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저보고 언니라고 하는 걸 보니 동생인 것 같은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네? 언니보다 한 살 어려요."
"그럼 이름?"
"아, 이름은 민희라고 합니다."
"민희. 좋은 이름이네요. 그런데 동팔이와 사귀고 있다면… 언제부터 사귀게 되었나요?"
"그건… 한 1년 이상 되었어요. 오빠가 아마 1부 리그에서 재기를 준비할 때… 본격적으로."
민희의 말에 혜진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제가 동팔이와 헤어지고 나서 많이 미안했는데, 좋은 사람 만났으니까."
혜진의 미소에 민희는 순간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응? 질투 안 해? 그리고… 왜 이렇게 예뻐~!!!!'
이미 혜진이 뛰어난 미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녀의 작은 미소만으로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이 풀리고 있었다.
민희도 다른 사람에 뒤쳐지지 않는 미인이지만 급이 달랐다.
'그래. 어차피 미모로 이 사람을 이길 수 없어. 나는 많이 쳐줘야 중견기업이지만 혜진 언니는 세계적인 대기업이니까…….'
단순히 얼굴의 미모를 떠나 몸매에서도 차원이 달랐다.
그냥 종족이 다르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혜진이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미모가 뒤처져도 전혀 질투가 나지 않았다.
이것은 그냥 자연의 섭리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실이었다.
민희는 혜진과 만나면서 한 차례의 전투를 치를 각오를 했다. 하지만 설령 전투를 치르더라도 혜진의 미소 한 방이면 자신의 투지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는 민희였다.
그리고 애초에 두 사람이 싸울 일은 없었다.
"동팔이가 잘 지내서 다행이에요. 사실… 동팔이 얼굴 보기가 너무 미안해서 야구장에 갈 수 없었거든요. 제일 힘들 때, 힘이 되어주지 못하고 도망쳤으니…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오히려 든든히 버팀목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감사 인사까지 받고 말았다.
너무 착한 그녀의 반응에 민희의 투지와 전의는 사라지고, 이전부터 궁금한 것을 묻게 되었다.
"아뇨. 감사라뇨. 그냥 제가 좋아서 한 것인데요. 그런데… 혜진 언니는 동팔 오빠랑 왜 사귀게 되신 거예요? 저처럼… 팬이어서 인가요?"
민희의 질문에 혜진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이미 자신이 끝낸 관계의 시작을 떠올리기란 괴로운 일이다. 그래도 혜진은 피하지 않았다.
"그건… 그냥 둘 수 없었다? 봐서 알겠지만 동팔이는 오직 야구만 해 왔어요. 그래서 불안했죠. 강가에 둔 아기처럼, 과연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사람들에게 속아 재능을 낭비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항상 옆에 있었어요. 그랬던 것이 결국 사귀기까지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죠. 민희 씨는 동팔이가 고등학생 때부터 팬이었나 봐요."
그렇지 않고서 팬이라는 말이 나올 수 없었다. 동팔이 프로에 나서서 공을 던진 것은 이번 시즌이 처음이니까.
"네… 이전부터 쭉… 지켜봤어요. 야구에 푹 빠져 열정적인 모습이 끌렸거든요. 저처럼 하기 싫은 공부에 빠져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아니라서… 더 끌렸는지도 몰라요."
그 이외에도 다른 것이 있긴 하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민희의 말에 혜진은 그녀가 왜 자신을 알아봤는지 알았다.
"아… 전부터 지켜봤다면… 저랑 동팔이 관계도 자연스럽게 알았겠네요."
"네. 그렇죠. 두 분이 같이 있을 때, 저한테 사진 찍어 달라고까지 하셨는데요? 기억에는 없으시겠지만."
그리고 그 기억은 동팔도 없었다. 이것은 그동안 민희가 숨겨온 기억 중 하나다. 그녀의 말에 혜진은 생각보다 민희가 오랜 시간 동안 동팔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역시… 사람의 인연은 따로 있었는지도……."
오랜 시간 지켜보기만 했던 민희는 동팔과 이어졌다.
반면 오랜 시간 함께한 자신은 다른 사람의 아기를 가지게 되었다.
오래 살아온 인생은 아니지만 지금 혜진이 느끼는 감정은 복잡하고 또 깊었다.
"네?"
"그런 게 있어요. 그리고 지금은 무리할 때가 아니라서 금방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이번 시즌 끝나고 결혼할 예정이라서요. 아니, 이미 혼인 신고를 했으니 결혼식만 남은 거지만."
"네? 결혼이요?"
전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발언에 민희는 놀랐다. 그러자 혜진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팔과 인연이 있는 그녀에게 은밀한 사실을 말했다.
"아이를 가졌어요. 예기치 못한 아이지만 다행히 그 사람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줬거든요. 이미 집안에서 이야기는 끝났지만 지금은 시즌 중간이라 무언가 행사를 하기엔 미묘해서요."
"아… 네……."
애초에 싸울 상대가 아니었다. 그 사실에 민희는 방금 전에 자신이 했던 생각을 떠올리자 부끄러움이 한 없이 밀려왔다.
'으윽… 내가 왜 그 생각을 하고 다가와서는~!!'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이 사실을 나중에 가서 알게 되었겠지만.
"그럼 민희 씨는 동팔이랑 언제 결혼할 생각이에요? 혹시 올해?"
어쩌면 둘이 비슷한 때에 결혼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미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동팔이라 경제적인 문제는 전혀 없다. 하지만 민희는 안다.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왜 그런지 모르지만 앞으로 3년? 그 안에 월드 시리즈 우승하고 나면 결혼하자고 하는 것 같아요. 아직 젊기도 하고, 야구에 전념하겠다고 하니 말릴 수도 없고……."
아쉬워하는 민희의 말에 혜진은 다시 작은 미소를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알고 있지만 동팔이는 야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그러니 다른 여자 만날 일은 전혀 없죠. 그게 야속할 때가 있지만 어쩌겠어요. 그러면 동팔이가 아닌 것을."
"그렇…죠."
이젠 되레 경험자인 혜진에게 위로를 받고 말았다. 민희는 허탈해 하며 말했다.
"뭐랄까… 뭔가 힘이 빠져요. 오빠의 전 애인을 만나서 다시는 달라붙지 말라며 선전포고를 할 생각이었는데 시작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니……."
"그래서 싫어요?"
혜진의 물음에 민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적극적으로 답했다.
"아뇨, 전혀."
피아구분이 끝나 적이 아닌 것이 확인된 이상 굳이 척을 질 필요가 없었다. 이미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그 남자와 곧 결혼을 하게 된 이상.
그 이후로 여자들만의 대화를 한 이후, 혜진은 몸과 아기를 생각해 먼저 갔다. 그리고 심심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올스타전이 끝나자 바로 동팔과 만나서 데이트를 하게 된 것이다.
한편, 동팔과 민희가 오붓하게 데이트를 하는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복장은 평범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평범한 사람과 거리가 멀었다.
"저 여자야? 강동팔의 애인이."
"아마 맞을 겁니다. 아니 확실합니다."
"차라리 먼저 간 여자가 확실하지 않아? 더 예쁘잖아."
"이전에는 그랬는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랍니다. 남궁지완인가? 이번 시즌 끝나고 그 선수랑 결혼한다고 합니다."
의외로 이들의 정보력은 높았다. 이미 이전부터 꾸준히 조사를 했는지 몰라도 동팔의 주변 사람에 대한 정보는 확실하게 챙기고 있었다.
"기회는 한 번뿐인 거 알지. 대박 잡으려면 저년 반드시 잡을 수 있게 준비해. 무슨 일이 있어도. 알겠어?"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의 자그마한 말에 주변에 있던 다른 남자들이 고개와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그들의 행동에 주변의 사람들은 그들과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과 멀어지려 했지만 그들은 주변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아서 그들은 모르지만 그들의 뒤에선 스크레이치가 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조작의 제의
올스타전이 끝나면 프로 야구 리그는 후반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모레 선발인 동팔은 무리하지 않고 컨디션을 조절하면서 훈련하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훈련은 너클볼과 자이로볼의 제구력 향상.
두 구종이 아니더라도 동팔의 공을 칠 수 있는 타자는 없었다.
있다면 한동욱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동팔이 자신의 구위를 높이는 것은 기존의 구종의 구위를 유지하면서 새로 익힌 구종의 위력을 더 높이는 것이 전부였다.
이전의 슬럼프는 동팔의 구위가 저하되어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때의 습관으로 인해서였다.
엄밀히 말해 슬럼프라 할 건 아니었고, 습관을 알고 오히려 이용하자 더 완벽한 기록을 세워버렸다.
"자, 잠시 휴식."
"네!!!"
아무리 선수라도 계속 훈련만 할 수 없다.
그리고 컨디션을 조절하는 중인 동팔은 더욱 휴식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럴 필요가 없는 동팔이었지만 지금 동팔은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고 있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내가 하는 것을 따라하다가 오히려 다칠 수도 있으니까…….'
동팔은 뛰어난 회복력으로 강도 높은 훈련을 계속해서 감당할 수 있었다.
다른 선수도 하루나 이틀, 며칠 정도는 감당할 수 있겠지만 오래하게 되면 버티지 못하고 크게 다칠 수 있었다.
이미 자신이 훈련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는 선수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 조심스러운 동팔.
그러니 자신의 상황과 맞지 않아도 일단 휴식할 때는 휴식을 확실히 쉬고 있었다.
또 제대로 휴식을 취하면서 훈련과 균형을 맞추면 새벽에 찾아오는 회복의 고통도 많이 줄어들었다.
동팔이 그늘에 들어와 쉬고 있을 때, 강중근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동팔아. 요즘 민희 씨랑 어때?"
"민희요? 네… 뭐… 평범하게 만나고 있습니다."
"평범하긴 무슨… 그런데 두 사람은 언제 처음 만난 거야? 듣기론 네가 아마 1부 리그에 있을 때부터 사귀었다던데. 맞아?"
"네. 사귀는 건 그때부터 사귀었죠. 만난 건 그 이전이었지만."
"언제?"
"그건……."
동팔은 어떤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내가 민희를 확실히 알게 된 건 회사에 들어가서였지만… 민희는 그 전부터 나한테 팬이라고 했지? 고등학생 때부터…….'
그럼 정확히 처음 만난 순간을 알 수 없었다.
자신과 혜진이 같이 있던 때의 사진을 민희가 찍었다는 것도 사귀게 된 다음 알았다.
"저는 회사에서 처음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민희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이전부터 만난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때 팬으로 만났다고는 하는데… 저는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래? 그럼 팬이 꽤 많았나 보다. 보통 고등학교 때 아무리 유명한 선수라도 자기 학교 아니면 모르잖아. 아, 설마 같은 학교?"
"아뇨. 다른 학교에요."
"그럼 더 이상한데? 어떻게 팬이 될 수 있었지?"
이전에는 당연하다 생각했던 사실이었지만 강중근의 물음에 동팔도 같이 궁금해졌다.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어떻게 저를 알고 팬이 되었을까요? 전에는 같은 고등학교에 있던 친구들이나 후배들. 그리고 주변에 아는 일부 사람뿐이었는데… 그런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기억도 나지 않다니… 정말 무신경한 것 같아서 민망합니다."
동팔은 가만 생각해보니 민희의 경우가 아주 특이했다는 것을 알았다.
혜진이야 같은 학교였고, 항상 응원을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민희는 아니었다.
다른 교복의 학생이었음이 분명했지만 동팔의 기억에 민희는 선명하게 남지 않았다.
동팔이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하자 강중근은 어린 후배가 귀엽게 보였다.
그리고 그를 위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조언을 해주었다.
"그럼 한 번 물어 봐. 모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알려고 하면 되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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