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안 늦겠죠?"
"늦어도 어쩔 수 없지. 과속하다가 사고 나면 안 되지."
여유로운 동팔과는 달리, 민희는 자신과 데이트를 하다가 동팔이 늦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다.
동팔은 부드럽게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아, 맞다! 오빠! 혹시 사인해주실 수 있어요? 이번에 과장님이랑 대리님이 오빠 유니폼도 사셨거든요. 그래서 사인 좀 부탁한다고 전해 달라시던데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내일이라도 괜찮아."
그 말을 하던 동팔은 얼마 전 자신이 선발로 등판했던 경기가 시작하기 전을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불펜에서 보면 아는 척 못 할 거라고 말해줘. 나중에 코치님이 말씀해주셨는데,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관중들과 아는 척하면 안 되는 규정이 있다 하시더라고. 당시에는 경기 전이고, 심판들이 보지 못했기에 넘어갔지만… 다음부터 주의하라고 신신당부하셨거든."
"아, 그런 규정도 있었군요. 몰랐네요. 알겠어요. 회사 분들께 전해드릴게요."
사실 경기 이후에 관중에게 말을 걸어선 안 된다는 것도 포함됐다. 그렇다면 민희와도 만나면 안 됐지만 애인이었기에 적당히 넘어가고 있고 있었다.
그래도 경기 후에 만날 때는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후에 만났다.
"그런데, 오늘 와?"
참고로 지난 이틀 동안은 시간이 되지 않아 민희가 경기장에 오지 못했다. 그리고 잠실에서 한다고 한들, 티켓 값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싼 외야석이야 1만원 미만이었고, 더군다나 동팔이 등판하지 않는다면 굳이 경기를 관람할 이유가 없었다.
7회나 8회가 진행되고 있을 즈음에 출발해 어느 정도 끝날 시간에 가면 됐다.
어차피 경기장에 들어가도 동팔과 만날 수도 없었으니 끝날 즈음에 도착해서 만나면 그만이었다.
다른 곳보다 잠실에서 경기를 하면 출퇴근의 방식이 편하기에 이후의 데이트에도 유용했다.
"음… 오늘은 가볼까 생각중이긴 해요. 이번에 4연승을 하게 되면 RG에선 구단 자체적으로 개막 이후 4연승을 하는 데 제일 빠른 기록이 될 거고… 이번에 이기면 6승 2패가 되니 초반에 엄청 잘나가는 거기도 하고요."
다른 것보다 민희가 경기장에 온다는 말에 동팔의 표정은 절로 활짝 피었다.
"그래? 그럼 좀 더 빨리 만날 수 있겠네!"
민희가 천천히 온다고 한들, 동팔이 기다리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민희가 경기장에 온다는 것만으로도 동팔은 절로 기분이 좋아져 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동팔.
"그래도 잠깐 통화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합의 판정이 생긴 이후로 그건 어렵죠?"
"그렇지. DMB로 보고, 더 정확하게 판단해서 신청하면 거의 맞을 거니까."
합의 판정은 이닝 중간에는 30초. 3아웃으로 이닝이 마무리되어 공수 교대를 할 때엔 10초 내로 신청해야 했다.
후자의 경우는 중계방송을 거의 볼 수 없기에 문제가 없었지만 전자는 아니었다.
30초 이내에 중계방송에선 문제의 장면을 보여주고, 그것을 본 코치나 선수가 감독에게 말하면 판정이 번복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경기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려면 적어도 그들만은 모르는 상태에서 합의판정을 진행하는 것이 흥행을 위해서 더 나은 선택이었다.
물론 알지 못해 기회를 날리게 되는 팀의 입장에선 아쉬웠지만, 그것이 지금의 규정이었다.
덕분에 선수들은 물론 코치와 감독들도 더그아웃에 들어가기 전에 핸드폰을 가져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아, 맞다! 우산이 홈구장으로 쓰고 있지? 그럼 민희야. 오늘 경기장에 가면… 혹시 모르니까 도시락 준비해서 가져올 수 있니?"
"도, 도시락이요?!"
동팔이 말에 민희는 생각했다.
'서, 설마… 내 요리 실력을 보려고? 그래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민희는 회사 일에 전념하다 보니 요리 실력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래도 못하는 건 아니었고, 아직 시간은 있었다.
무엇보다 든든한 지원군인 엄마가 있지 않은가?
"네. 준비할게요."
하지만 민희는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하고 경기장에 들어와 있었다.
'설마… 엄마가 친구들이랑 놀러 가셨을 줄이야…….'
그래서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려 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부족했다.
민희가 집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였고, 경기장에 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2시간이 고작이었다.
김밥을 만들기엔 재료를 사고, 다듬으며, 조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상당했다.
김밥이 아닌 다른 것을 준비하려 했지만 문제는 도시락 통이 없다는 것.
결국 도시락 내용물은 어떻게 만들었지만 통이 없어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덕분에 민희가 만든 도시락은 집에서 뒹굴거리며 쉬고 계신 아빠의 차지가 되었다.
도시락을 만든다면서 온갖 노력했지만 시간만 잡아먹힌 것이다.
민희가 경기장에 도착한 시간은 약 6시 30분.
이미 한참 경기가 진행되는 중, 그녀는 예매한 표를 끊고 들어갔다.
'하아… 그냥 경기장 가면 거기서 적당히 사서 가야겠다… 오빠한테 미안하지만…….'
그 생각을 하며 경기장에 들어온 민희.
그러다 민희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잠깐. 어차피 오빠는 선수단에서 준비한 저녁을 먹잖아? 그런데 왜 도시락을 준비하라고 한 거지?'
또한 경기 시작 전에 선수는 관중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니 도시락을 전해주는 것도 쉽지 않은 일.
그러다 민희는 경기장 안에 있는 매점을 둘러보자 동팔이 왜 그 말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에…? 전부… 매진?"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점은 벌써 정리에 들어가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민희는 한 매점으로 들어가서 물어봤다.
"저기요. 벌써 닫으시는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매점 직원이 답했다.
"준비한 거 다 팔려서 그래요. 오늘 우산 홈으로 경기하잖아요."
"네?"
우산이 홈으로 경기를 하는데 그게 왜 매점의 음식이 매진의 이유가 될까?
그러자 직원이 이어서 설명해주었다.
"우산 팬들 장난 아니에요. 오죽하면 먹산이라고 부르겠어요. 수원구장에선 표가 매진 안 되도, 우산 팬들이 오면 매점이 매진되는 거 모르세요? 그거 꽤 유명한 사건인데."
직원의 말에 민희는 잠시 잊고 있던 기사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맞다. 수원구장만 아니라 마산에서도…구장 내 매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횟집 사장님이 '회 뜨다가 세상 뜨겠다'라는 말까지 나왔지?'
그들은 이기고 있으면 좋다고 먹고, 지고 있으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먹었다. 그리고 응원할 때도 먹고, 응원을 잠시 쉴 때는 다시 응원할 힘을 얻기 위해 먹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 이기면 기분이 좋아서 먹었고, 지면 그 마음을 풀기 위해 먹었다.
그래서 민희는 동팔이 왜 도시락을 싸오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아차렸다.
"아… 설마 오빠는 이걸 알고……?"
동팔이 말한 도시락은 자신에게 싸달라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미희가 저녁을 굶는 건 아닐까 걱정해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여긴 잠실이잖아요. 다른구장은 규모가 작지면 여긴 아닌데 매진이 돼요?"
민희의 말에 직원이 답했다.
"저희도 우산 경기 하는 날은 항상 빠듯해요. 그리고 매진한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조만간 기사로 나올걸요? 잠실 매점도 깼다고."
결국 먹산의 아성에 잠실구장의 매점도 무너지고 만 그날.
경기를 마치고 동팔과 만난 민희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눈물을 글썽이며 제일 먼저 한 말은 이것이었다.
"오빠… 나 배고파……."
그녀의 말에 상황을 충분히 짐작한 동팔은 먹을 것이 빨리 나오는 패스트푸드점이었다.
다만 주변의 패스트푸드점이 우산의 팬들에게 털린 관계로 조금 멀리 가야 했지만.
예상치 못한 도둑고양이
동팔의 2번째 선발 등판은 주중 2번째인 수요일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상대하는 팀은 강한 타선으로 유명한 엑센.
작년에서 포스트 시즌 진출에 성공했으며 지금의 RG와 같은 승률이라 같은 순위에 있었다.
현재 RG의 승패는 9전 6승 3패.
연승이 깨진 건 바로 앞에 있던 엑센과의 첫 경기였다.
그래서 RG의 팬들은 너무나 아쉬워했다.
"아… 윤재국이 잘 던졌으면 이번에 6연승할 수 있었는데……."
이미 전에 4연승을 했다.
전년도 우승팀이었던 우산을 상대로 초반에 스윕을 달성했던 것이다. 그래서 RG의 분위기는 그들의 모토대로 신바람을 탔다.
하지만 바로 어제, 엑센과의 경기에서 발목을 잡혔던 것이다.
"사실 시즌 초반에 1, 2, 3선발을 갖춘 팀이 얼마나 되겠냐?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RG는 이미 그 정도를 넘어 섰어. 말이 5선발이지, 사실 1선발이랑 뭐가 달라? 5, 1, 2, 3 선발이지만 실제론 1, 2, 3, 4선발이랑 다를 게 없지."
"초반에 로데랑 오성한테 지긴 했지만 전부 아슬아슬하게 진 거였잖아. 어쩌면 그때 운이 좋았다면 절반 정도는 이길 수 있었는데. 그럼 7승 2패나, 잘하면 8승 1패가 되었을지도 몰라. 그럼 개막 이후 최고 승률도 불가능하지 않았을걸?"
자신의 팀이 이긴다면 좋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건 무리란 사실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솔직히 우산이랑 할 때 운이 우리한테 좀 따랐잖아. 저번에 없던 운이 이번에 온 건지도 몰라. 덕분에 지금 우산은 초상집 분위기잖아. 완패도 아니고, 1점 차 승부에서 졌으니… 후유증이 좀 갈지도 몰라."
팬들은 경기의 결과에 대해 흥분하기도 했고, 좋아하기도 했고,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과에 대해 반응만 나오면 됐지만 어제 패전투수가 된 윤재국은 그럴 수 없었다.
'그때… 내가 다른 걸 던졌더라면…….'
후회를 해봤자 되돌릴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있다.
하지만 같은 실수를 다시 반복할 수 없기에 어제 자신이 실수한 부분을 떠올리며 다음에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투수들이 고민하는 고민도 같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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