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한편, 동팔의 기록에 무덤덤한 한동욱과 달리 남궁지완은 이를 뿌득뿌득 갈고 있었다.
'본인의 힘도 아니고… 악마의 힘을 빌려서 다른 사람들을 농락해?'
남궁지완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본인의 힘으로 동팔을 이기려 했다.
그 첫 대상으로 한동욱을 삼진 시키려 했지만 자신의 의도와 달리 오히려 그에게 홈런과 안타를 허용하며 체면을 구겼다.
실제 체면을 구겼다 생각하는 사람은 남궁지완 본인뿐이었다.
이미 한동욱은 한국 프로야구 리그를 벗어나 메이저리그에서도 강타자가 될 실력이라고 인정받고 있는 중인 타자였다.
그에게 홈런이나 안타를 맞더라도 투수가 공을 못 던졌다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천하의 강동팔의 공조차 쳐서 넘기는 타자를 어떤 투수가 상대할 수 있을까.
그 사실을 알더라도 남궁지완의 자괴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잠깐. 생각해보니… 그때 악마가 그들이라고 했지? 그럼 악마랑 계약을 한 사람이 동팔이 한 명만이 아니란 건가?'
동팔과 비견되는 타자가 있었다.
바로 지금 자신에게 자괴감을 선사하는 한동욱이었다.
다른 타자라면 어떻게든 상대하겠지만 한동욱만큼은 상대가 어려웠다.
선구안도 탁월하지만 걸리는 것은 전부 쳐내는 타자다보니 이젠 한동욱에게 고의 볼넷을 던져 보내고, 그 다음 타자를 상대하는 것이 안타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 한동욱에게 삼진을 먹인 유일한 투수가 강동팔이다.
단순히 한동욱이 뛰어난 재능을 지닌 타자였을 수 있었다.
직접 확인하기 위해선 계약의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것이 제일 빠르지만 그들이 사실대로 말할지 알 수 없었다.
만나기 힘든 동팔이나 동욱에게 찾아갈 필요 없이 그들과 계약한 또 다른 당사자를 부르면 그만이었다.
'불러도 될까? 부르기만 하고 계약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하는 거 아냐?'
그 생각에 그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주저되었다.
그러던 중에 자신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어? 혜진이가?"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나야. 혜진아. 무슨 일이야? 네가 간만에 먼저 전화하고."
남궁지완의 물음에 혜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가만히 있더니, 큰 결심을 굳혔는지 굳은 말투로 말했다.
―저기… 할 이야기가 있어. 전화로 하긴 그렇고… 단둘이 만났으면 해.
그녀의 말에 남궁지완의 표정도 같이 굳었다.
'뭐지? 단둘이 만나서?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혹시… 헤어지잔 말?'
그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어… 응. 그렇지 않아도 곧 서울에서 경기가 있어. 그때 만나자."
―응.
통화는 짧게 끝났다.
하지만 여운은 길었다.
통화를 마친 그는 머리를 감싸 안으며 걱정에 걱정을 했다.
"뭐지? 설마 다시 동팔이한테?"
남궁지완에게 있어 혜진은 사랑하는 사람이다.
동시에 동팔에게 이겼다는 유일한 증거이기도 했다.
다만 그 승리가 야구에서가 아닌 다른 곳에서의 승리지만.
그런데 혜진이마저 자신의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궁지완은 극도로 불안해졌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이젠 어떻게…….'
그러던 중 그의 뇌리에 이 생각이 떠올랐다.
'이 모든 것이 악마랑 계약한 동팔이 때문이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그 생각이 떠오르자 무언가 굉장히 억울했다.
본인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다른 사람은 영혼을 대가로 지불했다지만 악마의 힘으로 뛰어 넘었으니 말이다.
그 억울함과 불안함이 합쳐지자 남궁지완은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나한테… 힘만 더 있었어도… 내 능력을 전부 발휘할 수 있는 힘만……."
합당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진 그는 결국…….
남궁지완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이름이… 스크레이치…라고 했나?"
남궁지완이 그 말을 하자마자 아무도 없는 이곳에 그가 나타났다.
"나를 불렀나?"
단 한 번이지만 강렬한 만남이었다.
남궁지완은 그때 본 영국의 중년 신사가 헛것이 아니라 정말로 악마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맞아. 불렀어. 확인할 것이 있거든."
"확인? 무슨 확인을 하겠다는 건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묻는 스크레이치.
지완이 물었다.
"전에 그들이라고 말했지?"
"그랬지."
"그럼 두 사람 이상이라는 건데… 너랑 계약한 사람이 강동팔 말고 또 누가 있지?"
"꼭 말해야 하나? 이건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서라도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사안일세."
그의 답변에 지완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되지도 않을 개인 정보는 무슨. 법에 저촉되지도 않는 악마면서."
"물론 나는 악마라 법에 저촉되지 않아. 하지만 너무 떠벌리면 앞으로 계약할 때 불리하지 않겠나? 그래도 선심을 쓴다면 의심 가는 사람의 이름을 말해보게. 계약의 여부 정도는 말해줄 수 있으니."
그러자 남궁지완은 숨기지 않고 물었다.
"한동욱. 혹시 너와 계약한 녀석이야? 아니면 다른 악마와 계약했나?"
그의 물음에 스크레이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악마와 계약하지 않았어. 분명히 나와 계약한 사람이지. 다만 어떤 능력을 받았는지 물어도 말해줄 수 없어. 그건 확실히 넘어가자고."
그의 말에 남궁지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까지 바라지 않아. 그래야 너도 그들에게 말할 때, 내가 어떤 능력을 받았는지 말해주지 않을 거잖아?"
그의 말에 스크레이치는 물었다.
"그 말은… 나와 계약하겠다는 건가? 너의 영혼을 거는 내기이자 계약을?"
확인을 구하는 그의 물음에 남궁지완은 살짝 움찔거렸다.
하지만 자신의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그래. 계약하기 위해서 널 불렀잖아. 동팔이가 한 조건과 최대한 비슷하게 해서 가자고. 그 녀석이 건 조건은 뭔데?"
계약의 조건은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5년 이내에 악마가 영혼을 가져가지만 조건을 만족시키면 능력을 유지한 상태에서 악마가 영혼을 취할 권한을 포기한다.
그 조건이 만족시키기 거의 불가능한 것이 되리란 건 남궁지완도 알고 있다.
그의 물음에 스크레이치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내년을 기준으로 3년 이내에 월드 시리즈 우승. 간단하지?"
그는 하나의 사실을 말하고, 하나의 거짓을 말했다.
분명히 동팔과 동욱은 앞으로 3년, 정확히 내년부터 3시즌 이내에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해야 한다.
그러나 계약했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이 3년은 5년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구분할 방법이 없는 남궁지완은 악마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말은 간단하지만 실행하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운이 좋으면 가능하겠지만 단순히 운에 자신의 영혼을 걸 수 없는 법이다.
당연히 그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한 힘을 받아야 했다.
"그럼 네가 원하는 힘은 무엇이지? 어떤 힘을 바라나? 힘? 민첩함? 그것도 아니면 뛰어난 판단력과 빠른 두뇌?"
악마의 질문에 남궁지완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능력을 말했다.
"그것은 바로……."
한편, 남궁지완과 통화를 마친 혜진은 다른 곳도 아닌 산부인과 병원에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그녀가 앉자 남자와 여자, 환자와 간호사를 떠나 전부 시선이 쏠렸다.
'남자가 누굴까?'
'미인을 얻은 남자라면 분명히 능력도 좋겠지?'
산부인과는 단순히 임신의 확인을 위해서 오는 건 아니다.
여성 질병과 관련되면 오는 곳이라 그녀가 꼭 임신을 해서 온 것이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혜진이 여기에 온 이유는 그 이유가 맞았다.
혜진은 방금 전에 찍은 초음파 사진을 보았다.
그 사진엔 자신의 자궁 안에 깃든 생명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혜진은 사진을 보며 그리고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아이에게 말하듯 부드럽게 속삭였다.
"괜찮을까? 네 아빠가… 좋아할까…? 너를……."
야구선수라고 항상 야구만 하지 않는다.
야구는 팬들의 성원으로 유지되는 스포츠다.
당연히 인기를 위해서 선수 본인들이 사생활을 스스로 절제하며 살아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다.
각 구단은 연결된 봉사단체나 시설이 있어 시간을 정해서 선수들과 코치들이 그곳으로 가서 봉사활동을 했다.
여기는 인기가 많다고 해서 빠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인기가 많을수록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당연히 최고의 투수로 인정을 받으며, 빼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동팔은 최고의 인기를 얻는 선수 중 한 사람이니 봉사활동에서 결코 빠질 수 없었다.
동팔은 시설에 있는 아이들에게도 인기 만점이었다.
시합이 없는 날에 주로 가는데 아주 가끔은 언론에 노출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봉사활동은 기자가 따라가지 않는 이상 노출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토요일은 보통 오후 2시에 경기가 있지만 일정 조정으로 인해 오늘은 RG의 경기가 없었다.
토요일 아침에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 시설의 아이들은 이미 기대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동팔이 동료들과 도착하자 그에게 제일 먼저 달려갔다.
"동팔이 형~!!"
"동팔이 형이다!!!"
동팔은 아이들이 자신에게 우르르 몰려오자 당황스러웠다.
원래라면 인사를 하고, 소개한 다음 순서가 진행된다.
하지만 이미 귀띔을 들은 동팔은 모든 순서를 생략했다.
동팔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자~ 형이랑 가서 놀자. 뭐 하고 놀래?"
동팔의 물음에 아이들은 한 목소리로 외쳤다.
"야구해요! 야구!!"
"형이 던지는 공 보고 싶어요!!"
"공, 제가 받아 볼게요. 네?"
아이들은 동팔의 강속구를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다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동팔은 난감했다.
'제대로 던지면 뼈 부러질 텐데…….'
140이 넘는 공도 잘못 맞으면 뼈에 금이 간다.
그리고 150이 넘는 공을 머리에 맞으면 헬멧을 써도 뇌진탕으로 기절한다.
성인 남성에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는 프로 선수도 그러할 진데 아이들이 동팔의 강속구를 받는다면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제대로 받아도 손바닥이 멀쩡할 수 없었다.
그러니 동팔은 전력으로 던지기보다 가볍게 던지는 것으로 정했다. 그것도 아이들에게 있어서 아주 빠른 볼이었다.
아이들의 반응에 선생님들과 직원들은 난감해하며 다른 선수들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되서……."
아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건 동팔이 유일했다.
다른 선수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아이들은 없었다.
덩그러니 남아 쓸쓸하게 되었지만 선수들은 개의치 않았다.
"아뇨. 동팔이가 아이들을 상대하니 오히려 고맙죠."
"덕분에 일에 집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런데 여기에 온 사람은 선수들만 있지 않았다.
선수의 가족이나 결혼을 한 선수의 경우 아내와 같이 와서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중에 특별한 사람도 있었다.
시설의 선생님 중 한 사람이 다른 여성과 달리 남편과 같이 있지 않은 여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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