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62화 (62/325)

[62]

마실 나오듯이 금은방에 다녀온 동팔은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프로에 입단한 이후 들리지 못했던 레슨장으로 향했다.

"장사는 잘되려나?"

자신이 다닐 때만 해도 어떻게든 유지가 되고 있던 레슨장이었다. 이젠 자신을 전면에 모델로 내세울 수 있다지만 과연 그것이 큰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차를 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레슨장이 있는 건물에 도착한 동팔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저렇게 크게?"

분명히 레슨장은 가격이 싼 지하에 있었다. 그런데 건물 위로 레슨장의 현수막이 크게 걸려 있었다.

현수막에는 동팔이 RG의 유니폼을 입고 투구하는 동작이 크게 찍혀 있었고, 레슨장 위치와 전화번호도 같이 적혀 있었다.

건물주의 허락이 있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동팔의 얼굴이 너무 선명하게 걸려 있었기에 동팔은 연예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후드를 입고 나와야 했다.

다행히 나오는 사이, 그를 알아본 사람은 없었다.

동팔은 사람들의 시선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며 레슨장으로 들어갔다.

동팔은 또 놀라고 말았다.

"어?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레슨장에는 투구를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마운드에 올라 온 사람이 10번의 공을 던지고 내려오더니 다음 사람에게 양보하고 다시 뒤쪽으로 갔다.

그러다가 동팔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왜 내가 주로 던졌던 마운드에서만 줄을 서서 던지는 거야?'

통상 레슨장에 사람이 많이 몰릴 일은 없었다.

대부분 예약제로 운영됐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방문했다. 또 사람이 많이 오더라도 신청만 하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동팔이 최대한 얼굴을 가리며 사장님의 옆으로 갔다.

그가 다가가자 처음에 그를 알아보지 못한 사장님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오늘 자리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오셔야 할 겁니다."

그의 말에 동팔은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오랜만이에요. 사장님."

"…응?"

동팔을 본 사장님이 굉장히 놀랐다.

반가워 그의 이름이 부르려다가 입을 막아서 막았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사장님은 동팔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입단하고 나서 바쁘지 않아?"

"바쁘긴 하지만 월요일이잖아요. 쉬면서 근처에 공 던질 곳을 찾다가 왔는데… 사람이 장난 아닌데요?"

동팔의 말에 사장님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확실히 네 덕분에 장사는 잘되고 있어. 그런데 저기 있는 사람들 보이지? 네가 던졌던 마운드에서 던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 사실 대부분 선수 때 부상을 당해서 재기에 실패한 사람들이야."

"네? 그런데 왜 여기로 와서……."

"그야 너 때문이지. 네가 성공적으로 재기한 곳이라니까 혹시라도 여기서 던지면 영험한 효과라도 보지 않을까 하는… 뭐, 그런 거. 실제로 그런 건 없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 테니 박정하게 쫓아낼 수도 없잖냐. 일단 반값 아래로 해서 받아주고 있어."

동팔이 재기할 수 있는 제일 큰 이유는 악마와의 계약이었다.

물론 레슨장에서 마음껏 공을 던진 것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 전에 초자연적인 존재의 개입이 있었다.

사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여기서 공을 던진다고 한들, 재활이나 재기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여기에 온 사람들을 보니 그냥 보고 갈 수도 없었다.

"사장님 말씀대로 그런 건 없죠. 조금의 위안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하지만 줄이 너무 길었다.

긴 줄에 비해 던질 수 있는 공의 개수는 고작해야 10개. 비록 그들의 재활과 재기를 도와줄 수 없었지만, 다른 건 도와줄 수 있었다.

"사장님. 저 저기에서 던질게요. 그럼 사람이 분산되고, 기다리는 시간도 줄지 않을까요?"

여기에 온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동팔이 던진 곳에서 공을 던졌다.

"알았어. 그리고 고맙다. 이렇게 안 해줘도 되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사실 작년에 제 모습과 다를 게 없는데… 저 모습을 보니 저도 마음이 짠해서 그래요. 그럼 준비할게요."

"응. 부탁한다."

그러는 사이, 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불만은 커져 가고 있었다.

'왜 이렇게 시간을 끌고 지랄이야?'

'빨리 안 던져?'

말을 하지 않을 뿐, 이미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러던 중에 한 사람이 후드를 벗고 다른 마운드에 오르는 동팔을 봤다.

"어? 저기 저 사람…? 강동팔 아냐?"

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동팔을 봤다.

그러자 사장님이 말했다.

"동팔이 맞습니다. 동팔아. 인사 좀 해라."

"네. 사장님. 안녕하세요."

동팔은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인사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은 마운드였기에 그가 올라가도 불평할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던 사람도 멈추고 그를 보고 있었다.

공 던지는 것을 잠시 멈추어도 폭발할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동팔에게 집중하느라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좁은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주시하자 동팔은 조금 민망했다.

그래도 사직구장이나 잠실구장처럼 거의 3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주시하는 것에 비하면 약과였다.

동팔은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준비 운동을 대신했다.

몸을 다 풀고는 글러브를 끼고, 공을 잡은 뒤 표적을 향해 공을 던졌다.

쉭~ 퍽!!

공을 빠르게 표적의 한가운데 적중했다.

[152km/h]

레슨장치고 꽤 정확하게 나오는 수치.

동팔의 강속구를 바로 옆에서 보던 사람들이 감탄했다.

"중계화면에서 볼 땐 몰랐는데… 바로 옆에서 보니 장난 아니다."

"순식간에 그냥 지나가는데……."

"152가 이 정도면 160은 대체 얼마나 빠른 거야?"

정말로 재작년에 120을 못 넘던 그 사람의 공이 맞나 싶었다.

동팔은 한 번으로 부족했는지 두세 번 연속으로 던졌다. 그리고 던지면 던질수록 구속은 점점 더 빨라졌다.

"154?"

"이번엔 157인데?"

"이러다 정말… 160?"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에 동팔이 던진 공은 160을 찍었다.

동팔이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사장님. 여기 스피드건 다시 알아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조금 높게 나오는 것 같은데요?"

"동팔아. 여긴 경기장이 아니잖아. 조금 높아야 의욕이 생기는 거 아니겠냐. 그리고 다른 레슨장에 비하면 정확해. 어떤 곳은 실제 속도보다 7킬로 이상 나오는 곳도 있어. 여긴 오차가 있어도 2킬로 미만이야."

사장님의 말을 최대한 감안해도 방금 전에 던진 동팔의 구속은 시속 158킬로에 달한다는 의미였다.

두 사람의 대화로 단순히 광고뿐만 아니라, 정말 여기 사장님이 동팔과 잘 아는 사이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다가왔다.

"저기… 강동팔… 씨… 아니, 강동팔 선수……."

호칭에 대한 문제도 걱정이었지만 그 전에 그의 다급함과 갈급함이 말을 멈추지 않게 만들었다.

"사인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가 야구공을 하나 내밀었다.

그의 부탁에 동팔은 한껏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 될 게 있겠습니까.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네. 어려운 조건은 아닙니다."

동팔은 그 말을 하고 카운터 위에 있는 유성매직을 손에 들고는 그에게 주며 말했다.

"그 공에 당신의 사인을 먼저 해주시면 됩니다."

동팔의 사인이 있는 공도 좋았다.

하지만 그 공에 자신의 사인도 같이 있다면 그 공의 의미는 본인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 공이 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있어서 더욱 의미가 깊어지게 될 것이다.

동팔의 말에 그는 매직을 받고 울먹이며 말했다.

"네… 고맙습니다……."

평상시에 생각해놓은 사인이 없었기에 고민은 깊었다.

그러나 동팔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기에 자신의 이름을 필기체로 써서 동팔에게 건넸다.

동팔은 그의 사인이 적힌 곳이 자신의 손에 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잡은 뒤, 익숙한 손놀림으로 사인을 하고는 그에게 물었다.

"이동연 씨… 맞나요?"

"네. 맞습니다."

동팔은 공에 사인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사인을 하고 그 아래에 '이동연 씨! 힘내세요!'라는 문구도 적어주었다.

동팔의 세심한 배려에 그가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겨우 참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이후로 예정에 없던 동팔의 사인회가 열렸다.

개인적으로 야구공을 가져오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었기에 사장님은 인심을 크게 썼다.

"자자, 곧 여기 공 있습니다. 중고니까 반값에 팔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동팔을 이용하여 장사수완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네? 그게 정말이에요?"

"여기 있는 공, 전부 다 새 거랑 마찬가지잖아요."

이미 동팔이 재기에 성공하고 입단하면서 오래된 공을 새로 교체했고, 얼마 전에 또 새 공을 들여왔다.

그러니 그들의 말한대로 레슨장의 공은 대부분 새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말이 반값이지, 이런 상황에선 산 가격 그대로 받아도 됐다.

그러자 사장님이 말했다.

"한 번 이상 던지면 전부 중고지. 뭘 그렇게 따지고 그럽니까. 사기 싫으면 사지 마세요. 그리고 지금 돈이 없으면 나중에 주셔도 됩니다."

"아, 아니! 안 산다는 건 아니죠. 너무 주시는 것 같아서 죄송해서 그렇죠."

어찌 되었건 이 좋은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공을 가져오지 못한 사람은 사장님의 배려로 공을 살 수 있었고, 그 공에 자신의 사인을 한 뒤 기다렸다가 동팔의 사인을 받았다.

문구까지 넣었기에 보통의 사인회보다 시간이 걸렸지만,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지막 사람이 받을 때까지, 그들 중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한편, 민희는 여전히 회사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는 업무가 아닌, 다른 일로 인해 복잡했다.

'이제 오빠가 많이 유명해졌으니… 다희랑 같은 케이스가 더 많이 생길 텐데…….'

처음이야 가뿐히 격퇴(?)했지만 이후에도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특히나 시구자로 여성 연예인을 많이 부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안심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다희의 경우는 상대팀의 시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동팔에게 대놓고 달라붙었지 않은가.

그러니 이젠 대놓고 그에게 애인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동팔이 자신에게 한 말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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