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89화 (89/325)

[89]

"여긴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이랑 다르거든. 거기도 비슷하게 진행되지만 긴장감이 장난 아냐. 피 튀기는 혈전도 각오해야 하는데……."

그 말을 하며 올스타전을 하는 고척 돔구장을 둘러보는 히네신스. 그가 말하는 메이저리그의 분위기처럼 경직되거나 과도한 응원의 열기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소풍을 나온 사람들처럼 팬들은 물론 선수들도 긴장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여긴 그냥 놀러온 것 같아. 메이저리그랑 다르게 걸린 것이 없어서 그런가?"

히네신스의 말에 동욱이 답했다.

"그럴 겁니다. 미국은 워낙 땅이 넓어서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의 거리가 꽤 멀잖아요. 그런데 월드 시리즈는 최대 7번의 접전이고, 그중에 네 번의 경기를 홈으로 치를지 아니면 어웨이로 치를지 결정되니까 피가 튀죠."

고수의 싸움에서 아주 작은 차이가 승패를 가른다.

메이저리그의 팀 중에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는 팀은 각 리그의 챔피언이 된 팀이다.

그러니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야 월드 시리즈 우승에 반 발자국이라도 앞선다.

아무리 뛰어난 전설적인 선수라도 평생 월드 시리즈의 우승 반지를 끼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월드 시리즈 우승은 실력을 기반으로 했다.

하지만 실력의 차이가 없다면 환경과 운이라는 요소가 승부를 결정하는데 아주 강하게 작용하게 된다.

반면 한국의 올스타전은 달랐다.

그냥 인기가 많은 선수. 그리고 실력이 뛰어난 선수를 추려 경기를 하는 이벤트였다.

그래서 참여하는 것에 영광인 자리이기도 하지만 구단에 실질적인 이득이 되는 것이 거의 없는 행사였다.

오히려 주축 선수들이 쉬지 못하기에 구단의 입장에선 손해였다. 그러니 올스타에 자기 구단의 선수가 가능한 적게 뽑히는 것이 우승에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고 그걸 대놓고 말할 수 없으니 잠자고 있어야 했지만.

히네신스는 올스타전의 분위기를 느끼며 말했다.

"어떻게 보면 이 분위기도 정말 좋아. 순수하게 야구로 놀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잖아."

그의 말에 동팔은 방금 전부터 들었던, 기묘하게 익숙하던 감각의 정체를 알았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아마 야구를 했을 때랑 비슷해요. 그때도 승부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순수하게 야구만 즐길 수 있었거든요."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제일 먼저 실력이다.

하지만 실력이 있다고 전부 프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물수제비를 잘 던지다 해도 리그가 형성되지 않으면 프로가 생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어떤 종목에 뛰어난 사람들이 정해진 규칙 안에서 플레이하는 걸 보고 싶어 한다. 본인이 할 수 없는 플레이를 선수가 하는 것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한다.

그리고 대리만족에서 벗어나 선수와 팀에 애정을 가지고 팬이 된다. 그리고 팬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이를 이용할 상업적인 수단을 모색하는 사람이 있고, 그들은 구단이나 팀을 만들게 된다.

구단은 더 많은 팬들을 확보하여 수익을 얻기 위해 좋은 선수를 발굴하거나, 영입하거나, 키워 나간다. 그리고 이것이 선 순환되어 시간이 가면 규모가 커지고, 규모 자체가 또 다른 시장을 형성하게 만든다.

결국 프로와 아마의 구분을 할 수 있는 제일 명확한 선은 주로 수익을 얻느냐, 소비하느냐의 차이다.

그리고 프로가 되면, 취미가 일이 되기에 더 이상 순수하게 즐길 수 없게 된다. 그게 가능한 선수가 있다면 선수들 사이에서도 아주 뛰어난 실력을 지녔거나, 이미 많은 것을 얻어 생계의 걱정을 놓은 선수에 한했다.

그러나 올스타전은 아니다.

이미 인기가 많고, 실력이 있는 선수들이라 특별히 생계의 걱정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승패에 따라 얻는 것이 있는 게 아니고, 잃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프로야구 선수가 된 이후, 순수하게 야구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올스타전.

그래서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선수는 그만큼 실력과 인기를 얻었다는 증거가 되어 영광으로 생각하지만 오직 순수하게 야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것에 기뻐했다.

다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한국 프로 리그에 한했지만.

히네신스의 말에 동팔은 자신이 방금 전에 느낀 기시감의 정체를 알자 마음이 더 가벼워졌다.

"어쩐지 감독님께서 그냥 즐기고 오라고 하셨더라니……."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올스타전에선 실제 경기에서 던지지 못하는 각종 구종을 던질 수 있다. 그리고 한 명의 투수가 완봉이나 완투를 하면 오히려 다른 투수들에게 민폐이며, 다른 투수들의 모습을 보러 온 팬들에게도 민폐다.

그래서 올스타전에선 한 명의 투수가 던질 수 있는 공의 숫자나 이닝이 제한되어 있었다.

최대한 균등하게 던져야 해서 한 이닝, 많아야 두 이닝 정도가 전부였다.

마음대로 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리가 되는 일정은 아니었다. 히네신스는 다른 외국인 용병 선수, 특히 자신과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에게 가기 전 동팔에게 말했다.

"오늘도 그렇지만 내일도 기대할게. 내일은 홈런더비 있다고 하던데."

타격에 있어선 한동욱을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동팔의 강속구 그리고 아직 제구력이 안정되지 않았다지만 자이로볼까지 치는 타자가 한동욱이다.

그러니 피칭을 하는 볼펜 투수의 공 정도는 전부 홈런을 쳐도 이상하지 않을 타자다. 그러나 히네신스가 동팔에게 기대하는 것은 한동욱을 이기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 날.

일정에 따라 오늘은 홈런더비가 있는 날이다.

홈런더비는 신청을 한 선수들이 경쟁을 벌여 끝까지 이기는 쪽이 우승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시작하기 전부터 우승자는 한동욱으로 거의 정해진 분위기라 흥이 나지 않았다.

"어차피 한동욱이 결승까지 가겠지."

"아웃카운트가 올라가기나 하겠어?"

홈런더비는 타자가 10아웃이 될 때까지 타석에 선다. 타격을 하여 파울이나 안타는 전부 아웃이다. 즉, 홈런이 아닌 타구는 전부 아웃이다. 하지만 공이 볼이라는 판단에 의해 치지 않으면 아웃카운트는 올라가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10번의 아웃카운트가 채워지는 동안 얼마나 많은 홈런을 치는지가 관전 포인트다.

이미 한동욱이 확정적이지만 그 전에 형식적이라도 예선전을 치른다. 예선전은 팀별로 7아웃제를 적용하여 대표를 선발한 다음, 양 팀에서 뽑힌 타자가 겨루어 최종 승자를 가리는 방식이다.

그런데 의외의 순간에 흥이 돋기 시작했다.

"어, 이번에 강동팔이다."

"하나라도 칠 수 있을까?"

타자도 아닌, 순수한 투수인 동팔이 타석에 들어서는 모습은 낯설었다. 그래서 다른 선수들보다 타석에 들어선 것만으로 사진을 찍는 팬들이 많았다.

갑자기 시선을 받게 된 동팔이었지만 먼저 자세를 잡아서 공을 칠 준비를 했다.

"오~ 생각보다 자세가 잘 잡혔다."

"올스타 하기 전에 이미 타격 연습했나 보지 뭐."

사람들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같은 팀인 히네신스는 자신이 직접 본 것이 있기에 그들의 말에 동조할 수 없었다.

'보면 알겠지. 동팔이 이전부터 타격 연습을 꾸준히 해 왔다는 것을.'

이미 폼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타석에 설 일이 없어서 서지 않았을 뿐, 이미 훈련하는 것을 본 히네신스는 대략적인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 그의 예상대로 나왔다.

따악~~!!!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동팔의 타구가 돔 구장의 관중석을 향해 날아갔다. 파울지역도 아닌 완벽한 홈런이었다.

동팔이 생각보다 공을 잘 치고, 힘 있게 넘기는 모습을 보자 팬들은 물론 선수들도 집중했다.

"어? 어? 넘어갔다. 넘어갔어!!"

"투수만 하는 게 아니라 타자까지 넘보는 겨?"

하나라도 치면 다행이라 생각하는 것과 달리, 동팔은 7아웃을 채우는 사이 4번의 홈런을 기록했다.

그 이후에 한동욱이 나와 7번 연속 홈런을 쳐서 팀 대표가 이미 정해졌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동팔을 향하고 있었다.

이런 반응에 동욱은 피식 웃었다.

'부러운 건 아니지만… 내가 기대치를 너무 높였나?'

한 번의 아웃 없이 7번 연속으로 홈런을 치자, 7아웃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기에 바로 내려왔다.

규정에 맞지 않았지만 어차피 뻔한 결론이었기에 동욱도 진행하는 쪽도 이미 합의를 한 상태에서 내려왔다.

동욱의 7연속 홈런도 대단한 기록이지만 사람들은 뻔한 결과보다 의외의 사건에 더욱 집중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날, 올스타전이 끝나고 나온 인터넷 스포츠 기사에서도 드러났다.

[타자 강동팔. 홈런더비에서 홈런 4개.]

[마운드를 넘어 타석까지 넘보다.]

[이젠 지명타자 강동팔?]

올스타전의 결과와 다른 이벤트의 내용은 짤막하게 나왔다. 하지만 메인을 장식하며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동팔이 홈런더비에서 친 홈런의 과정과 숫자였다.

그리고 지금 동팔은 올스타전을 끝내고 민희와 같이 기사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오빠. 올스타전은 재미있었어?"

토요일 날 시작하기에 회사 걱정할 필요 없이 처음부터 같이 오려 한 민희. 하지만 티켓이 매진되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하고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암표상이 은밀하게 표를 팔고 있었지만 너무 비싸게 부르는 바람에 사지 못했다.

그래서 올스타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끝나고 나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민희는 의외의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아… 혜진… 언니……?"

"네. 맞습니다만 누구세요?"

임신초기를 지나 4개월을 넘어 가고 있어 안정을 찾아가는 혜진. 지완이 자신과 아이를 버리지 않고 받아들였기에 정서적인 안정도 찾아가고 있었다.

덕분에 전과 달리 안색이 좋아졌다.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아는 것 같으니 의아하던 중, 민희는 사실을 말했다.

"저기… 동팔 오빠 팬이었다가… 지금은 사귀고 있어요……."

남의 애인을 빼앗은 건 아니다. 먼저 포기하고 버린 쪽은 혜진이었다. 하지만 아직 남궁지완과 혜진의 사이에 일어난 일을 모르니 왠지 마주치기가 껄끄러웠다.

그러나 남은 시간 동안 혼자서 무언가 하기엔 너무 심심했다. 그리고 이참에 정리를 완전히 해버리자는 생각에 민희도 혜진을 보자 다가간 것.

민희의 말에 혜진은 무언가 만감이 교차했다.

불과 2년도 되지 않는 시간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공식적으로 애인이 바뀌었고 이제는 아기까지 가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희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가요? 그런데 아직 안 들어간 걸 보니, 그쪽도 못 들어간 것 같은데. 여자끼리 할 말도 있으니 적당한 곳에 갈까요?"

"…네."

그렇게 해서 고척 돔 구장에서 가까운 카페로 간 두 사람. 그리고 한적한 카페에 앉아 혜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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