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85화 (85/325)

[85]

"혹시… 어쩐 일로 오셨나요?"

시설에 온 이상 당연히 봉사활동으로 온 것이다.

하지만 그가 묻는 것은 그것이 아님을 민희는 알고 있다.

"네. 동팔 오빠와 같이 왔습니다."

그 말을 하는 민희의 약지에 반지가 있었다.

얼마 전, 동팔이 목걸이에 반지를 걸고 마운드에 올라온 기사를 본 선생님이었기에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았다.

"아~ 설마 강동팔 선수와 각별한 사이셨군요."

여기에는 선수가 아닌 이상, 선수와 아주 긴밀한 사이가 아니고선 함께 올 수 없었다.

원래는 민희가 동팔과 결혼하지 않았으니 여기 올 의무가 없었다.

물론 결혼했다고 해서 와야 한다는 의무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민희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같이 놀아주고 있는 동팔을 보며 말했다.

"네. 아직 법적인 사이는 아니지만요."

그녀가 굳이 여기에 온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봉사활동도 좋지만 이제부터 확실히 가드해야겠어. 이상한 것들이 점점 달라붙으려고 하잖아.'

처음에는 다희였다.

그 이후로 시구하는 여자 연예인들, 특히 어린것들이 동팔에게 붙으려 하고 있었다.

이미 그에게 애인이 있다는 증표를 보았으면서도.

처음에는 누가 달라붙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동팔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스캔들이 나왔다가 사라지자 민희도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냥 시구만 했는데 스캔들 기사 내는 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기사를 내는 거지?'

그 질문을 기자이자 친한 언니인 신지예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그녀가 답했다.

"그야 동팔이 인기가 많잖아. 관련은 전혀 없어도 스캔들이라고 하면 일단 클릭하고 보니까 그렇지. 그거 조회 수 꽤 나온다던데."

기사의 조회수에 따라 광고 수입이 달라지니 엉뚱한 기사라도 일단 쓰고 올리는 것만으로 수익이 나온다.

그러니 어떤 빌미만 제공되면 어떻게든 스캔들로 엮어서 기사를 내는 것이다.

실제로 전혀 아무런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민희는 더 이상 참지 않고 전면에 나서기로 했다.

그 시작은 바로 봉사활동을 할 때 같이 있는 것.

신지예를 통해 기사로 나오는 것이 제일 빠르다.

하지만 나중에 다른 기자들의 과도한 접근과 집요한 취재로 개인 정보 노출의 위험이 컸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나온 것이다.

"그럼 저희들은 뭐 하면 되나요?"

강중근의 질문에 시설의 선생님이 답했다.

"그건 힘쓰는 쪽은 선수 분들께서 해 주시면 돼요. 다른 분들은 저희랑 같이 아이들 식사 준비를 하면 될 겁니다."

"네."

같은 시각.

민희의 회사는 토요일도 나와 일을 하고 있었다.

토요일 업무라 반드시 와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눈치가 보이기 때문에 일단 나온 다음 점심을 넘어가서 퇴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른 직원은 다 와 있어도 봉사활동을 간 민희가 여기 있을 수 없었다.

김 대리는 민희의 빈자리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직원들은 생각했다.

'월요일에 민희 씨 큰일 났네.'

'대리님. 단단히 화가 나신 것 같은데…….'

'민희 씨도 눈치 없이 왜 오늘 안 나와서… 어차피 점심 때 나오면 경기 보는 거에 지장도 없잖아.'

하지만 직원들의 생각과 달리 김 대리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오늘 안 나왔다는 건… 역시 전에 말한 봉사활동에 참여한 건가?'

이미 민희는 자신이 오기 전에 미리 김 대리에게 말했다.

물론 회사에 빠지는 이유치고는 빈약하지만 토요일이라 강제할 이유도 없어 넘어갔다.

다만 김 대리는 다른 생각을 했다.

'그럼 내년에 동팔이가 메이저리그로 가면 민희 씨도 같이 가겠지?'

민희는 일을 능숙하게 잘해 그나마 김 대리에게 야단을 덜 맞는 직원이었다.

그에게 있어 민희는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유능한 부하 직원이었다.

하지만 오늘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비를 준비할 계획을 세웠다.

'이제 슬슬 민희 씨를 대신할 사원을 뽑아야 하려나?'

그는 민희가 퇴사할 것이라 생각했다.

안 좋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리라.

그때 민희가 부담을 가지지 않고 편하게 나가며, 회사 입장에서도 그녀의 공백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김 대리는 과장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과장님. 아무래도 신입사원을 뽑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업무를 인수인계 받으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누구라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과장은 김 대리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지금 말이 나오면 별로 안 좋을 텐데… 이건 토요일에 출근 안 했다고 낙인을 찍어 보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고 민희가 오히려 바랄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건 당사자만, 많이 생각해도 같은 부서에 있는 사람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다른 부서에선 사실을 말하더라도 과장님이 말한 식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 당장이라면 그럴 겁니다. 하지만 회사를 나올 때에 웃으며 나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겁니다."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 과연 메이저에 갈 수 있을까? 실력은 알지만 과연 구단에서 놔줄지 모르잖아?"

민희가 미국에 가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동팔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 이야기다.

그게 좌절되면 못 가게 되고 민희는 갑자기 백수가 되어 공중에 붕 뜨게 된다.

과장의 걱정에 김 대리가 답했다.

"놔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금 동팔 선수의 연봉이 장난 아닐 겁니다. 구단에서 감수할 수준이 아니에요. 기본 연봉은 낮지만 옵션으로 붙은 조항을 거의 다 만족시켜서 보너스만 이미 수억대라고 합니다."

야구 선수의 연봉이 억대라는 것은 뛰어난 선수의 상징적인 의미다.

그 외에도 계약금이라는 것이 붙지만 그건 자유계약 조건을 가졌을 때 또는 오래 붙잡기 위해 주는 돈이었다.

계약금은 번외로 하더라도 동팔에게 지급해야 할 연봉은 점점 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동팔이 마운드에 올라오는 만큼 승률이 오르니 손해를 보는 건 아니지만.

연봉을 많이 받고도 받은 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 나았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선수단에 투자를 많이 하지만 프런트 입장에선 가능한 싸고 좋은 선수를 선호하기 마련.

그러니 구단 자체적으로 유망주를 키워 나가는 것이다.

김 대리의 말대로 동팔에게 지급할 연봉이 너무 높아지면 구단에서도 계속 잡고 있을 수가 없게 된다.

"사실 세계에서도 최정상으로 분류되는 투수입니다. 메이저에서 안 움직일 리가 없습니다. 포스팅 금액을 얼마나 부를지가 관건일 겁니다."

김 대리의 그 말에 과장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알았어. 부장님께 말씀드릴게. 그러니 민희 씨한텐 자네가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해. 우리로선 나름 배려를 하지만 갑자기 회사를 나가게 된다면 당혹스러울 것이 뻔하잖아."

"네. 조만간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한편, 동팔은 시설에 있는 아이들과 같이 놀면서 여러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건 대부분 남자아이들이었지만 일부 여자아이들도 있었다.

"형처럼 공 빨리 던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변화구 던지는 거 가르쳐 주세요."

동팔이 야구 선수, 특히 투수인 이상 공을 던지는 것을 물어보는 아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다른 질문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무명시절은 어떻게 버티셨어요?"

"방출되었을 때도 엄청 힘드셨을 텐데 괜찮으셨어요?"

동팔이 재기한 이야기는 아이들도 알고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동팔이 힘들어 하거나 싫어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들을 일이 거의 없는 질문 아니면 기자와 인터뷰를 하기 전에는 거의 듣지 않게 된 질문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 질문을 했다면 왜 아픈 과거를 자꾸 꺼내는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아니었다.

부모가 버리는 바람에 온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그게 아니면 생활고로 인해 아니면 양육비를 아끼기 위해 부모가 보낸 경우도 있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그러했기에 아이들은 다른 누구보다 버림받은 동팔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 그 질문들을 받았을 땐 놀리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맑고 진지한 눈빛을 보자 가벼운 질문이 아님을 알았다.

아이들은 정말로 알고 싶었다.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가진 동팔이 어떻게 세상에서 보란 듯이 성공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한 아이의 물음에 동팔의 가슴을 관통했다.

"오빠처럼 저도 성공하면… 부모님이 받아줄까요? 아니면 새로운 부모님이 생길까요?"

아이들의 물음에 동팔은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구단과 부모가 같은 건 아니지만 순수하게 실력을 키우자 다시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보면 소녀가 방금 전에 한 의문도 이해가 갔다.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과연 실력이 좋아졌다고 구단에서 무조건 받아들일까?

분명히 구위가 올랐지만 오성에 먼저 갔을 땐 그들은 동팔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코치의 한 사람의 실수이기도 했지만 과연 그 코치가 말을 잘 한다고 한들 오성에서 동팔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100%가 아니었다.

"분명히… 방출되었을 땐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 같았어. 그동안 해 온 모든 것이 무너졌으니까. 심지어 내가 살아도 될까? 아니, 야구만 해온 내가 앞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동팔의 고백에 아이들은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진지하게 그의 말에 집중했다.

"그러다 군대를 갔다 오고, 아는 형을 통해서 아마추어 야구를 시작했어. 레슨장에 가서 어떻게든 공을 던졌고… 이대로 주저앉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앞으로 달렸던 것 같아. 그저 내가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몸이 회복하는 건 기대하지도 않았고 이 순간을 어떻게든 버티는 것이 전부였어.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거라는 불안감을 가지고."

여기서 말을 할 수 없지만 그사이에 혜진이 큰 힘이 되어준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헤어지자는 말에 무엇보다 큰 충격을 받았던 이유였다.

지탱해주던 기둥이 사라졌으니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악마와 계약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운이 좋았다? 기적이 일어난 건 그 다음. 설마 정말로 몸이 회복할 줄은 몰랐고… 어느새 여기까지 와 있더라. 너희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과연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너희들도 성공할 수 있으니 노력해라?

하지만 그 노력이 반드시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님을 동팔이 너무 잘 알고 있다.

노력이 크면 클수록 좌절했을 때의 절망도 커진다.

그래서 동팔이 아이들에게 한 말은 이것이다.

"적어도… 지금의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어떻게든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여. 지금 하고 있는 노력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진 않지만 현실에 너무 매몰되어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되거든."

덧없는 희망보다, 오직 현실에 절망하고 원망하는 것보다 비참한 현실에 저항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하게 나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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