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한편, 동팔은 지금 엄청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있었다.
'민희가 왔네…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원래라면 엑센의 선발 투수가 와서 시구를 지도해줬다.
하지만 이번에 시구하는 사람이 그가 아닌 동팔을 지목하는 바람에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범을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잡는 건 이렇게 잡으면 되나요?"
"네. 이렇게… 잡으시면 돼요."
처음에는 그립을 쥐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냈다.
하지만 그녀는 동팔의 바로 옆에 다가와서 말했다.
"손 크기가 달라서 잘 모르겠어요. 잡을 곳으로 직접 놓아주세요."
"아… 네……."
동팔은 다희와의 접촉을 최대한 줄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나오니 동팔도 그녀의 손가락을 잡아서 공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폼은 이렇게 하면 되나요?"
그녀가 어설프게 공을 던졌다.
가르쳐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 총체적인 난국에 제일 효과적인 방법은 몸을 붙여서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것.
그러나 그 방법만은 사용할 수 없었다.
'몸이 붙는 순간, 나는 민희가 아니라 팬들한테 죽을지도…….'
그래서 동팔은 가능한 접촉점을 최소화한 상태로 투구하는 법을 가르쳤지만 손을 잡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동팔은 그녀와 가까이 있을수록,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의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민희의 시선이 따가웠다.
같은 시각.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방금 전 민희의 질투를 불러오는 말을 던진 남자였다.
'꽤나 당돌한 아가씨야. 악마인 내 뒤통수가 따끔거릴 정도로 쏘아볼 줄은 몰랐어.'
그는 동팔과 계약을 한 악마 스크레이치였다.
그는 민희와 동팔을 번갈아보며 생각했다.
'야구로 동팔을 흔들 수 없다면, 다른 요인으로 흔들려 했는데… 이 방법은 효율이 좋지 않군. 무엇보다 저 아가씨의 옆에는 성가신 것들이 붙어 있으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악마인 그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지금 민희의 옆에는 두 수호천사가 붙어 있었다.
그 둘은 민희가 쏘아보기도 전에 이미 스크레이치를 노려보며 경계하고 있었고, 지금은 민희의 옆에서 그녀에게 생각을 불어넣고 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동안 너에겐 동팔과 함께한 시간이 있잖아?'
'동팔이 쉽게 사람을 바꿀 사람이 아닌 건 민희가 더 잘 알고 있잖니?'
'어려울 때 함께한 사람을 쉽게 버리겠어?'
그 덕분인지 민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거의 실패한 작전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크레이치가 순순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힘을 뭉치더니 하나의 생각을 만들어내어 심어 넣었다.
'그럼 왜 지금 당장 결혼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4년을 기다려 달라고 했을까?'
두 수호천사가 그 생각을 막으려 했지만, 악마의 제구는 절묘해서 틈을 파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효과를 바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4년으로 미룬 거지? 혹시… 그 사이에 더 좋은 여자를 만나면 나를 버리고……?'
악마가 만든 생각이 들어오자 민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 것이다.
그러자 겨우 안정을 찾아가게 만든 두 수호천하는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노려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민희의 안정을 찾는 것이 우선.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저 연예인이 예쁘긴 하지만… 전에 사귄 혜진이란 여자보다 예쁘진 않아.'
'미인에게 어느 정도 적응했으니 그걸로 넘어가지 않을 거야.'
'그러니 안심하자. 오히려 결혼하자고 달려들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어.'
두 수호천사가 민희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 스크레이치는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의심은 처녀를 창녀로 보이게 만들지. 의심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날지 모르겠지만… 건투하도록……."
민희의 시련은 단순히 시구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희는 시구를 마친 후, 스케줄이 없는지 좌석에 앉아 관람을 시작했다.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앉은 곳이 문제였다.
엑센의 시구자인 다희가 앉은 곳은 상대팀 RG의 응원석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민희에게 더 중요한 점은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곳에 앉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왜 여기에 왔지?"
"염탐하러 왔나? 아니면 응원 방해하려고?"
"아니면 개념이 없는 건가?"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에도 그녀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한 민희가 그녀에게 말했다.
"저기요… 여기 RG응원석이에요."
그러니 엑센이 시구자인 너는 어서 빨리 저 반대편으로 꺼지라는 의미를 담았다. 하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자리가 여기밖에 없네요."
그녀의 대답에 민희는 생각했다.
'이년이? 지금 개념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무리 동팔 오빠가 좋아도 그렇지. 시구로 초청해준 구단에 대한 예의랑 배려는 어디에 팔아먹은 거야? 그리고 자리가 없어? 구단이 시구자에게 티켓 하나 안 줄 정도로 정신이 없는 건 아닐 텐데?'
이미 민희는 오늘 시구자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찾았다.
연예계에 데뷔한 지 2년.
작년에 수능을 보고, 고등학교를 졸업해 이제 성인 대우를 받기 시작하는 나이였다.
개념 없는 행동에, 버릇도 없는 모습을 보니 민희는 점점 짜증이 올라왔다.
'나보다 다섯 살 어린 핏덩어리가… 지금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기나 해?'
그래도 뻔뻔하게 계속 있겠다는 말에 억지로 쫓아낼 수도 없어 일단 참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에 곧 봉착했다.
중계 카메라가 자꾸 더그아웃에 있는 동팔과 시구를 한 다희를 번갈아 보여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전광판에 그 장면을 보여주니 모를 수 없게 되었다.
당연히 옆에 있던 민희도 같이 찍혔지만 메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 연예인은 손을 크게 들며 자신을 동팔에게 어필했다.
그러나 동팔의 입장에선 앉지 않아도 바늘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다.
'이걸 받아줄 수도 없고… 어떻게 한다…….'
민희가 옆에 없었다면 살짝 웃어 받는 시늉이라도 할 텐데 규정에 따라 아무리 팬이 어필하더라도 반응을 보내면 안 됐다.
지금은 모든 사람들과 심판들도 보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민희가 언짢은 눈으로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는데, 어떻게 받아준단 말인가?
아무리 연애에 둔감한 동팔이라도 어필을 받아주는 순간, 전쟁이 시작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팔의 속을 모르는 주변의 다른 선수들은 키득거리며 말했다.
"동팔아. 저렇게까지 손을 흔드는데 너도 좀 받아주지 그래?"
"지금 저러는 거 다음에 시구 초청받지 않겠다는 각오 없으면 못 하는 거야. 그러니 최소한의 예의로 받아줘야 하지 않겠냐?"
그들도 규정을 알기에 웃자고 한 가벼운 농담이었지만 동팔은 그들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애인이 보고 있거든요."
동팔의 말은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민희가 바로 옆에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팔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중계 장면인데 뭘."
"계속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손 한 번 흔들어줘."
그들의 오해에 동팔은 더욱 자세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 옆에 애인이 같이 찍히고 있거든요.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안 보일 수가 없어요."
동팔의 말에 처음에 가볍게 웃던 그들도 계속 웃지 못했다.
"뭐?!"
"정말?"
마침 또다시 연예인을 비추는 중계 카메라.
그리고 카메라 앵들 모서리에 걸그룹 멤버의 옆에서 거의 노려보고 있는 여인의 눈빛도 같이 볼 수 있었다.
민희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았지만 동팔의 주변에 있던 선수들은 한순간 뒷목이 서늘했다.
"어… 음… 그럼 안 되지. 암……."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난감한 상황에 빠진 그때, 임상훈 감독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말했다.
"선수가 경기에 신경 써야지! 어디에 신경을 써? 동팔이는 지금은 신경 쓰지 말고 전력을 다할 생각이나 해. 연애 문제는 나중에 선배들한테 묻고. 알았어?"
"네."
감독의 말대로 지금은 경기에 전념해야 할 때였다.
무엇보다 오늘의 선발인 동팔에겐 무시할 수 없는 강타자인 민호준과의 대결을 준비해야 했다.
그러니 연애 전선을 사수하기 위해서 동팔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된 민희.
그녀는 홀로 고독하게 자신의 남자를 지키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 전투에 돌입해야 했다.
압도(壓倒)
중계 카메라가 비춰주는 사람은 민희의 옆에 있는 연예인이나 동팔만이 아니었다.
그를 직접 보고 판단하기 위해 온 외국인의 모습도 잡아주었다. 한두 사람도 아닌 그들은 하나도 어김없이 포수 뒤쪽에 있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또한 전부 휴대용 스피드건을 들고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서로 얼굴을 아는지 친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여주자 중계진이 말했다.
[저 사람들이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보낸 스카우터들이죠? 강동팔 선수를 알게 되자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이제 두 번째 선발인데 말이죠.]
[그만큼 한국 야구가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겁니다. LA에 진출해 교두보를 놓았고, 그 이후에는 투수부터 시작해 타자들까지 진출에 성공했으니까요. 그중에 버티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 선수도 있지만… 어떤 선수는 실력을 발휘해서 인정받아 아직도 메이저리그에 있지 않습니까? 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 선수에 대해선 박한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죠? 쿠바나 베네수엘라 출신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건 한국의 야구와 메이저리그의 스타일이 다른 것도 한 몫하고 있습니다. 한국 야구는 빠른 발과 제구력, 다양한 작전과 공격적인 야구를 합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강속구와 다양한 투수들. 또 강타자들이 즐비하기에 힘과 힘의 대결이 주로 벌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메이저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도, 한국에 맞지 않는 피칭을 하게 되면 속절없이 두들겨 맞게 됩니다.]
[그럼 양국의 야구는 스타일만 다르고, 실력은 거의 비등하다는 말씀이신가요?]
[솔직히 그건 아니죠. 하지만 적어도 마이너리그 이상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에는 마이너급이었다면 이젠 마이너와 메이저리그 사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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