다 도박 조작이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투수가 경기 중 볼넷 하나 던졌다고 해서 승패에 영향이 가지 않았다.
동팔은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동팔은 더 이상 듣지 않고 바로 차에 타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가까이 다가온 그는 동팔이 문을 닫지 못하게 막은 후 말했다.
"왜 이러십니까? 이렇게 좋은 기회가 어디 있다고. 다른 선수는 볼넷 하나 던지는데 일, 이백 겨우 받습니다. 하지만 그쪽은 특별하니 5천만 원을 그것도 증거가 남지 않게 현금으로 드리겠다는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 동팔이 볼넷을 허용한 기록은 없었다.
안타와 홈런을 맞은 적은 있어도 볼넷으로 타자를 진루시킨 경우는 전혀 없었다.
그러니 불법 도박에서 동팔이 볼넷을 주는 경우의 배당이 아주 높았다.
당연히 배당이 높아진 이상.
그에게 제안할 때 주는 돈의 액수도 높아지는 법.
하지만 동팔은 단호했다.
"생각 없다니까요. 그냥 가세요. 사람 부르기 전에."
동팔의 말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설마 연봉 많이 받는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도 공돈으로, 볼넷 하나 주는 것 치고 아주 많이 받는 겁니다. 간단하잖습니까. 그리고 정 위험하다 생각하시면 원하시는 때에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모레 있을 경기에서 아무 때 승패와 상관이 없을 때 볼넷 하나만 던지시면 됩니다."
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어 왔지만 동팔은 같이 웃을 수 없었다.
"됐다고 말씀드렸죠? 가세요. 신고하기 전에."
동팔이 신경질적으로 나오자 도박 조작 제의를 하던 사람의 표정이 바뀌었다.
간이라도 내줄 것 같은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러시면 후회하실 텐데……."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동팔은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한 제안을 받을 수도 없었다.
확실히 볼넷 하나 정도는 승패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동안 볼넷이 없었으니 이제 하나 나온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거기에 5천만 원이라면 상당한 거금.
제안한 사람의 말대로 공짜와 다름없이 거금을 얻는다.
하지만 동팔은 알고 있었다.
운동선수인 자신이 도박에 연루된다면 결코 그 끝이 좋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 한다고 말씀드렸죠? 가세요. 안 그러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동팔의 완고한 거부에 그도 더 이상은 제안을 하지 않았다.
그가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도 그러실 수 있는지 보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가 한 말에 동팔은 더 불길한 무언가를 느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협박에 굴복할 수도 없었다.
'안 돼. 할 수 없어. 아니, 해서도 안 돼. 절대로…….'
단순히 나중에 처벌이 따르건 따르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양심의 문제였다.
동팔은 갑작스럽게 생긴 일로 두려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동팔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차를 몰아 집으로 갔다.
한편, 동팔에게 다가와 조작을 제의하던 사람은 동팔이 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가 시야에 보이지 않자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네. 접니다. 실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완고한 타입이라… 설득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통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대기하겠습니다."
통화를 마무리한 그는 이미 사라진 동팔을 향해 말했다.
"이게 다 네가 내 제안을 거절해서 생긴 일이야. 원망하려면 네 자신을 원망하라고."
그렇게 말은 했지만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도박 조작을 하려 한 자신과 일당이 잘못한 것이지만 그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잘못한 쪽은 자신들이 아닌, 오히려 피해자인 동팔이었다.
다음 날, 동팔은 아침 일찍 일어나면서 불안했다.
그래서 잠을 설치고 또 설쳤다.
악마의 능력은 오직 육체적인 회복에만 국한되었는지 동팔의 정신은 피폐한 상태 그대로였다.
'후회하게 만든다고? 그리고 오늘도 거절할 수 있냐는 말을 왜 한 거지?'
마음을 괴롭히는 걱정은 회복되면서 느끼는 고통도 작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원래는 9시 즈음에 일어났지만 오늘은 잠도 제대로 못 잤음에도 불구하고 7시에 자리에서 나왔다.
같이 사는 가족이 무사하다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지만 민희는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무슨 수작을 부린다면 그 대상으로 유력한 사람은 민희였다.
그래서 동팔은 제일 먼저 민희에게 전화했다.
"나야. 어제 잘 잤어?"
―네. 오빠. 잘 잤죠. 고민하던 게 해결되었으니까요.
민희는 사직서를 내기 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이 잘 진행되었고, 덕분에 꿀잠을 잘 수 있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아침 일찍 동팔이 전화를 먼저 한 것이다.
민희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동팔은 절로 안도했다.
"그래? 그렇지? 다행이다."
―다행은 다행이죠. 그런데 괜찮으세요? 목소리에 힘이 없어요.
"아… 오늘은 좀 빨리 일어나서 그런가 봐."
급하게 한 변명이었지만 민희는 의심할 이유가 없었기에 웃으며 넘어갔다.
―선수가 힘이 없으면 어떻게 해요. 힘내라고 뽀뽀해드릴게요!!
쪽!
그 덕분에 동팔의 입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고마워. 네가 있어서 산다."
그 이후로는 연인들의 시시콜콜한 대화가 이어졌다.
통화를 마무리하며 민희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동팔은 다시 누워 편안한 마음으로 늦은 잠을 잘 수 있었다.
한편, 동팔의 설득을 실패한 폭력 조직 일당은 자신들의 아지트에 모여 있었다.
"어거 한 방 하고 떠야 하는데… 도와주지를 않네. 어떻게 한담……."
다른 폭력조직과 달리 돈을 꽤 모았는지 그들의 아지트는 상당히 좋아 한여름에도 에어컨이 빵빵하게 시원한 바람을 내보냈고, 벽도 깔끔했다.
내부 인테리어로 쓴 가구들도 단순하게 세련된 디자인이었고, 시중에서 구한다면 적어도 중산층 이상은 되어야 구매할 수 있었다.
조폭들이 생각보다 영세하고 제대로 된 생활을 하는 사람은 간부 중에서도 높은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름 돈을 모은 듯했다.
물론 그 돈을 모으는 방식이 합법적이라는 보장은 절대 없었다.
"강동팔이가 볼넷 던지면 받을 수 있는 배당 비율이 얼마라 그랬지?"
"한… 1,000은 넘고 있습니다. 만 원 배팅하면 천만 원 받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럼 몇 백 넣으면 몇 십억 들어온다는 건데……."
"몇 백이라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많이 넣으면 배당률이 떨어질 수 있으니 그 정도까진 아닐 겁니다. 그래도 천만 정도 넣으면 100억은 아니더라도 80억 정도는 들어올 거라 생각합니다."
그의 보고에 보스가 중얼거렸다.
"80억… 80억이라… 그걸 한 번에 벌 수 있는 기회인데… 왜 그 자식은 우리 제의를 거절해선……."
80억을 얻을 수 있으면서 고작 5천만 준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조직의 보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많은 돈을 얻을 좋은 기회가 왔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동팔에 대한 조건이 올라왔어. 그러니 좋은 기회야. 다른 녀석들이 선수 치기 전에 우리가 먼서 치고 가야 해! 이걸 놓치면 언제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어!!'
주로 도박장을 차리고 돈을 뜯어내는 그들이었지만 그들도 판이 커지는 쪽이 있으면 이렇게 직접 움직이기도 했다.
그들도 도박장을 차려서 알고 있었지만 확률에 돈을 거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특히나 언제라도 조작될 수 있는 도박이라면 더욱더.
도박에서 믿을 수 있는 확률은 0%거나 100%뿐.
그렇다면 그들의 선택은 미지의 확률을 100%로 끌어올리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준비 확실하게 했어?"
"네.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가정해서 준비했습니다."
그 말을 하고 그는 보고서를 내밀었다.
상황별로 어떻게 해야 할지와 배치를 어떻게 했는지가 그림으로 잘 표현되어 있었다.
그것을 본 보스는 만족해하며 말했다.
"잘했어. 결전은 오늘이랑 내일이야. 이 일만 무사히 끝나면 바로 튈 거니까 거기에 대한 준비도 해."
"알겠습니다."
"너무 많은 돈을 걸면 의심받겠지. 한 2천 정도 준비해. 1,500은 볼넷에, 나머지 500은 다른 곳에 적당히 끼워 넣으면 되니까. 어차피 그 녀석들도 손해 보는 것도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않겠지만… 적당히 변명할 거리는 만들어놔야 시간을 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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