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오~ 마침 잘됐네. 타이밍 좋고."
민철은 그 말을 하고 바리바리 싸 가지고 온 음식을 풀었다.
시원한 맥주부터 시작해 술안주로 좋을 주전부리는 기본이고, 주린 배를 채울 주먹밥이나 샌드위치, 케밥도 있었다.
"뭐 좋아할지 몰라 일단 종류별로 사 가지고 왔습니다."
"와~ 이렇게 사 오시는 거 힘드셨을 텐데. 고생 많이 하셨어요."
그 말을 하면서 민희와 지예는 민철에게 부채질을 해주었다.
그러다 동팔이 마운드에 오르자 전부 그를 보기 시작했다.
민철은 캔맥주를 따고 먼저 한 모금 마시며 동팔을 보았다.
지금 민철이 보고 있는 부분은 공을 쥐고 있는 손도 아니고, 눈빛도 아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곳은 얼굴.
그중에서도 입이었다.
아무리 가까운 곳에 앉았지만 세세하게 보는 것은 불가능한 거리였다.
민철은 미리 준비한 망원경을 가지고 더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는 동팔이 공을 던지기 전의 모습을 보더니 준비자세를 취할 때 말했다.
"어디 보자… 이번에는 변화구. 포심 아닙니다."
공을 던지기도 전에 그 말을 하자 두 여인은 설마 그럴까 싶었다.
그런데 동팔의 공은 민철의 말대로 곧장 날아가더니 끝에 휘어 들어갔다.
"어머… 정말……."
"확실히 휘었네요……."
이미 공을 보고 어느 구종인지 바로 파악할 수 있는 두 여인이라 중계방송으로 사실 확인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민철의 예견은 계속 이어졌다.
"이번 것도 변화구."
"아, 이번에도 변화구다."
다만 그의 예견은 어떤 변화구까지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여인은 민철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동팔이 포심 패스트볼을 언제 던지는지 아는 것이다.
첫 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한 동팔이 두 번째 타자를 상대할 때, 민철이 말했다.
"이번에는 포심…? 맞아. 포심이야. 확실해. 그리고 타자 배트 나갈 거야."
민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과 다른 강속구가 포수의 미트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말한 대로 타자의 배트가 휘둘러졌다.
따악!!
타구는 제대로 맞지 않아서 파울 지역으로 날아갔다.
이전이라면 민희가 가슴이 철렁일 장면.
하지만 지금은 민철의 정확한 예견으로 인해 소름이 끼쳤다.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그녀의 물음에 민철이 답했다.
"말씀드렸잖아요. 습관이라고.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오랜 시간 지켜본 저는 동팔이가 전력으로 힘을 주며 강속구를 던질 때 습관을 알고 있거든요."
"어떤 습관인데요?"
그녀의 떨리는 말에 민철은 여전히 망원경으로 동팔을 살피며 말했다.
"그건… 지금처럼 심호흡할 때죠. 지금은 방금 전과 같습니다."
민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팔은 다시 빠르게 공을 던졌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로데의 타자는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약간 빗맞았지만 1, 2루 사이를 뚫고 날아가 안타가 되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안타까울 상황이었지만 민희는 전과 달리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묘한 고양감으로 민철을 보고 있었다.
그사이 민철은 이어서 말했다.
"전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몸을 이완시키고 페이스를 조절했습니다. 그래도 한계가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 아직도 이러고 있네요. 역시 습관은 무섭다랄까?"
민철은 확인이 끝나자 망원경을 내려놓고 민희를 보았다.
분명히 안타를 맞았지만 민철의 정확한 분석에 민희의 마음은 지극히 안정되고 있었다.
"그럼 지금 가서 말해주면 되겠습니다. 그것만 알면 동팔이는 이전의 위력적인 기록을 세워나갈 수 있거든요. 지금 동팔이의 슬럼프는 구위나 제구력의 저하가 아니니까요. 또 실점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위험한 타자는 변화구로 거르고, 주자가 쌓이면 직구만 안 던지면 그만이에요. 그건 동팔이도 구단의 코치진도 파악했을 거니 걱정 안 해도 될 거예요."
민철의 말에 민희는 크게 안도했다. 하지만 동시에 걱정이 생겼다.
"그런데 그거 어떻게 말하죠? 경기 중에 통화는 거의 불가능한데… 그렇다고 여기서 크게 말하면 상대팀에서도 알아차리게 되니 좋지 않을 거고……."
슬럼프의 원인을 알았는데 지금은 마땅한 연락 수단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때 지예가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처리해 줄게. 합의 판정 이후에 연락이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봉쇄된 것도 아니거든."
그녀는 야구 전문 기자였다.
당연히 일반인보다 구단과 경기 운영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터.
시간이 생명이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빠르게 어디론가 향했다.
이번에도 직구를 던지자 어김없이 타자의 배트가 휘둘러졌다.
제대로 맞는 경우는 없었지만 운의 차이로 어떤 것은 안타가 되거나 어떤 타구는 범타로 마무리되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상대가 어떻게 자신이 직구를 던지는 것을 알아차리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물어본다고 가르쳐주지 않음을 알기에 그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자신이 나서기 전에 코치진들이 이미 나서서 파악했을 것이다.
그러다 동팔은 오늘 만났던 웜우드의 말이 떠올랐다.
"네가 왜 야구를 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라는 거야."
최근 들어서는 물론, 그동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자신이 웜우드를 신뢰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그가 위험을 감수하고 나타나 말하는 이유는 있을 것이다.
동팔은 생각했다.
'내가 야구를 언제부터 했더라?'
적어도 초등학교 시절은 아니었다.
그때는 야구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 실제로 해본 적이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우연히 체력장을 통해 자신이 체구에 비해 멀리 던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체육 선생님이 야구를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를 한 것이 계기라면 계기였다.
'처음에는 분명히 남들이 하라고 해서 했지만…….'
자신이 공을 던지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들보다 잘 하는 것으로 인정을 받게 되자 사춘기의 동팔은 절로 어깨가 으쓱거리며 올라갔다.
또 자신이 빠르게 던지는 것만이 아니라, 다양한 궤적으로 공을 노력만 하면 던질 수 있자 그 사실에 재미를 느꼈다.
남들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동팔은 그 재미에 푹 빠져 연습에 연습을 쉬지 않았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성장하는 자신을 보니 성취감에 연습을 그만둘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또래 중에서 자신의 공을 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가 중학생까지였다.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었지. 어쩌면 그 감독 때문이 아니라 혹사 부상은 내가 자초한 것도 일부 책임이 있었는지도…….'
단순히 구위가 올라갔다는 사실만으로 노력한 것이 아니었다.
투수인 자신의 실력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었다.
처음 야구를 했을 때 초보자가 무얼 할 수 있겠느냐는 시선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자 자신을 보던 시선은 바뀌어져 있었다.
다행히 자신의 집은 가난하지 않았다.
고급은 아니더라도 야구 장비를 얻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누나의 용돈이 줄어들어 의도치 않은 집 안 내부의 견제를 받아야 했지만.
그러다 그의 야구 인생에 큰 위기가 있었다.
야구를 하지만 단순히 취미로 했으면 하길 바라는 부모님의 바람에 의해 야구 명문고가 아닌,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이다.
그 학교에 들어갔지만 동팔의 위력적인 구위를 앞세워 청룡기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자 집안에서도 동팔에게 야구를 취미로만 하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중학생 때야 실력이 고만고만하다 생각하여 넘어갔지만 프로 입문의 전단계인 고교야구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니 생각을 바꿔야 했다.
야구에 뛰어난 재능을 썩히길 바라지 않았기에 이젠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 주었다.
남은 고교 2년 동안 동팔은 두 번의 청룡기 우승을 맛보았다.
그때가 야구 인생의 첫 절정기임과 동시에 처절한 절망의 시작이었다.
이후에는 남들이 다 알다시피 혹사로 인해 부상을 입었고, 결국 방출되었다.
군대를 갔다 오고, 누나의 도움으로 어찌 회사에 입사했지만 그곳에서 버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상사인 김 대리의 다그침과 야단에 견디기 힘들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게 주된 이유가 아니었지만.
'그냥… 내가 원하는 야구를 할 수 없었어… 단지 그뿐…….'
당시 동팔이 야구를 할 수 있었던 때는 주말 이외에 없었다.
평일에 야구를 한다는 것은 프로에 들어가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야구 훈련은 평일에 할 수 있지만 야구 경기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으면 할 수 없었다.
동팔은 회사에 있더라도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김 대리에게 더 많은 야단을 맞게 되었다.
그때 동팔은 알게 되었다.
'내가… 야구를 정말로 좋아했구나… 남들에게 떠밀려 한 게 아니라…….'
덕분에 자신이 공을 던지던 그 순간이 행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으로 사람들이 좋아하고 기뻐한다는 것도 좋아했다는 것도.
처음에는 남들의 권유로, 그 이후로는 단순히 공을 잘 던지게 된다는 성취감으로 시작한 야구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던지고 싶어. 던지고 싶어. 지금보다 더!!!'
잘 던지고 싶은 것은 기본이었다. 동팔은 또 다른 것을 바랐다.
'내가 진창에 굴러도 함께해 준 사람들. 그리고 내가 못하더라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미 많은 관중들이 경기를 보고 있었다. 동팔은 그중에 세 사람이 눈에 확 들어왔다.
방출된 자신에게 다가와 같이 야구를 하자며 다가온 민철.
퇴출당한 자신을 1년 동안 취재한, 이젠 친한 누나가 된 지예.
마지막으로 미래가 보이지 않던 자신을 선택하고 함께한 민희.
자신을 응원하는 팬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려운 시절에 함께해 준 그들이 더 소중했다.
무엇보다 이곳은 그들이 사는 서울과 멀리 떨어진 로데의 홈구장인 사직까지 찾아와서 응원해주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 동팔은 웜우드가 왜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라 했는지 알았다.
여기에 없지만 자신에겐 가족들이 있었고, 동료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