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83화 (83/325)

[83]

동팔과 눈이 마주친 민철은 방긋 웃었다.

이미 방금 전, 무결점 이닝을 봤으니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민철의 친근한 웃음에 동팔의 입가에도 역시 미소가 지어졌다.

경기 중이었고, 선수였기에 특별히 감사를 표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서로 마주치는 눈빛 그리고 동시에 맺힌 서로의 입에 어린 웃음과 미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의미가 오가게 만들었다.

동시에 민철의 옆에 있는 두 여인도 두 사람의 우정과 신뢰의 모습을 보자 절로 마음이 뭉클거렸다.

하지만 이 모습을 보는 어떤 존재는 그녀들과 전혀 반대의 반응이 나왔다.

뿌드득!!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찍어 누르고 이를 갈며 지켜보는 존재가 있었다.

그는 악마 스크레이치.

그는 동팔이 민철과 시선이 마주치고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인 그에게 보이는 찬란한 광휘(光輝)가 동팔과 민철은 물론 지예와 민희에게도 흘러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악마 중에서도 태초의 순간부터 존재해온 그는 광휘의 정체를 알고 있다.

'사랑. 단순이 연인의 사랑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가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피어나는 근원적인 기쁨이자 존재의 이유… 그리고… 우리 원수의 성품의 근본이자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

사람들은 신성이라고 하면 거룩하고 자신과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신은 절대적이며, 순수하며, 더러움마저 정화시키는 정결함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당연히 그를 보는 것만으로 죽을 것이며, 천사들도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지엄하고 지고한 존재다.

당연히 신의 성질이라면 피조물과 전혀 다른 격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완전히 동떨어진 것도 아니다.

신의 성품을 이어받은,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가 있다.

그 존재의 창조를 위해 세상이 창조되었고, 세상의 모든 것은 신의 형상을 이어받은 존재를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그들이 받은 신의 형상은 완전하지 않다.

그러하기에 피조물이며, 그러하기에 창조주와의 격이 있었다.

세상이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동시에 그들은 불완전하기에 세상의 영향도 받는다.

특히나 스스로 신의 형상을 포기한 존재들이라면 더욱더 영향을 받는다.

스스로 타락하여 세상의 주인 자리를 잃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신의 형상을 잃었다는 것은 아니다.

불완전해도 신의 형상을 이어받았다.

그로 인해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한 유일한 피조물이었다.

지금 보는 것처럼 그들이 이어받은 신의 형상 중 하나가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의 광휘가 흘러나오자 스크레이치는 참을 수 없었다.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저리 하찮고 무력하고 더럽고 추악하며 나약한 존재가 어째서!!'

처음에는 그들을 향한 질투였지만 신성을 허락하지 않은 원수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스크레이치는 태초부터 존재해 온 악마다.

이 장면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라 금방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잠깐이다. 저들은 유약하다. 그래서 지금은 신성의 빛을 내뿜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존재들…….'

이렇게 빛나는 존재와 영혼을 절망에 물들이고 좌절하게 만들고 결국 스스로 신의 형상을 포기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양심을 버리고, 사랑을 버리고, 오직 자신만 생각하는 존재로 만드는 건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계획을 서둘러야겠군. 저 구역질나는 장면을 또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악마 스크레이치는 그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 그리고 위로와 위안을 얻기 위해 어디론가 이동했다.

한편, 저 멀리서 스크레이치가 사라지는 것을 본 존재가 있었다.

"악마에게 있어서 제일 싫은 것은 경멸. 그리고 무시라고 하지. 안 그래?"

웜우드의 옆에 어떤 존재가 있었다.

그 존재는 웜우드의 말에 잠시 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인간은 그를 경멸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경멸이라는 말이 나오지?"

그의 물음에 웜우드가 답했다.

"자신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을 자신이 무시한 존재가 가지게 되는 것을 봤으니까. 이것은 인간이 자신을 경멸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야. 그의 입장에선 원수인 신이 인간을 통해 자신을 경멸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렇지."

웜우드의 말에 그 존재가 답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저 마땅히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

"맞아. 그냥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이야. 하지만 삼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

그리고 웜우드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정말…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조금만 떠올리면 알 수 있는 것을… 자신의 세계와 상상 속의 인식이 전부가 아니라고 그렇게 구구절절이 가르치고, 그걸 이용하여 타락시키라는 전략을 만든 당사자가 말이야. 정작 자신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꼴이라니. 뭐 나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스크레이치가 만든 전략 중 하나.

그것은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것과 실제 세상의 인식의 차이를 크게 만드는 것이다.

상상 속의 가족은 언제나 상냥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지만 현실의 가족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항상 가족들에게 잘 대해줘야 생각하면서도 막상 현실로 마주치면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된다.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사이는 점점 틀어지고, 종국에는 파국에 이르게 만든다.

가족의 예를 들었지만 이것은 가족만이 아니라 친구, 선후배, 직장 내에서 모든 관계에 해당한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일 거라 생각하고 싶어도 현실의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면 그 반대로 상대방이 나쁜 사람일 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는 착하고 좋은 사람일 수 있었다.

'그 차이를 인식하느냐, 못 하느냐'로 당사자의 인간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지 아니면 힘들지만 점점 좋은 관계로 나아가게 될지 방향이 정해진다.

당연히 악마는 그 차이를 크게 만들려 한다.

이상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고, 그 이상적인 존재를 바라며 상대를 대하게 한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생각대로 관계가 흘러갈 가능성은 아주 낮았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상처를 받았느니 어쩌니 하며 남 탓만 하게 된다.

천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상대방을 이상적인 존재가 아닌, 자신과 같이 약하고 이익을 쫓는 사람일 수 있다는 현실을 보게 했다.

괴롭지만 그런 사람이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하게 했다.

그런 생각은 상대에게 특별한 기대하지 않게 만들고, 관계의 트러블이 생길 가능성은 상당히 낮아졌다.

악마는 달콤한 상상을 주며 유혹하지만 천사는 쓰디 쓴 현실을 보여주며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어찌 되든지 간에 계약은 성립이 되었다는 건가? 네가 왔다는 건 그분으로부터 허락이 떨어졌다는 거겠지? 너희들은 그의 명령이 없으면 절대로 행동하지 않는 존재들이니까."

웜우드의 말에 그의 앞에 나타난 존재가 답했다.

"그렇다. 내가 온 것은 정확한 계약의 조건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대가 얻을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 이 계약을 하면 절대로 돌이킬 수 없다. 받아들일 것인가?"

그의 물음에 웜우드가 답했다.

"이미 나에게 남은 길은 없어. 이렇게 길이 열린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지. 그래서… 내가 할 일은 뭐지?"

그러자 그 존재가 말했다.

"정해진 때, 정해진 사람을 죽여라."

의외의 말에 웜우드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 존재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에 거대한 대낫(Scythe)을 소환해 건네주며 이어 말했다.

"그녀를 죽이는 것으로 너의 계약에 적힌 의무가 완료가 되며, 네가 원하는 권리와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또 한 명의 계약자

동팔이 자신이 습관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이용한 그 다음 날.

스포츠 신문에서는 제일 먼저 동팔이 세운 기록을 대서특필(大書特筆)했다.

[2연속 무결점 이닝!!]

[강동팔, 로데 타선을 상대로 7연속 삼구삼진!!]

단순히 연속 범타만이라면 이렇게 나오지 않았다.

세 개의 공으로 이닝을 연속해서 지웠다면 그것은 투수의 공(功)이 아니라 팀의 공로였다.

하지만 삼구삼진은 오직 투수의 역량에만 좌우되는 기록이다.

그리고 삼구삼진을 연타석으로 넣어 이닝을 지운다면 이것은 철저히 투수만의 독보적인 공로다.

아마 리그라면 실력 차이가 많이 나기에 종종 나올 수 있는 기록이겠지만 프로 1군에선 쉽게 나올 수 없는 기록이었다.

프로에 있는 이상,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공 세 개에 삼진이 되는 것을 피하려 한다.

실제로 두 개의 아웃카운트까지 삼구삼진으로 잡았지만 세 번째 타자가 파울을 치거나 진루를 하여 실패한 경우가 가끔 있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진귀한 기록이라 많이 나오지 않는 기록 중 하나였다.

더군다나 한 이닝을 무결점으로 처리하는 것도 희귀하지만 연속해서 두 이닝을 지운 것이다.

거기에 또 하나의 삼구삼진을 추가하였다.

덕분에 7연속 삼구삼진은 동팔이 슬럼프에서 탈출한 상징이었지만 로데에 있어선 치욕적인 기록이었다.

동팔의 기사를 보던 한동욱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알아차렸나? 하긴 그러니까 가능했겠지."

경기 영상을 보지 않아도 그는 이 기록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훤히 보였다.

'동팔의 공을 칠 타자가 거의 없을 테니 유일한 틈인 심호흡을 보는 것으로 직구를 노렸을 거야. 하지만 그걸 알아차린 동팔이 그걸 이용하여 상대방을 가지고 논 거지. 아무리 동팔의 구위가 절대적이라지만 한국 타자들의 실력도 만만치 않아. 쉽게 삼진을 당하지 않거든.'

평상시라면 세울 수 없는 기록이었다.

그러나 동욱의 예상대로 로데는 동팔의 심호흡에 너무 기댄 대가로 이후에 없을 기록의 희생양이 되었다.

"뭐, 됐다. 덕분에 내 홈런 기록이 묻혔지만… 어차피 그건 나중에 최종적으로 결산이 되어야 하는 거니까 상관없겠지……."

그 말을 하면서 한동욱은 동팔의 기사 아래, 자그마하게 나온 자신의 기사를 본다.

기사의 내용은 간단했다.

리그 일정의 절반이 되어가는 지금, 동욱이 30홈런을 쳤다는 내용이었다.

이 속도라면 이번 시즌 60홈런 이상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쓰여 있었다.

분명히 대단한 기록을 담은 기사였지만 동팔이 세운 2연속 무결점 이닝이라는 기록에 의해 부각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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