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난 앞으로 4년 안으로…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 야구에 전념하겠다는 동팔의 의지.
그래서 결혼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연인 사이는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골키퍼가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골이 먹히더라도 골키퍼가 바뀌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동팔의 옆에서 여자들이 치근덕대는 것을 보는 게 싫었다.
'그냥 확 공개하고 싶은데… 그걸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방법은 있었다.
이미 언니라 부르며 친한 신지예를 통해 기사로 터트리면 됐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스틸러스의 감독이자 포수이며 동팔과 잘 아는 사이인 민철의 일로 자주 만나고 있었다.
민철이 어떤 사람인지 주효한 정보를 알려준 민희였기에, 지예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실행하기도 전에 민희가 스스로 기각했다.
'아냐. 오빠 허락도 없이 터트리면 곤란할 텐데… 그렇다고 내색하면서 압박하기도 좀 그렇고…….'
월요병과 함께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끙끙거리며 말하지도 못하는 민희.
그러다 민희는 달력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월요일인데… 오빠는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민희가 궁금해하는 동팔은 지금 여전히 레슨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립은 이렇게 잡고, 강하게 내려친다는 느낌으로 던지면 됩니다."
그 말을 하면서 동팔이 직접 공을 던졌다.
쉬리리리릭~ 퍽!
구속은 높지 않았다. 기껏해야 120 언저리가 전부.
하지만 그의 공은 빠르고 강하게 회전하며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여기서 필요한 건 악력과 손목의 힘입니다. 다만… 무리해서 키우려고 하면 다치니까 이렇게 해서……."
공을 던지는 모습뿐만 아니라, 필요한 훈련법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체 쪽을 더 신경 쓰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던지실 때마다 균형이 무너지고 있어요. 그러면 제구도 안 되지만… 속도도 떨어집니다."
"네. 알겠습니다."
동팔의 조언을 명심하여 공을 던졌다.
그러자 방금 전보다 더 정확히, 속도도 더 빨라진 것이 눈에 보였다.
동팔은 사인회로 끝내지 않고, 여기에 온 사람들의 투구 동작을 보며 세세하게 코치해주었다.
그런 와중에 한 사람이 와서 물었다.
"동팔 선수는 어떻게 재기하실 수 있었나요?"
많은 사람들이 아는 이야기였지만 동시에 많이 받는 질문이었다.
이야기를 묻는 것이 아닌, 이토록 힘든 시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대단하게 생각되면서도 그와 같이 뛰어넘고 싶었던 것이다.
"글쎄요… 저도 그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발버둥질하고 발악했을 뿐이죠."
동팔의 말에 듣고 있던 사람들이 마음이 절로 뭉클해졌다.
"그럼… 그 발버둥질한 것 덕분에 지금 이 순간이 있는 건가요?"
노력하면 꿈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바라는 이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팔은 헛된 희망을 줄 생각이 없었다.
"아뇨. 한계 이상의 노력은 오히려 몸을 망쳤을 뿐입니다. 계속 노력하면 된다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죠. 안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성공했을 겁니다."
동팔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가 갸웃거렸다.
이내 동팔의 말이 이어졌다.
"노력으로 얻는 것은 자기만족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노력하는 사이에 시간은 지나갔고, 지나간 시간만큼 환경이 바뀌었습니다. 바뀐 환경 덕분에 제가 여기 있을 수 있었죠."
동팔은 정말로 많이 노력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바뀐 것은 없었다. 오히려 현실의 벽을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절망만 보였다.
그 사이 악마와 우연치 않게 계약을 하게 되었고, 결국 여기에 왔다.
"물론 노력하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바뀐 상황에서 그동안 노력으로 쌓은 경험들이 자양분이 되어 더 많은 것을 얻게 해준 거죠."
노력하지 않았다면 절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절망이 악마를 만나게 만들었다.
이후에 회복력을 얻었고, 그동안 갈고닦은 제구력이 지금에서 큰 빛을 발휘하고 있었다.
동팔은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노예처럼 노력을 하십시오'라는 사탕발림을 하지 않았다.
노력은 노력일 뿐이었다.
결코 무언가 바뀌도록 하지 않았다.
노력이 남들과 아주 작은 기술의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로 조금 더 큰 차이가 나는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차이는 기대하는 것만큼 절대적이지 않았다.
남들보다 노력하여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지만, 합격하는 건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동팔은 시간을 보더니 황급히 말했다.
"아, 죄송한데…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예정보다 오랜 시간 동안 레슨장에 있었다.
그리고 사인 볼을 받은 것도 모자라 동팔의 코치까지 받았다. 비록 못 받은 사람도 있었지만 그가 여기에서 한 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미안한 상황.
"죄송하기는요. 우리가 죄송하죠."
"내일 선발인데도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다니……."
"꼭 응원하겠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레슨장을 나왔다.
동팔이 레슨장을 나오자 레슨장에선 하나의 변화가 생겼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 동팔 선수가 던진 곳이 저 마운드였지?'
'재기를 준비하면서 던진 곳도 좋지만… 그가 방금 전에 던졌으니 그의 기운(?)이 더 강하게 있지 않을까?'
어차피 여기에 와서 던지는 것도 큰 기대를 하고 던지러 온 건 아니었다.
혹시 모르는, 일종의 기원(祈願)과 같은 행동이었다.
실제로 여기에서 던졌다고 해서 갑자기 기적이 일어나서 나았다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동팔은 그들에게 신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져 이곳은 성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전에 동팔이 재기를 준비하던 곳에서만 던지려던 사람들이 둘로 나뉘어졌다.
"난 여기서 던질 거니까 천천히 하세요."
"크흠… 나도……."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덕분에 그들이 기다려야 할 줄은 절반으로 줄었고, 같은 시간에 두 배의 공을 던질 수 있었다.
동팔은 예정보다 늦게 나오는 바람에 주차비가 걱정되었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받은 연봉을 생각하면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사인 볼과 코치에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동팔도 절로 기분이 좋았다.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에 타자 예상치 못한 만남을 하게 되었다.
"꽤나 한가롭게 지내는군.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텐데?"
스크레이치가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없어야 할 차에 누군가 있어 놀란 동팔이었지 만 악마인 그를 떠올리고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게 어때서 그렇죠? 서로 도우며 사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겁니다."
동팔이 운전석에 앉아 문을 닫았다.
"그건 그래. 하지만 지금의 너라면 이 레슨장에서 투구에 전념해야 하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할 일. 지금의 그대는 거기 있는 패배자들과 전혀 다른 사람이란 걸 자각은 하고 다니게."
스크레이치의 말에 동팔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자신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그의 행동에 스크레이치의 눈썹이 씰룩거렸지만 동팔은 보지 못했다.
"내가 저들과 다르다구요? 아뇨. 전혀 다르지 않아요. 몇 년 전의 내 모습과 완전히 같습니다. 그들이 패배자라면 저 또한 패배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그냥 둘 수 없었을 뿐입니다. 큰 도움은 되지 못하더라도 저들이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약간이나마 도와줄 수 있다면 그걸로 좋은 거죠."
"하지만 정작 본인에게 얻는 건 없을 텐데?"
주는 것 없이 사인을 해주고, 가르쳐주기만 했다. 또 쉬어야 할 시간에 쉬지 못했다.
사람을 상대하며 소모한 에너지도 무시할 수 없는 법.
하지만 그래도 동팔은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뇨. 있습니다. 그들을 가르쳐주면서 이전에 잘 몰랐던 것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들의 다양하게 쥐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쥐고 던져야 할지 참고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동팔이 반응하지 않자 스크레이치는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그대가 한 선택이니, 그에 따른 책임은 스스로 지겠지. 그때가 되서 후회하지 않기를……."
그 말을 끝으로 스크레이치는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가 사라지자 동팔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시동을 고는 능숙하게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민희의 손이 분주해졌다.
그녀의 손이 분주한 이유는 업무를 제 시간에 처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화장이 언제 지워진 거래?"
그녀가 있는 곳은 화장실.
업무를 처리하면서 화장할 수 없었기에 일을 다 처리하고 화장실에서 화장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녀가 화장을 마무리하고 돌아오자 김 대리가 말했다.
"데이트 가?"
"네……."
"잘하고 와."
다행히 김 대리는 화장을 하며 시간을 보낸 것에 뭐라 하지 않았다.
물론 민희는 그가 왜 관대한지 알고 있었다.
'역시 업무를 제대로, 정확히 끝내서 다행이야.'
업무에 대해서만큼 실수를 용납하지 않은 김 대리.
깐깐하지만 그만큼 실력과 능력이 있어 과장님과 다른 동료들은 그를 신뢰했고, 믿고 따를 수 있는 선배였다.
실수를 하면 두려움에 벌벌 떨어야 했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
지금 민희가 신경 써야 할 일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제대로 된 데이트였다.
'내일은 오빠가 선발 등판해. 그나마 홈에서 하니까 시간적인 여유도 괜찮아.'
그렇게 생각하며 회사에서 나온 민희는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동팔과 만날 수 있었다.
"민희야. 여기. 타."
도로였기에 계속 정차할 수 없었기에 민희는 재빨리 동팔의 차로 가서 문을 열고 탔다.
그녀가 타자 동팔은 주변을 잘 살피며 차를 몰았다.
"운이 좋다. 마침 지나가던 중에 만나서. 안 그러면 한 바퀴 돌아야 하나 싶었거든."
"그러게요. 오빠. 다행이네요."
두 사람은 목적지인 영화관에 도착하기 전까지 단란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오빠! 오늘 쉬는 날인데 뭐 하고 지내셨어요?"
"나? 간만에 레슨장에 가봤어. 가서 깜짝 놀랐다. 가니까 내 사진이 대문보다 더 크게 걸려 있는 거 있지?"
"정말요? 나도 오빠 입단한 이후로 간 적이 없는데… 많이 바뀌었나 봐요."
"안은 바뀐 건 없더라. 대신 사람들이 엄청 많었어."
동팔은 평상시와 달리 말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것엔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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