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78화 (78/325)

[78]

한편, 민철은 새로 사귀게 된 여자친구인 신지예 기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데이트할 수 있는 코스가 얼마나 있을까.

저녁 먹고, 영화 보고, 산책이나 드라이브를 하는 것이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그 순서가 바뀌는 경우가 있지만 이 세 가지가 널리 알려진 데이트 코스다.

기자의 정보력은 의외로 많은 데이트 장소까지 알게 해주었다.

"민철 씨. 다음에 우리 여기로 가 봐요."

그래서인지 데이트를 리드하는 쪽은 신지예 쪽이었다.

민철이 싫다는 건 아니었다.

민철은 여자가 원하는 데이트 코스를 잘 모르기에 이렇게 나서주는 것이 더 편했다.

장소를 고를 권한은 사라졌지만 데이트 장소에 도착하고 난 다음에는 민철이 주도적으로 나왔다.

지예가 장소를 정하면 민철도 나름 조사해서 나왔다.

평상시에 이야기하는 주제는 각자의 직장 생활이었다. 그중 두 사람의 공통분모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야구였다.

오늘 두 사람의 화두는 바로 동팔의 슬럼프 아닌 슬럼프였다.

"그러고 보니까 요즘 동팔 선수가 안 좋아 보이던데 알고 있어요?"

"동팔이가? 왜?"

"최근 4경기 모두 피안타 5개 이상 나왔어요. 몰랐어요?"

"요즘 일이 바빠서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거든. 프로에 올라오자마자 너무 잘 던지고 있어서 안심했더니… 페이스가 떨어졌나?"

"하지만 페이스가 떨어진 것 치곤 너무 갑자기 떨어져서 좀 이상하던데요. 그리고 구위도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그러니 더 이상하죠."

지예의 말에 민철은 작게 중얼거렸다.

"설마… 그거 때문에?"

그의 중얼거림에 지예가 더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네? 그거요? 그게 뭔데요?"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민철은 좋으면서도 당황했다.

"아, 저기. 그건……."

이미 코에 그녀의 화장품과 샴푸 냄새가 풍성하게 다가왔다.

단번에 붉은 얼굴 고릴라가 된 민철.

그는 지예의 질문에 바로 답을 말하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내가 직접 보면 알 것 같아. 마침 잘됐지. 그렇지 않아도 야구장에 한 번 가 봐야 했는데 안 그래?"

민철의 말에 지예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야 좋긴 하지만……."

그래도 데이트하는데 야구 전문 기자인 그녀에게 야구장에 가자니 느낌이 미묘했다.

예를 들면 카페 알바생이 데이트 장소로 자신이 일하는 카페에 왔다는 느낌이랄까?

다른 사람들에게 야구장은 즐겁게 노는 장소이지만 그녀에게 있어선 취재 대상이 있는 곳, 때론 구장 자체가 취재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다면 분위기는 다를 거라 생각한 지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럼 언제 갈 건데요? 표 싸게 예매하는 방법 많은데."

그녀의 물음에 민철이 답했다.

"그야 동팔이가 이번에 등판할 때지."

민철이 말에 지예는 동팔이 언제 선발 등판하는지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자 민철은 그대로 몸이 굳었다.

"그때는 RG 원정인데요. 그것도 제일 먼 부산에서 로데랑 해요. 거기에 주중 3경기 중 마지막 날인 목요일이고."

그녀의 말에 민철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 그래? 그럼… 월차라도 내야 하려나……."

아무리 회사에서 빨리 끝나도 6시 그리고 서울역까지 빨리 가면 30분이 걸린다.

바로 KTX를 타고 가더라도 부산역에 도착하는 시간은 9시가 조금 안 된다.

그 시간이면 이미 경기가 한참 중반을 넘어 끝을 향해가는 시간이다.

어쩌면 9회가 진행될 때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부산역에서 사직구장까지 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더욱더 요원하다.

그러니 민철이 월차를 내겠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꼭 가서 봐야 해요?"

"응. 직접 봐야 확인할 수 있어서 그래. 중계 화면은 한계가 있어서. 그럼 급하지만 월차를 내는 김에 호텔도 예약할까. 이참에 부산에서 놀 겸."

호텔이라는 말에 지예의 눈빛이 빛났다.

"아~ 그래야겠네요. 그럼 호텔 예약도 저한테 맡겨 주세요. 여기 저기 취재하러 가다보니 싸고 좋은 방 있는 호텔을 잘 알거든요."

"그래? 부탁할게."

민철은 별 생각 없이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다.

하지만 이번 선택으로 인해 민철은 인생에 아주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며칠 후.

RG는 개막전 상대였던 로데와 한 번 로테이션을 돌고, 이번에 또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3연전 중 마지막 경기가 있는 날.

동팔은 오늘 선발등판을 하기 전 호텔 자신의 방에서 쉬고 있었다.

리그 초반에는 어림도 없는 독방이었지만 지금은 그만한 대우를 받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팔은 원정을 왔기에 따로 연습할 공간이 없었다.

타자처럼 주변을 치워 배트를 휘두를 것도 아니고, 공을 던져 호텔 벽을 부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리그 초반처럼 상대 타자에 대한 연구나 분석 자료를 보는 것도 아니다.

이미 한 번 상대를 한 타자들이었다.

이전부터 틈틈이 자료를 보았기에 조금만 봐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 동팔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 대한 분석이었다.

'어디서 알아차린 걸까? 내가 포심을 던진다는 것을…….'

그러나 아무리 알아내려 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을 이 방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닥친 현실에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지금은 그것보다 다른 것을 고민하지 그래?"

소리가 들린 곳을 보자 그곳에는 젊은 영국인 청년이 서 있었다.

그를 보자 동팔은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혹시… 전에 봤던 그… 웜우드?"

그가 자신을 스스로 소개하길 악마 스크레이치의 조카 웜우드라고 했다.

스크레이치의 계략을 꺾으려 하는 자.

"맞아. 오랜만에 봤는데 기억하고 있군."

"그런데 다른 것을 고민하라고 했는데, 그건 무슨 의미죠?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고민이 어떤 건지 알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동팔의 물음에 웜우드가 답했다.

"물론 잘 알고 있지. 자신이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는 걸, 상대가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관해서잖아? 앞으로 야구 행보에 중요한 고민이겠지만 너라는 한 사람의 인생의 관점에선 하찮은 고민이기도 하지."

웜우드의 말에 동팔의 눈빛이 안 좋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웜우드는 자신의 말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너에게 있어 야구는 중요한 것이겠지만 네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성취감과 행복은 구분하며 살라고."

웜우드는 그 말을 하고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그러자 동팔이 물었다.

"의미는 알겠지만 좋게 느껴지진 않네요. 그래서 당신이 말하려고 하는 제가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거? 그래. 말 잘 했어. 그렇지 않아도 그 미친 삼촌이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는 바람에 여기 올 수 있었거든. 시간이 아까우니 이런 이야기를 금방 금방 해야지. 다른 것이 아냐. 네가 왜 야구를 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라는 거야."

그의 말에 동팔이 물었다.

"방금 전에 한 말과 다른 것 같은데요. 야구는 하찮다고 한 거 아니었습니까?"

"네 인생 전체에 비해 하찮다는 거지, 야구가 하찮다고 말한 적 없어. 그렇게 들릴 수 있는 건 인정하지만 분명히 선을 긋자고. 너에게 있어 야구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더 중요한 고민이지 않을까? 네가 왜 야구를 하는지. 그 시작을 돌아보라는 거야."

"그 고민을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내가 전에 말 했지? 계약 자체는 막을 수 없지만 적어도 네가 비참하게 되는 건 막을 수 있다는 말을. 그리고 삼촌의 진짜 목적을 막을 수 있다는 거지."

"그럼 스크… 아니 그의 진짜 목적은 무엇입니까?"

동팔은 그의 이름을 말하려다 악마의 이름은 마력이 있어 말하는 순간 알아차린다는 말에 하지 못했다.

그리고 동팔의 물음에 웜우드가 곤란해 하며 답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지금은 말할 수 없어. 말한다고 믿지 않을 것 같거든. 나중에 증거가 생기게 되면 그것과 같이 보여주면서 알려줄게."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내가 방금 전에 말한 고민은 시작점이야. 내가 말 한 대로 한 번 해 봐. 그러면 네가 보지 못한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거니까."

웜우드의 말에 동팔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잠시 있다가 물었다.

"그럼 그 고민을 해결하면 지금 하고 있는 것도 해결할 수 있는 건가요?"

지금 동팔이 당면한 문제는 상대 타자가 자신의 직구의 의도를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그러자 웜우드가 말했다.

"아니, 그런 거랑 상관은 없어. 의도는 내가 말한 것이 전부."

웜우드의 말에 동팔은 다시 눈썹이 찡그려졌다. 그러자 웜우드가 말했다.

"또, 또. 현실에 달관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매몰되는 것도 좋지 않아. 균형을 유지하라고, 균형을. 지금 하는 고민보다 내가 말하는 고민을 하는 것이 더 나으니까 하는 말이야. 이미 주변으로부터 여유를 가지라는 말을 여러 번 듣지 않았어?"

그 말을 하면서 웜우드는 방긋 웃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그 여유를 찾아가게 해주는 고민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웜우드의 말에 동팔이 답했다.

"그건 고민이라기보다 사색에 가까운 거 아닌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그건 그렇고, 저를 도와주려는 의도가 뭡니까? 단순히 삼촌의 계획을 무위로 돌려서 얻는 것이 있나요? 악마들 사이에서도 경쟁이 있습니까?"

스크레이치와 웜우드는 삼촌과 조카 사이지만 동팔은 이미 이 둘이 원수보다 나쁜 사이란 것을 알고 있다.

스크레이치는 공공연하게 웜우드를 무능한 조카라 말하며 발견하는 즉시 찢어 죽이고, 흡수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웜우드는 삼촌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을 하는 중이고.

'악마 사이에도 파벌이 있나? 세력 다툼은 어디에나 있네.'

하지만 웜우드의 말은 동팔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경쟁? 인간들이 말하는 순수한 의미의 경쟁이 있는 건 맞지만 서로 물고 뜯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이미 큰 위기 상황인데 서로 견제하다간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이 현실도 와르르 무너지고 말걸. 악마들은 서로의 협조가 유기적으로 잘 이어져 있어. 네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그리고 웜우드의 말은 이어졌다.

"널 돕는 것으로 나에게 어떤 이득이 있냐고? 당연히 있지. 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존재와 계약을 했거든. 그의 명령과 같은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내가 그동안 가지지 못한 지위를 얻을 거야. 덤으로 안전까지."

"존재? 어떤……."

동팔이 질문하려 하자 그 전에 웜우드가 시계를 보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 있었잖아. 안전한 시간이 거의 다 지나갔어. 미안하지만 가봐야겠다. 삼촌이 언제 여기 올지 모르거든."

웜우드는 그 말을 하고 나타날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동팔은 사라진 웜우드를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설마… 내가 꿈을 꾼 건 아니지?"

하지만 꿈에서 깨어난 것 치고 의식이 너무 멀쩡했다.

그렇게 동팔과 웜우드의 두 번째 만남은 어영부영 마무리되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