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너, 남자라고 민희가 하는 말에 단답형으로 말하지 마. 계속 말을 이어 나가란 말이야. 말로 소설을 쓰듯이. 알겠어?"
솔직히 말하면 귀찮은 과정이었다.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것은 한국 남자의 공통된 특성 중 하나였다.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한 문장에 들어가는 단어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었다.
심지어 'ㅇㅇ'만 보내면 친한 사이로 인증됐다.
하지만 처음에는 이렇게 해야 하나 싶었던 동팔이었지만, 민희가 자신의 말에 반응을 보이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힘이 났다.
결국 영화관에 도착하기 전까지 레슨장에 있었던 일, 그 전에 경기장 라커룸에 있던 일도 말하게 되었다.
영화 관람 후 저녁을 먹을 것이기에 둘은 들어가면서 약간의 요기할 거리만 사 갔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생각보다 동팔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얼굴이 많이 알려진 연예인이나 정치인이라도 평범하게 입고 주변에 수행원이나 팬들이 없다면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다.
지난 번, 지하철에서 동팔의 얼굴을 알아본 그 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동팔과 민희가 큰 곤란을 겪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평범한 연인처럼 보였고, 동팔이 유니폼을 입고 나오지 않았기에 표를 받는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고 두 사람을 들여보냈다.
"좋은 시간 되세요."
"네. 수고하십니다."
영화는 요즘 인기가 있다는 영화 하나를 골랐다.
코미디 액션 영화였기에 로맨틱한 분위기를 살리긴 어려웠지만 동팔은 중간 중간 민희의 손을 잡았다.
그는 손깍지를 껴 그녀의 약지 손가락을 느끼면서 안도했다.
'휴… 다행인가? 어쩌면…….'
민희는 영화를 보는 중에 동팔이 자신의 손을 잡자 저절로 심장이 뛰었다. 박장대소하던 기분은 사라지고, 두근거리는 심장만이 느껴졌다.
마주잡은 손을 통해 쿵쾅거리는 자신의 심장이 들키는 건 아닌가 싶었던 민희.
그래도 그녀는 동팔이 잡은 손을 놓지 않았고, 동팔도 한 번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후에 두 사람이 간 곳은 전과 다른 식당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외곽지역이라는 건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된 문제가 있었다.
"가기 전에 뭐 먹을까?"
"아뇨. 괜찮아요. 영화관에서 먹은 게 아직 남았어요."
민희가 퇴근하는 시간은 저녁 6시였고, 영화관에 도착하여 영화를 보기 시작한 때는 6시 35분이었다.
이것도 전에 예매를 했고, 퇴근시간이 시작되기 전이라 빠른 편이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시간은 저녁 8시 정도.
그 상태에서 서울 외곽으로 빠지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9시 겨우 넘어야 식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힘들었죠? 그래도 월요일이라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지… 주말이었다면 아직도 서울 못 나왔을 텐데."
민희는 그 말을 하고 동팔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전문 마사지사만큼 강한 손가락이 아니라 별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져주는 곳은 그녀의 체온에 더 뜨겁게 느껴졌다.
"힘들긴. 그래도 예약 시간에 겨우 도착했네. 졸지에 노쇼(No―Show)족이 될 뻔했어."
"까딱하다가 인터넷에 안 좋은 소문 날 뻔했죠."
가볍게 농담을 하며 두 사람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동팔은 들어가면서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작은 무언가를 굉장히 신경 쓰고 있었다.
'민희가 좋아할까?'
이번에 데이트는 평상시와 다른 데이트였다.
그래서 더욱 신경 써서 준비한 이것을 잃어버리거나 놓고 오지 않게 굉장한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민희는 동팔의 뒤에 갔기에 긴장하고 있는 동팔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식사는 맛있었다.
넓은 창문 밖으로 아름다운 야경이 잔잔하게 펼쳐져 있었고, 부드러운 음악이 얇은 이불처럼 깔리며 분위기를 무르익게 만들었다.
식사를 마무리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동팔은 테이블에서 일어나려는 민희의 손을 잡았다.
"저기, 민희야. 깜빡했는데… 나… 지금 너한테 줄 게 있어."
"네? 뭔데요? 혹시 선물?"
"으응……."
민희는 처음에 무슨 선물을 주는가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일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동팔이 선물을 줄 이유가 전혀 없는 상황이라 의아했다.
그러다 방금 전과 달리 굉장히 긴장하고 있는 동팔의 모습에 민희는 동팔이 줄 선물이 무엇인지 직감했다.
'서, 설마… 그거……?'
과연 예상한 것이 맞을까?
맞았으면 좋겠지만 처음부터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키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 그래도… 요즘 오빠가 내 약지 손가락을 많이 만지는 것 같았고… 그리고 오늘도 뭔가 확인하듯이 영화관에서 많이 만졌던 것 같고…….'
동시에 동팔은 이 짧은 순간에 고민에 고민을 했다.
'정말 줘도 되겠지? 확실히 이게 효과가 제일 좋다고 선배님들이 말씀하셨는데…….'
이성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좋아. 분명히 민희는 좋아할 거야. 그러니 어서!!!'
동시에 또 다른 이성은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장담할 수 있겠어? 앞으로 3년하고 몇 개월 안에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넌 죽어!! 민희를 혼자 만들 셈이야?'
이것을 주고 나중에 져야 할 책임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면 지금 여기까지 온 이상, 동팔에게 남은 길은 외통수뿐이었다.
'지금 갑자기 아니라고 말하면 기대하고 있는 민희는 뭐가 돼? 그리고 못한 다는 것도 아니잖아? 충분히 할 수 있어! 월드 시리즈 우승!!!'
불확실한 자신의 미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팔은 과감히 민희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민희야… 이거… 받아줄 수… 있어?"
동팔은 그 말을 하고, 품안에 숨겨둔 작은 정육면체의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두 개의 반지가 있었다.
하나는 작았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조금 더 컸다.
디자인은 사실상 없는 것과 같았다. 단순하게 얇은 금으로 만들어진 동그란 링으로만 되어 있었다.
하지만 화려하지 않아도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민희로 하여금 눈물이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이미 짐작은 했지만 동팔이 정말 반지를 주자 민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물만 흘러내렸다.
민희의 눈물에 처음에 당황하던 동팔.
하지만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뭐 하고 있어. 어서 끼워주지 않고.'
그 말에 동팔은 민희에게 작은 반지를 그녀의 약지에 끼워주었고,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민희를 안아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동팔의 품에 안겨서 눈물을 떨어트렸다.
동팔은 자신의 가슴에 뜨거움이 느껴졌다.
민희의 눈물이 번지면서 뜨거움도 같이 번져 나갔다.
녀의 눈물 때문에 뜨거운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동팔은 지금 느끼는 뜨거운 무언가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민희는 불안했다.
아무리 동팔을 믿는다지만, 주변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과 동팔의 사이를 인정받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함에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절망도 느꼈다.
하지만 지금 동팔이 손수 끼워준 작은 반지 하나가 그녀의 불안함을 전부 날려버렸다.
비록 서로를 구속(拘束)하는 작은 반지였지만,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작은 구속이 그녀의 마음을 불안과 흔들림으로부터 구속(救贖)해주었다.
"죄송해요… 너무… 너무 좋아서……."
그녀는 겨우 동팔의 가슴에서 떨어져 말할 수 있었다.
동팔은 화장이 번진 그녀의 눈을 닦아주며 말했다.
"네가 좋으면 그걸로 됐어."
동팔이 상자에 남은 반지를 보자 민희도 그 반지를 동팔의 약지에 끼워주었다.
동팔과 민희는 반지를 낀 손으로 서로 마주잡았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손의 감촉은 물론, 반지의 딱딱함이 느껴졌다.
반지는 서로의 체온으로 인해 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갈까?"
"네……."
두 사람은 식당을 나왔다.
예약을 하면서 이미 계산을 끝냈기에 두 사람이 손을 놓을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차로 가면서 말했다.
"오빠. 그럼 경기 중이랑 훈련 중에 반지는 어떻게 할 거예요?"
"그건… 반지를 끼고 할 수는 없으니 어딘가에 놓고 해야겠지?"
"그럼 잃어버릴 수 있잖아요. 목걸이는 제가 살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그리고 내일 마산으로 가야 하죠? 그럼 그 전에 만나요."
적어도 목걸이에 반지를 걸면 잃어버릴 확률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반지는 동팔이 했으니 목걸이만큼은 절대로 자신이 하겠다는 결사의 의지를 보여주는 민희.
동팔이 민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응. 부탁할게."
동팔은 민희를 집에 바래다주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차를 겨우 주차한 후 집으로 들어가기 전. 동팔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과 마주쳤다.
"좋은 영혼이네. 역시 삼촌이 탐낼 만해."
유명인인 자신을 보며 영혼을 말하는 존재. 그의 말에 동팔은 그의 인상착의를 확인했다.
평범해 보이는 금발의 외국인 청년. 하지만 그의 한국어 실력은 한국인만큼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자 동팔은 한 존재를 떠올렸다.
"혹시… 스크……."
악마의 이름을 말하려하자 그가 검지를 세워 입술을 막았다.
"잠깐. 그 이름을 말하면 안 돼. 이름 자체에는 마력이 있어 삼촌이 알아차리고 올 수 있거든."
그는 그 말을 하고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동팔도 악마의 이름을 마저 말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내 소개를 하지. 나는 네가 방금 말하려던 악마의 조카, 웜우드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동지."
"동…지?"
악마의 조카라면 그도 악마라는 말이다. 그리고 악마는 인간의 영혼을 노린다. 사냥꾼인 그가, 사냥감인 자신에게 왜 동지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동팔의 반응에 웜우드가 말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방금 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 연인에게 반지를 끼워주는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고."
그의 말에 동팔은 식당에서 들었던 정체불명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목소리는 분명히 반지를 끼워주라고 말했다. 덕분에 동팔은 더 당황하지 않고 이벤트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놓고 나타난 이유가 뭡니까? 당신도 내 영혼을 노리고 있는 건가요? 하지만 이미 선약이 있는데… 가능합니까?"
동팔의 물음에 웜우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난 너의 영혼을 가져갈 생각이 없어.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 나는 단지 무능하다는 이유만으로 날 죽여 흡수하려는 삼촌이 싫을 뿐이야. 그래서 그 계획을 망치려고 하는 것이고."
그의 말에 동팔은 스크레이치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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