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광주광역시를 넘어 그 외곽에 있는 어떤 찻집.
주로 연인들이 차를 타고 와서 단란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기 좋은 장소였다.
그래서 주변에 찻집이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져 경관을 훼손하지 않고 있었다. 그중에 한 찻집에서 한동욱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왔다.
"여~!"
그가 손을 들고 인사하자 상대방도 같이 손을 들었다.
"아, 여기."
상대는 바로 어제 혈투를 벌이듯이 대결했던 강동팔.
동팔이 한동욱의 맞은편에 앉아 메모지를 주며 말했다.
"설마…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계약자였습니까?"
동팔이 준 메모지에는 단 세 가지 정보가 적혀 있었다.
하나는 주는 사람의 이름인 한동욱 그리고 연락처. 마지막으로 '스크레이치'라는 단어였다.
아무도 모를, 알더라도 자신과 같은 계약자만이 알고 있을 그 이름을 적어서 보이니 동팔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메모를 받는 즉시 연락을 했고, 이렇게 약속 장소까지 잡아서 만나고 있었다.
"계약자이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한동욱은 다가온 웨이터에게 주문을 했다.
"아메리카노 하나 부탁드립니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광주 출신인 웨이터는 광주의 자랑인 한동욱을 몰라볼 수 없었고, 어제 피 말리는 접전을 벌인 투수 강동팔도 모를 수 없다.
그래서 사인을 받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했지만 지금은 일을 하고 있기에 거기에 집중하려고 했다.
어쨌건 동팔과 동욱은 만나서 가볍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이름을 말하지 말라는 이유는 뭡니까?"
"정말 모르는 건가요? 악마의 이름은 자체적으로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부르면 알고 느끼고 찾아갈 수 있다고 하죠. 악마와 계약을 했지만 엄밀히 말에 우리는 그의 사냥감… 같은 처지인 이상, 협력해서 어떻게든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욱의 말에 동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제 기억나네요. 확실히 그 말을 하긴 했는데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하긴. 할 수 있으면 그게 좋겠죠. 하지만 그 전에 목적이 같아야 하지 않나요? 그쪽이 풀려나는 조건은 뭡니까? 그에게 듣기론 저와 비슷하다고 들었는데."
숨길 것이 없는 동욱은 그대로 말했다.
"일차적으로 월드 시리즈 우승. 그것도 3년 안으로."
"거의… 완벽하게 같네요. 저도 3년 안에 월드 시리즈 우승이었는데."
"하지만 저는 조금 다릅니다. 월드 시리즈 우승은 기본 조건일 뿐, 더 중요한 것이 있거든요."
"네?"
월드 시리즈가 기본 조건이라면 대체 어떤 조건이어야 할지 상상이 가지 않는 동팔.
하지만 동팔의 예상과 달리 동욱의 조건은 생각보다 싱거웠다.
"제가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는 것을 어머니께서 보시는 겁니다. 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분께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은 그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연히 그것만이 아니라, 그동안 번 돈은 어머니의 호강을 위해 쓰일 것이다. 덤으로 누나와 여동생의 결혼 비용이나 용돈을 주는 것도 가능해졌다.
어머니가 희생하셨지만 자신에게 돈을 쏟아부었기에 때문에 동생들은 물론, 누나도 제대로 된 용돈을 받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네……."
의외의 사실에 놀라면서도 동팔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동욱의 말에 동팔은 절로 이 말이 나왔다.
"정말 효자시군요. 제 스스로가 부끄럽습니다."
부모님에 대해 신경을 끄고 산 건 아니었지만, 그동안 자기 자신에게 매몰되어 살아온 자신을 반성하게 된 동팔.
그러자 동욱이 서둘러 말했다.
"아, 그런 의도로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잖습니까. 바로 협력이죠. 어차피 둘 중 한 사람만 성공해야 하는 조건이 있는 것도 아니니… 우리가 같은 팀에 있다면… 우승 확률은 더 높고, 둘 다 해방될 수 있으니까요."
동욱이 그 말을 할 때, 마침 웨이터가 왔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입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네. 감사합니다."
웨이터는 정중한 인사를 하고 사라졌고, 동팔과 동욱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래서 제안하겠습니다. 너무 실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진 말아주세요. 메이저리그에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몸값이 너무 올라가면 그건 불가능해지거든요."
동욱의 말에 동팔이 답했다.
"그럼 저보고 고의 실투나 볼넷을 내주라는 말인가요?"
"그게 충분히 가능하다면… 그쪽은 투수라 내야수인 저와 달리 몸값이 엄청 뛰어버립니다. 적어도 우리가 한 팀에 속하기 위해선 그들의 구미에 맞는 금액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축구팀을 제외하고, 해외에서 한국 선수를 두 명 이상 영입한 곳이 있는지. 대부분 아시아 시장의 공략과 중계권을 팔기 위해서 데려옵니다. 실력은 옵션이죠."
현실적인 동욱의 분석. 그리고 이것은 동팔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요? 애초에 메이저 리그에서 우리를 보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리고 우린 아직 자유계약 조건을 얻으려면 까마득하게 많이 남았어요. 그쪽은 그나마 나을지 모르지만… 저는 8시즌을 더 해야 가능하고… 그 전에 이미 끝나지 않습니까? 저들의 몸을 달아오르게 해야 가능성이 더 높아집니다."
어느 나라 야구 리그든지 규정이 존재했다.
그중에 선수들에게 미치는 중요한 규정 중 하나가 바로 자유계약 자격을 얻는 조건이었다.
기간마다 달랐지만 프로에 입단하면 구단의 허락이 있기 전까지 다른 구단으로 갈 수 없었다.
있다면 트레이드가 되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다른 팀으로 가는 경우도 꽤 됐다.
구단의 입장에서 실력이 좋아, 지켜야 할 선수는 보호선수로 등록되어 트레이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외의 선수들은 언제 트레이드가 될지 몰랐다.
실력도 없기에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없었고, 오직 구단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구단의 입장에선 선수가 다음 시즌에 적으로 만나는 경우를 최대한 적도록 하는 것이 좋았다.
이전에는 자유계약이 없었지만 결국 시대의 흐름과 선수들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중 한국은 아홉 시즌 동안, 대학 출신은 8시즌 동안 정규 시즌에 출전하여 정해진 요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그러니 동팔이 옵트아웃 조건을 걸었다 하더라도, 구단이 허락하지 않으면 다른 구단으로 절대 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동욱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메이저리그의 구단에서 이들이 속한 RG와 지아가 혹할 정도의 포스팅 금액을 제시하기 않으면 메이저리그의 진출은 요원했다.
"좋은 지적입니다. 초반에 잘 나가다가 나중에 미끄러지면 될 일도 안 되겠죠. 그럼 이번 협상은 결렬되는 것으로 보고… 우리 둘이 메이저에 진출하면 그때 한 번 이야기해봅시다."
다음 단계를 보는 동욱과 달리, 동팔은 지금 넘어야 할 곳을 보고 있었다. 서로 보는 곳이 다르니 이것에 대해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생각한 동욱.
다만 동팔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동갑끼리 어렵게 말할 필요 있냐? 그냥 말 트자."
동팔의 말에 동욱은 피식 웃었다.
"이미 말 터놓고선 무슨. 나도 그 말 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여기 오는데 감독님이나 코치님이 뭐라 말씀 안 하셨어?"
"말씀드렸지. 그러니까 가서 잘 이야기하고 친해지고 오라고 하시더라."
프로에선 상대팀 선수라고 무조건 배척하지 않았다.
트레이드가 일상적으로 발생하기에 언제 어느 팀에 어느 선수가 가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팀이 다르다고 친해지지 말란 법은 없었다. 상대팀이라도 자주 마주치게 되면 친하게 지내는 것이 인간사.
이미 두 사람은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같은 악마의 계약자라는 것과 동갑이라는 것. 또한 힘든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오늘 경기가 있는 동욱은 오래 있을 수 없었다.
30여 분 동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 그들은 찻집을 나왔다. 그러자 웨이터를 포함해서 일부 손님들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기… 사인 한 장 부탁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한 사람이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빛도 비슷한 의미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 동팔과 동욱은 서로 마주보더니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안 될 게 있겠습니까. 그렇지?"
"그야 당연히."
동팔과 동욱은 그들이 내미는 종이와 야구공, 또는 유니폼에 사인했다. 유니폼이 나왔을 때 두 사람은 당황했지만 차에 있던 것을 가져왔다는 말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찻집을 나오자 동욱은 동팔에게 물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택시타고 왔지? 호텔까지 데려다줄까? 어차피 구장도 그 근처라 곧 가봐야 하거든."
"안 될 게 있겠냐. 차비 아끼면 좋지 뭐. 대신 다음에 안 봐준다."
"누가 할 소릴……."
그리고 두 사람은 같이 차를 타고 떠났다.
그 모습을 본 점원과 사장님, 손님들이 말했다.
"어제 피 말리는 접전을 벌였는데도 생각보다 친하네?"
"서로의 기록을 깨서 사이가 안 좋을 줄 알았는데… 의외야."
"두 사람 다 통이 큰 건가? 라이벌이라니… 보기 좋다. 뭔가 가슴이 불타오르는 느낌이야."
한편, 오늘도 경기를 준비하는 RG의 감독과 코치진들은 이미 오늘 경기에 대해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1선발끼리인가? 둘 다 우천 취소가 없었으니까."
"그럴 겁니다. 이거 오늘은 어제와 달리 더 힘들겠는데요."
"그렇지. 특히 동팔을 상대하고 난 팀은… 전보다 더 타격감이 올라오니까……."
"어쩔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좋은 공을 봤는데, 다른 투수가 던지는 공을 보면 상대적으로 만만하게 보이는걸."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순서를 바꾸지 않을 수도 없고……."
RG는 홈페이지나 다른 곳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발 로테이션이 돌아간다.
하지만 실력대로 순번이 결정되는 건 아니었다.
"사실상 1선발은 동팔이, 2선발은 소르스. 3선발이 호프겠지. 강중근이 지금 1선발로 세웠지만… 실제론 4선발정도."
자신의 팀은 4선발이었지만 상대 팀은 에이스인 1선발이었기에 당연히 수비적인 측면에서 불리했다.
그리고 공격력이 좋은 거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못 하지만 않을 뿐, RG가 마운드에 비해 타격이 약한 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어제는 한동욱을 제외하고 지아의 모든 타자들을 동팔이 압도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반대. 상대의 공격력은 상승했지만 자신들의 방어력은 떨어진 상황이었다. 거기에 자신들의 공격 능력도 갑자기 나아질 가능성은 낮았다.
"그럼 상황에 따라서 순번을 바꾸는 건 어떤가요? 얼마 안 있으면 삼연전만 아니라 2연전도 있습니다. 그때, 2연전이든 3연전이든 마지막 경기에만 동팔이를 선발로 등판시키면 되지 않을까요? 동팔이의 공에 익숙해진 팀을 굳이 우리가 감당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순번을 바꾸는 건 좋지만… 감독님. 가능할까요?"
한 코치의 물음에 임상훈 감독은 이전에 있었던, 동팔과의 면담을 떠올렸다. 그래서 이렇게 답할 수 있었다.
"동팔이한테 말하는 거라면 괜찮을 거다. 자리에 연연하는 녀석도 아니고, 팀 사정을 알게 되면 알아서 나서겠지. 오히려 이런 상태가 계속 되면 동팔이가 중근이 얼굴 어떻게 보겠어?"
이미 언론에서는 왜 강중근을 아직도 RG의 1선발로 두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RG의 입장에선 지금 자리를 바꿀 수가 없었다.
"그게 낫겠습니다. 동팔이 실제 1선발이지만 그렇게 되면 2선발로 나오는 소르스가 힘들겠죠. 승률을 생각하면 버거운 쪽을 중근이가 감당하고, 그 다음 경기를 잡아야 하니……."
"연승은 힘들겠지만 승률 6할을 꾸준히 지킬 수 있는 순번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원인을 알고, 처리할 수 있으니 다행이죠. 그럼 오늘도 평상시처럼 훈련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회의를 한참 하고 있을 때, 동팔은 동욱의 도움으로 편하게 호텔까지 왔다.
"고맙다. 태워줘서."
"고맙긴. 갑자기 불러서 내가 미안하지. 그럼 나중에 또 보자. 다음엔 안 져. 네가 전력을 다 하기로 한 이상, 나도 숨기지 않을 거니까."
"그러든지."
라이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동지가 됐다.
동팔은 편하게 생각하고 호텔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동팔은 동욱이 가면서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미안. 사실 그거 말고 다른 걸 말해주려고 했는데… 네가 그렇게 나온 이상 어쩔 수 없지."
동욱이 중얼거리며 핸들을 매끄럽게 돌려 지아구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중얼거렸다.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줘야겠어. 네 몸값이 너무 높아지면… 다음 계획에 차질이 생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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