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91화 (91/325)

[91]

한편, 회사에 출근한 민희는 김 대리와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김 대리에게 사직서를 내밀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제 나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사직서를 내미는 민희의 표정은 밝았다.

다른 사람에게 떠밀려 아니면 회사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퇴사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 대리는 민희의 사직서를 반려하지 않았다.

그녀의 사직서를 받으며 말했다.

"언젠가 이때가 오리란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네. 나는 동팔 선수가 메이저리그 진출하는 것이 확정되면 나갈 거라 생각했는데."

"저도 처음에는 그러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얼마 전에 들어온 신입이 생각보다 일을 잘하잖아요. 인수인계도 한 달만 더 하면 무난하게 할 것 같고, 저도 공부할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영어뿐만 아니라 계약이나 규정 및 조항. 그리고 많은 계약의 예시도 알아야 하고."

민희의 말에 김 대리가 말했다.

"정말 동팔 선수의 매니저 다 됐어? 전에 RG랑 계약할 때 주도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메이저리그도? 보통 에이전트에 맡기지 않아?"

"그건 알고 있지만 에이전트를 완전히 믿을 수 없으니까요. 분명히 더 높은 연봉과 계약금에 매달릴 것이 뻔하잖아요. 오빠가 원하는 건 많은 돈이 아니라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월드 시리즈에 우승하는 거고요. 그러니 메이저리그 진출할 때까진 제가 전담할 생각이에요."

민희는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의 결의를 증명하듯 가슴을 내밀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김 대리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민희 씨 능력이라면 충분할 거야. 그나저나… 많이 아쉬워. 민희 씨가 있어서 참 많은 도움이 됐는데……."

김 대리의 말에 민희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제가 많은 도움이 되다니요. 일은 신입이 맡아서 해도 되니 제가 없어도 상관없잖아요. 형식적인 말씀 안 하셔도 되요."

민희의 말에 김 대리가 답했다.

"형식적인 말이 아니야. 민희 씨가 말한 대로 본인의 일은 큰 상관이 없어. 대신 아쉬운 건 민희 씨 아버님의 인맥이지. 사실 아버지 인맥으로 회사 들어와서 좋지 않게 생각했는데… 의외로 일을 잘해서 넘어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한 진실을 알게 된 민희.

"네? 그러셨어요? 아, 하긴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회사에 들어온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 그렇겠네요. 상고 계열을 나와서 이런 쪽 일은 전부터 익숙해서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민희의 말대로 그녀를 제외하면 지금 회사에 들어온 사람은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온 사람이 전부였다.

"7년 사이, 고졸 중에 여기 입사한 사람은 민희 씨가 유일할 거야. 처음에는 낙하산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일을 잘해서 특채로 생각하기로 했지. 그리고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여기 계속 있어 봐야 한국 사회에서는 여자로서 올라갈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특히 학력이 없으면 더욱더 힘들고."

이어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김 대리는 여기 있어 봤자 민희에게 좋을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업무적인 능력이 뛰어나긴 했지만 과장 이상의 차장과 부장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십 년이 지나도 올라갈 수 있는 직급은 대리. 잘해야 과장이 전부.

그러니 안정적일 수는 있었지만 이 회사에 있느니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면서 그 이상의 무엇을 얻는 것이 나았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떠나 민희가 만족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김 대리의 말에 민희는 고개를 숙였다.

"네. 그건 알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나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버지 인맥으로 온 건지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동팔 오빠가 회사 들어왔을 때 좋아하면서도 낙하산이라 생각했는데… 저도 그랬다니……."

그 말을 하는 민희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김 대리가 그녀에게 물었다.

"이전부터 궁금했는데… 동팔 선수랑 언제부터 알게 된 거야? 팬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같은 학교도 아니었잖아?"

고교 야구는 프로 야구가 생기기 이전에 엄청난 인기를 구가(謳歌)했다.

신문에선 고교 야구의 승패와 과정, 어떤 투수와 타자가 나왔는지 1면에 보도되었다.

하지만 프로야구가 생긴 이후, 고교 야구는 대중적인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렇다고 영향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고교 야구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않으면 졸업 후 프로에 입단할 기회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대학 야구에서 인정을 받거나 아마 리그 야구에서 인정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고교 때와 비교하면 경우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대중적인 관심이 줄어드니 같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 이상, 동팔을 알고 팬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미 이력서를 통해 두 사람의 출신 고교가 다르다는 건 알고 있는 김 대리는 민희가 동팔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의 질문에 민희는 또 부끄러워하며 말한다.

"아… 그건요… 저의 과거를 말해서 좀 그렇긴 한데… 저… 일진이었어요. 아니, 일진까진 그렇고… 비행청소년? 날라리? 무리를 끌고 다니긴 했지만… 왕따는 안 시켰거든요. 아마도……."

"응? 정말? 안 그래 보이는데."

김 대리가 본 민희의 이미지는 활발한 모범생이었다.

상고를 나왔으니 우등생이라는 이미지는 없었다.

하지만 일하는 행동이나 대인관계를 보면 모범생으로 학창생활을 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본인의 입으로 불량학생임을 스스로 말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며 물어봤다.

"얼마나 불량했는데?"

"한 달에 며칠 가출은 기본이고, 매일 엄마와 아빠랑 다투고 그랬어요. 학교에서도 친구들끼리 몰려다니고… 그러면서 삥도… 아니, 돈도 뜯고."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는 건 학창생활에서 당연한 거니 넘어가지만… 돈도? 왕따는 안 시켰다면서?"

"그게… 왕따만 안 시켰지, 괴롭히지 않았다는 건 아니에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서 사과는 했어?"

"네. 확실히 했어요. 제가 정신을 차린 다음에요. 그러니까 오빠를 만나고 나서 일이죠."

자세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평범하게 고교 생활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더 자세한 것을 물을 수도 없기에 김 대리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동팔 선수랑 만나서?"

그 전에 왜 민희가 정신을 차린 일과 동팔을 만난 것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했다.

김 대리는 하나하나 의문을 풀어 나가기로 했다.

"그럼 먼저… 동팔 선수랑 어떻게 알게 됐어?"

"고1 때 가출하면서 알게 됐어요. 중학교 때 같은 학교였다가 저랑 다른 고등학교에 들어간 친구네 집에서 하루 묵으면서요. 다음 날 학교 야구팀 응원을 간다고 해서 그냥 같이 갔어요. 별 생각 없이."

"그럼 그 친구 학교 야구팀에 동팔 선수가……?"

그래서 동팔을 알게 되었나 했지만 그 반대였다.

"아뇨. 오빠는 상대 학교 투수였어요. 친구네 학교는 오빠가 던진 공에 완전히 단번에 막혀서 1회전에서 떨어졌죠."

"아, 그랬어? 그렇군……."

하긴 응원하러 갔다고 해서 응원하던 팀에 동팔이 있을 거란 건 섣부른 판단이었다.

어찌 됐든 동팔을 만나고,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네. 하지만 그때 동팔 오빠가 공을 던지는 것을 홀리듯이 봤어요. 압도적인 구위도 놀라웠지만… 뭔가… 던지는 모습에서 굉장한 열정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단 하나에 집중하는 모습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죠. 던질 곳을 보는 날카로운 시선, 역동적인 움직임. 그리고 던지면서 뿌려지는 먼지와 땀. 당시에 저는 이도 저도 아니게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으니 더욱 그랬는지 몰라요.

"

민희는 멋쩍은 듯이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때부터 야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죠. 마침 아빠도 야구를 좋아하셔서 관련된 자료는 많았고… 또 아빠와 같이 이야기할 것도 있으니 대화도 많아졌고요. 아마 그 이후로 제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을 거예요. 그리고 꼬박꼬박 오빠가 나오는 경기는 무조건 찾아가서 응원했어요."

말은 간단히 했지만 민희의 그런 행동은 쉽지 않은 것이다.

보통 고교 야구팀을 응원하는 사람은 같은 학교 학생이거나 선수들의 가족들이 사실상 전부였다.

그런 상황에 다른 학교 학생이 와서 응원하면 눈에 확 띌 것이다.

그러니 교복을 입고 응원할 수 없어 사복을 따로 챙겨야 했고, 아는 사람이 없어 혼자 응원해야 했다.

"그러다 우연히 오빠의 눈에 띄어서 짧게나마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죠. 그때 오빠한테 물어봤어요. 어떻게 하면 하나를 바라보고 집중할 수 있는지를."

"그래서 동팔 선수는 뭐라고 말했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해서도 있지만 좋아서라고 했어요. 또 자신이 잘하면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공을 던진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는… 갑자기 부끄러웠어요."

"왜?"

"그건… 저는 늘 제 생각만 하고 살았거든요. 뭐든지 제가 세상의 중심이었죠. 사춘기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좌우지간 그때에 저는 부끄러웠어요. 저보다 한 살 많을 뿐인데, 이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라 남도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게… 저와 너무 비교되어서 오빠 옆에 서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고……."

민희는 정말로 부끄러운지 달아오른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이어서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제 삶이 바뀌었어요. 나도 이 사람처럼 나만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죠. 다만… 제가 그럴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 민희는 집에서 더 이상 말썽을 피우지 않았고, 학교에서 친구를 괴롭히는 것도 멈추었다.

또한 상고였어도 공부와 자격증을 따는 것에 열심히 임했고, 덕분에 수석으로 졸업하며 학생 때 따놓은 자격증만 10개가 넘었다.

그래서 동팔은 몰랐다.

그때 민희에게 했던 몇 마디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는 사실을.

"시작점은 동팔 선수의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걸 행동으로 옮긴 사람은 민희 씨 본인이야.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지."

그리고 김 대리는 민희의 사직서를 손에 쥐고 말했다.

"그런데 모레 동팔 선수 선발 등판하지? 잠실에서 하니까 가겠네? 우리도 가고 싶지만… 시즌 권을 받은 누구와 다르게 항상 갈 수 없으니까 우리 몫까지 열심히 응원해."

김 대리의 말에 민희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야 물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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