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힘든 시간에 가족만이 아니라 나를 지탱해준 많은 분들이 계셨어.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고, 친구들도 있었고, 친한 형들과 동생도 있었지. 지금 여기 있는 너희들처럼."
동팔의 말에 아이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동팔의 말에 감동을 받던 아이들이었지만 갑자기 서로를 돌아보게 되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우욱~ 네가?"
"됐어. 저리 꺼져."
"퉤, 퉤, 퉤!!"
침까지 뱉는 시늉을 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진짜 침이 나오진 않았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아이들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은 모습에 동팔은 절로 아빠 미소가 지어졌다.
어색함은 잠깐이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동팔은 물론 다른 선수들과 같이 놀았다.
아이들에게 아쉽겠지만 오늘도 경기가 있어 빨리 가 봐야 하는 선수들과 가족들.
점심을 먹은 뒤에도 정해진 시간까지 아이들과 함께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겨우 벗어난 동팔에게 한 선생님이 다가왔다.
"많이 힘드시죠? 아이들 상대하는 거."
그의 말에 동팔은 이젠 다른 선수들과 놀기 시작한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이렇게 놀아보는 것도 간만인 것 같거든요. 학생 때는 야구만 해서 노는 개념으로 던진 경험이 없어서요."
"아, 그렇게 생각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아이들을 보더니 다시 동팔을 보며 말했다.
"아이들한테 들었어요. 좋은 말씀해주셨다면서요?"
선생님의 말에 동팔은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렸다.
아이들과 놀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기에 어떤 말을 말하는 건지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네? 좋은 말이요?"
동팔의 모르겠다는 반응에 선생님이 도움을 주었다.
"묵묵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라는 말씀이요. 그 말에 아이들에게 많은 힘이 되었어요. 사실 여기에 온 아이들은 전부 버림받은 아이들이거든요. 그래서 선생인 우리들도 그 부분에 대해선 일부러 말하지 않아요. 아이들도 마찬가지이고. 아주 예민한 문제거든요.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동팔 선수한텐 아이들이 먼저 그 말을 할 줄 몰랐어요."
선생님의 말에 동팔은 자신이 아이들에게 했던 말 중에 어떤 말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인지 알았다.
동팔은 쑥스러워 하며 말했다.
"그랬나요? 개인적으로 경험담을 말했을 뿐이었는데……."
"그 경험이 아이들에게 큰 힘이 된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 누군가 빛을 비추는 것만으로 큰 도움이 되는 것처럼. 그리고 누군가 이 길을 지나갔다는 사실만으로 안도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선생님은 동팔을 지그시 바라보며 이어서 말했다.
"사실 동팔 선수들은 저 아이들에게 있어 살아 있는 희망이에요. 자신과 같이 버림받았던 사람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난다. 그 자체만으로 아이들은 좋은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자신에게 한 질문은 아주 예민한 것이다.
고아인 아이에게 고아라고 놀리는 것은 단순히 사실의 지적이 아니다.
고아를 보고 고아라고 놀리는 것은 '부모가 너를 버렸어. 네가 얼마나 못났으면 부모마저 너를 버렸냐?'라는 의미가 함축된 것이다.
그래서 고아라고 불리는 것 그리고 버림받았다는 것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에 대해 금이 가게 만드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동팔에게 먼저 버림받은 사실을 인정하고 물어봤다.
이것은 자신과 동료라는 의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질문이었다.
"그런가요? 하긴 아이들에게 부모라는 존재는 절대적이니……."
세상을 살다보면 버림받는 때가 종종 온다.
부모와 가족에게 버림받는 것도 있지만 자신이 몸담았던 회사나 조직, 큰 의미는 없어 보여도 같은 취미를 공유하던 동호회도 포함된다.
크든 작든, 자신이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 되어 찾아온다.
성인도 그러할 진데, 어릴 때 겪는 충격은 몇 십 배로 다가올 것이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괜찮다고 말해도 상처로 인해 생긴 후유증은 평생 안고 가야 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있어 자신이 희망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게 된 동팔이었다.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이미 열심히 하고 있지만 제 사생활이 무너지면 아이들의 희망도 무너지는 거잖아요. 아, 이건 너무 나갔나?"
동팔의 말에 선생님은 방긋 웃으며 답했다.
"아니요. 꼭 성공만 하길 바라는 건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는 모습만으로 아이들에게 충분히 큰 위로가 될 거예요."
동팔이 시설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던 그때.
원정경기를 치르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남궁지완은 혜진과 만나고 있었다.
"할 말이 뭔데?"
남궁지완의 어투에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악마와 계약을 한 능력으로 동팔이에 근접하는 구위를 얻었어. 설령 네가 동팔이한테 가더라도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지금처럼…….'
갑자기 뛰어오른 구위에 자신감도 뛰어 올랐다.
하지만 남궁지완의 물음에 혜진은 말로 답하지 않고, 얼마 전에 찍은 사진을 그에게 주었다.
"응? 뭔데?"
남궁지완은 사진을 보았다.
흑백이었고, 사람의 형체라기보다 알 속에 있는 사람이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아무리 운동만 하는 그였지만 이 사진이 어떤 사진인지 모를 수 없었다.
"초음파 사진? 그런데 왜 이걸……?"
분명히 혜진의 뱃속에 있는 아기의 사진이다.
그런데 이 사진의 아기의 아빠가 누구일까?
이미 동팔을 속이고 자신과 비밀리에 연애를 한 혜진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속이고 동팔과 다시 사귀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거기에 남궁지완은 동팔이 목걸이에 반지를 걸고 마운드에 오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반지의 상대가 혜진이가 되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온갖 의식 속에 혜진은 사실을 말했다.
"우리 아기 생겼어. 4개월이래. 전부터 말할까 했는데… 너무 급작스러워서 말하지 못했어. 처음엔 지울까 생각도 했지만 생명을 죽이는 것… 특히 내 아이를 죽인다고 생각하니 망설였거든. 나의 몸은 나의 것이라도 내 안에 깃든 아이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잖아?"
"뭐…라고?"
예상치 못한 혜진의 말에 남궁지완은 정신이 멍했다.
처음에 혜진의 '우리 아기'라는 말을 믿어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이어서 나온 '4개월'이라는 말이 걸렸다.
'4개월 전? 그때는 시즌을 시작하기 전이잖아?'
지금은 6월을 지나 7월이다.
전반기의 절반이 지난 상황.
4개월 전인 3월 중순이라면 동팔의 아기라고 의심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정말… 우리… 아기……?"
"응……."
4개월이지 아닌지 그리고 진짜로 자신의 아기인지 아닌지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충분히 밝혀낼 수 있다.
그걸 아는 혜진이기에 거짓말을 해도 들통 날 것임을 안다.
남궁지완도 혜진이 거짓말할 이유가 없다는 쪽을 생각의 추가 기울었다.
만약 동팔의 아기였다면, 그대로 말해 지완과 헤어지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완이 동팔에게 현저히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혜진이 굳이 지완의 아기를 가졌다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아기임을 점차 확신하게 되자, 남궁지완은 예상치 못한 아이를 가지게 된 남자의 반응이 나왔다.
"이거… 어떻게……."
고대에선 10대 후반에 아빠가 되지만 그때는 그때다.
지금은 서른 살 즈음에 아빠가 되는 것도 빠르다고 생각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20대 중반에 아빠가 될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황당함과 당혹스러움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느 남자나 겪는 반응이다.
그 이후의 반응은 그의 평상시 생각과 인생의 방향에 따라 바뀐다.
혜진도 지완이 이 이후에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지금이라도 떼라고 할까? 아니면 모르는 척할까?'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으면 받게 될 충격을 생각하자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해……."
지완이 그 말을 하자 혜진은 그 순간 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설마… 결국…….'
갑자기 생긴 아기에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이해는 했다.
하지만 남궁지완이 자신의 아기를 책임지지 않게 되면 모든 책임은 엄마인 자신이 져야만 했다.
그러나 혜진의 생각과 달리, 남궁지완이 미안하다 한 말은 전혀 다른 의미였다.
'내가 미쳤지. 내가 왜 혜진이를 의심해서…….'
그동안 몸이 좋지 않은 이유는 예기치 못한 임신 때문이다.
만나기 힘든 것도 이와 같은 이유였다.
결코 자신이 싫어서, 동팔이 성공해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혜진을 의심했으니 너무 미안했고, 또 너무 부끄러웠다.
지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혜진의 옆으로 갔다.
혜진은 그가 떠나지 않고 자신의 옆에 앉자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의아했다.
'끝이… 아니야?'
그리고 남궁지완은 혜진을 안아주면서 말했다.
"미안해. 내가 그것도 모르고… 미안해. 더 생각해 줬어야 했는데. 아이는 건강해? 몸은 괜찮고?"
그사이 심적으로 고생했을 혜진을 생각하자 남궁지완은 미안함과 고마움이 밀려왔다.
그가 아기와 자신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안아주자 혜진은 절로 안도했다.
"응……."
그리고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안도하면서 나온 눈물이 그녀의 많은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남궁지완은 자신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는 혜진을 더욱 강하게 안아주었다.
결코 그녀를 버릴 일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품에서 눈물을 흘리는 혜진 그리고 그녀의 뱃속에 있는 자신의 아기가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남궁지완은 하나의 걱정이 머릿속을 꿰뚫고 지나갔다.
'잠깐. 나 3년 이내로 월드 시리즈 우승하지 못하면… 이대로 끝……?'
혜진이 자신의 곁을 떠날까봐 하게 된 악마와의 계약이었다.
하지만 혜진은 자신의 곁을 떠날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둘의 사이를 강하게 이어주는 아기가 그녀의 뱃속에 있었다.
강한 후회가 밀려 들어왔다.
'젠장… 내가 왜 악마 따위랑 계약을 해 가지고……!!!'
적어도 이 순간만은 동팔에게 지고 있더라도 행복할 것 같았다.
이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악마와 계약했지만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지금 느끼는 행복에 3년이라는 유통기한이 걸리고 말았다.
이제 남궁지완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월드 시리즈에 우승한다.'
처음에는 동팔에게 이기려던 욕심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옆에 있는 그리고 사랑하는 혜진이와 이후에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목표를 이루어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설령 그것이 상대에게 죽음이 내리는 것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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